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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신혼 여행 (76/182)


76화 신혼 여행
2022.08.23.



 
온몸의 피가 확 식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 근처에서 크게 울렸다. 요한이 흠칫 놀란 내 반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내 복수가 너무 잔인한 것 같아?”

“조금?”

입이 바싹 말랐다.

하지만 나는 요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그와 눈을 마주했다. 붉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서늘하고 흉흉해 보였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

“글쎄.”

요한의 엄지가 내 입가를 문질렀다. 은밀한 감촉 때문에 목덜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어. 죄의 경중을 따지려고 한다면 끝도 없고. 저마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얼마나 많겠어?”

“…….”

“그걸 다 따져가면서 복수할 수 있을까?”

요한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에 취한 것처럼 나긋한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에 새겨진 섬뜩함을 감출 순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복수에 ‘그렇게까지’라는 건 없어. 제대로 상대를 끝내기로 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여야 해.”

어쩐지 그 말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본인 자신한테 하는 말 같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복수라는 지옥 속으로 인생을 걸었던 그 시절의 흑막 요한.


“하지만 요한.”

나는 내 뺨을 감싼 요한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그러다 네가 누구에게 복수당하면 어떻게 해?”

“내가?”

“물론 요한 너는 아주 철두철미하게 잘 끝냈겠지. 내가 자비로웠다고 할 정도니까, 아마 너에게 감히 복수하려고 달려들 존재는 없을 거야.”

실제로 요한은 매우 유능했다.

아직도 나는 요한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불가능한 일은 도대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세상일이 모두 네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잖아.”

원작대로라면 그대로 복수당해 죽었어야 했을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심지어 요한의 곁에서, 정식 부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오히려 리베르탄 시절보다 더 멀쩡히 잘 지내고 있다.


‘요한의 계획에 이런 내가 있었을까?’

당장 요한의 마음을 확신할 순 없더라도 뭔가를 바꾼 건 맞다.


“네가 인간인 이상 네가 모르는 일도 있을 테고, 지금 휘두른 네 칼날이 네 목에 들어올 수도 있어.”

“경고가 하고 싶은 거야?”

“경고라기보다는 걱정이라고 봐줘.”

요한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훑었다. 평소처럼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은 감출 수 없었다.


“만약 네가 그 복수의 대상이 되더라도, 그런 네 결정은 바뀌지 않겠어?”

요한과 내 눈동자가 마주쳤다.

우리는 한동안 고요히 서로의 얼굴의 바라만 보고 있었다.

덜컹, 마차가 움직이며 발끝이 살짝 닿았다. 다시 찌르르 한 소름이 끼쳐 어깨를 움찔하게 됐다.

무표정한 얼굴의 요한이 입매만 매끄럽게 끌어올렸다.


“내가 결정을 바꾸는 일은 없어.”

차갑고도 단호한 대답이다.


“나는 언제나 때에 맞는 최선의 결정을 하니까. 설사 그릇된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 역시 내 선택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렇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요한의 목소리가 그윽하게 가라앉았다.


“난 잘못된 선택 같은 거 안 해. 그러니 겁내지 마. 어떤 공격이 와도 내가 널 지킬 테니까.”

내가 무서워하는 건 다른 게 아니야.


“안심된다.”

너야.


“요한이 남편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요한의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면서, 믿음 같은 게 조각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애써 차가워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요한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

이건 모두 내 마음의 문제다.

괜히 어렵고, 복잡하고, 피곤하게 생각하는 습관 때문이다. 나는 싸늘하게 식은 내 마음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려 했다.


‘에스텔, 너도 요한이 어쩔 수 없었던 걸 이해하잖아.’

그의 말은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다. 나는 요한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해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나를 단순한 복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아.’

리베르탄에서 블란쳇 공작가로 온 뒤 내 처지가 얼마나 편해졌던가. 심지어 요한은 원작과 달리 내 목숨을 위협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괜찮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뜨니, 정말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런데 이번 미르유의 결혼식이 끝나면 같이 데이트하기로 했잖아. 요한이 준비해 둔 건 뭐야?”

내가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물어보자, 요한이 사랑스럽다는 듯 나를 보며 웃었다.


“우리 신혼여행.”

응?

***

황태자 카를로스가 황후궁을 찾았다.

