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가짜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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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가짜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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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가짜의 몰락
2022.08.16.
하객들은 충격적인 신랑의 발표에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헤센은 이미 그런 반응을 예견한 듯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미르유 쥬티는 쥬티 남작가에 입적된 딸이기는 하나, 귀족인 쥬티 남작 부인에게서 나온 자식이 아닌 코르티잔이 낳은 딸입니다. 처음부터 출생을 속이고 결혼을 진행하였으니, 이 결혼식은 진행되어선 안 됩니다.”
제국에서 사생아를 가문에 입적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사생아를 친자식이라 속여 결혼시키는 것은 중죄였다.
“어쩌면 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헤센이 참담한 심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사벨라 왕비가 창백한 낯으로 어지러운 듯 머리를 짚었고, 다이아나 공주는 ‘어머니!’ 하고 이사벨라 왕비를 부축했다.
쥬티 남작은 갑자기 몰아닥친 상황에 변명하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하객들의 시선이 신랑 옆에 서 있는 사생아 미르유를 향했다.
‘헤센이, 내가 사생아인 걸 알고 있었어?’
미르유는 새하얗게 질린 채 현실을 부정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끔찍한 현실과 헤센과 있었던 좋은 기억들이 뒤섞였다. 헤센은 언제나 좋은 남자였다. 그래서 미르유는 지금 이 상황이 더 믿기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헤센이었기에.
“헤, 헤센. 그 얘기는 다 거짓이에요.”
미르유가 덥석 헤센의 소매를 붙잡으며 두서없이 사정했다.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겠어요. 하지만 내가, 내가 다 설명할게요. 다 설명할 수 있어요. 내 얘기 좀 들어줘요.”
“……아직도.”
하지만 미르유를 돌아본 헤센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아직도 나를 기만하려 드는 겁니까?”
경멸과 원망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럽니까. 난 다 이해하려 했는데,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언제나 다정하기만 했던 헤센의 변화에 미르유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헤센이 미르유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슬프게 물었다.
“나를 사랑하기는 했습니까?”
헤센은 허망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대답을 바란 내 잘못입니다.”
미르유도 미르유지만, 헤센 역시 지금 이 상황이 충격적인 듯했다. 그래서 헤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식장을 빠져나갔다.
‘이건 꿈이야. 꿈이어야 해.’
헤센의 모습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 많은 소리 속에서 헤센의 구두 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렸다.
쾅! 식장의 문이 닫혔다.
신랑이 도망친 자리에, 화려하게 치장한 신부만 남았다. 신부의 치장이 호사스러워 그 꼴이 더욱 우습고 비참했다.
하객들이 크게 수군거렸다.
“이게 지금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헤센 왕세자가…….”
“그게 말이에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로이엄 왕족들은 뒤늦게 결혼식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하고, 쥬티 남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 남겨진 미르유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급히 달려나가던 헤센의 