황후는 언제나 그렇듯 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숨죽이며 지내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문가에 서서 그런 어머니를 비웃었다.


“어머니는 참 여전하시군요.”

“……황태자.”

황후가 점잖게 제 아들을 불렀다.


“이제 겨우 근신형에서 풀려났으니, 폐하의 뜻에 거스르지 않게 잘 행동하세요.”

“예, 안 그래도 어머니께서 바라시던 대로 아버지께 지령도 받았습니다.”

카를로스가 비아냥거리며 황제의 직인이 찍힌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버지께서 저보다 아끼시던 오르테카 재상은 어디 바쁘신지, 이 모자란 아들을 쓸데도 있으시네요.”

“폐하께선 황태자를 마음 깊이 아낀답니다.”

황후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카를로스를 타일렀다.


“다만, 장차 위대한 자리를 이을 자격에 걸맞도록 황태자를 키울 생각에 엄하신 것뿐이에요.”

“어머니는 늘 그 말씀뿐이시지요.”

“언젠가 황태자도 제 말을 이해할 날이 올 겁니다.”

“그러기 싫습니다.”

카를로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뭐, 굳이 어차피 궁에 박혀서 아버지의 뜻에 거슬리지 않게 구는 어머니를 이해할 필요는 없긴 합니다.”

“……카를로스.”

황후가 카를로스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수를 놓고 있던 손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게 보였다.


“지금 그걸 화낸다고 내신 겁니까?”

황후는 침묵했다. 카를로스는 그런 황후에게 조소했다.


“전 어머니 같은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제 권력에 방해되지 않는 여자를 골라 편한 대로 사는 건,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카를로스는 제게 화도 내지 못하는 황후를 보고 불현듯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성질대로 제 앞머리를 헝클어뜨리고선, 인사도 하지 않고 황후궁을 떠났다.

황후는 아들을 붙잡지도 않았다.


‘멍청한 여자.’

카를로스는 매 순간 제 어머니를 경멸했다. 황후라는 분에 넘치는 권력을 쥔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꼴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둘이 정말 똑같군.’

그 순간 카를로스는 이상하게 에스텔이 떠올랐다.


‘천한 피 주제에 아주 잘 지내고 있던데.’


‘전하, 이번에 사교계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피해자인 줄 알았던 쥬티 영애가 실은 자작극으로 피해자 행세하며 선량한 블란쳇 공작 부인을 괴롭히고 있었답니다.’


‘여태 리베르탄 공작가의 영애로 생겼던 악명이 전부 악의적인 소문이라는 얘기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확실히 알고 퍼뜨린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어서…….’

근신 중에도 황태자와 친분을 맺고자 하는 호사가들은 그에게 계속 소식을 전달해 주었다.


‘이제 아주 살 판 났겠어?’

억울한 누명이 풀리고, 정식 공작 부인도 되었으니 아마 황태자인 자신은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잊는다고?’

불쑥 화가 치밀었다.


‘감히?’

카를로스는 근신하는 내내 에스텔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저와 결혼할 마음이 있으신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리베르탄 영애가 보여주는 모습에 따라 결정할 수도? 왜, 나랑 결혼하고 싶나? 그렇지만 그런 여자는 넘쳐나는걸?’

천한 피라는 소문에 혹해 한 번 가지고 놀다가 버리려던 여자, 황태자에게 접근하던 여타 다른 귀족 여자들과는 다른 면이 있어 불러내며 모욕을 줬던 여자.


‘난 아직도 너를 생각하고 있는데.’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카를로스는 에스텔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빈자리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 빈 구멍을 메꾸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비슷한 여자를 채워 넣어도 비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한테 뭔 쓸모가 있던 것도 아닌데.’

카를로스가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황후감은 확고했다.

호사스러운 그의 핏줄에도 당당히 옆에 서서 자신을 보좌해 줄 수 있는 여자. 카를로스는 설사 황후가 제 권력을 갉아먹는 한이 있어도 유약한 상대만은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에스텔을 놓친 것도 그래서였다.


‘왜 그리 멀뚱히 보고 있지? 혹시 끼고 싶나?’

번거롭기도 했지만, 다른 여자와 자신이 있을 때 슬퍼 보였던 눈빛이 거슬려서.


‘아쉽게도 난 셋이 하는 건 썩 즐기지 않는데, 보시다시피 급한 일이 있으니 내가 용무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약속 시간에 맞춰 돌아가야…….’


‘그럼 그냥 가던지. 애초에 우리가 뭔 사이라고 내가 널 배려해 줘야 하지?’

그런데…….


‘왜 그 여자 외엔 상대가 안 떠오르지?’

쾅!

카를로스는 지나가던 황궁의 벽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그 여자는 절대 네 조건에 맞는 여자가 아니야.’

무엇보다 남의 여자다.


‘하지만 그래도 에스텔이라면…….’

욱신거리는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고작 여자 따위로 지저분한 일을 벌이는 것은, 황태자가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다음에도 또 일이 벌어진다면, 근신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 곁이 아닌 곳에서 잘 되는 걸 보고 있으니 거슬려.”

역시, 한번 그 빈자리를 채워봐야 뭔가 문제인지 알 것 같다.


‘어떻게든 한 번 더 만나야겠어.’

딱 한 번만.

결국 에스텔도 고귀한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되어 평범한 귀족 부인처럼 변한 걸 본다면. 시시하고 흔한 여자 중 하나가 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겠지.’

 

***

요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바로 짐을 싸서 헤르밀 바닷가 근처로 이동 마법진을 타고 움직였다. 다행히 이번에 요한이 준비한 물약은 전처럼 쓰지 않았다.


‘실패작이지만, 효과가 있을 거야.’

요한은 실패작이라면서 싫어했지만.


‘이렇게 새로 물약을 개발하는 것 자체가 엄청 대단한 일인데.’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바다는 처음 보게 되는 거라서 기분이 엄청 부풀었다.


 


“요한, 근처에 바다가 있대! 바로 보러 가자!”

“바다가 그렇게 신기해?”

요한이 신난 나를 보고 나른하게 웃었다.


“응. 아무래도 처음 보는 거라 기대가 많이 되네. 요한은 전에 바다에 와본 적 있어?”

“몇 번쯤? 가족이랑도 와보고, 필요한 일이 있어서 와보기는 했지.”

“그때 왔을 때는 어땠어?”

“세피로트 해안가에서 보는 바다야, 언제나 그렇듯 똑같았지.”

요한은 조금 감흥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좋아할 줄 알고, 이 일대 바다를 둘러보는 여객선도 예약해 뒀어. 그 여객선을 타고 실컷 구경해.”

“여객선?”

나는 눈을 깜빡였다.


‘거기 사람들이 많이 오려나?’

그런 내 고민을 꿰뚫어 보듯 요한이 픽 웃으며 내 모자를 꾹 눌렀다.


“걱정 마. 지금은 귀족들이 다 수도로 몰릴 때라서, 널 알아볼 만한 귀족은 없으니까. 괜히 수도에서 떨어진 여기로 왔겠어?”

“그런 것도 다 신경 쓰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네 일이라면 다 신경 쓴다고.”

나는 모자 끈을 붙잡고 요한을 올려다봤다. 평소보다 편한 차림을 한 요한이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부딪쳐왔다.


“그리고 옆에 내가 있잖아. 뭘 고민해?”

속삭이듯 웃어준 요한이 말했다.


“영 불안하면 내가 가서 다 강제로 취소시키지 뭐.”

“아, 아니야! 그러면 더 눈에 띌걸?”

요한이 다정하게 나를 안아 들었다.


“그럼 가실까요, 부인?”

“좋아요, 남편.”

나는 요한의 품에 안겨 기댔다.


‘그래, 요한을 믿자.’

이 모든 게 가짜라기엔 요한은 너무 근사하고, 다정했다.


“그런데 보통 여객선에서는 뭐 해?”

“글쎄, 하지만 내가 너를 위해서 준비해둔 이벤트 같은 건 있지.”

“뭘 그렇게 많이 준비했어?! 그러니까 괜히 무섭잖아.”

“기대해 봐.”

“……그냥 우리 가지 말까?”

“안 내려줄 건데?”

누가 뭐라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진짜였다.

***

어두운 감옥.

며칠 사이, 해쓱해진 미르유의 앞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죽은 물고기처럼 시든 표정을 짓던 미르유가 눈을 번쩍 떴다.


“당신이 여기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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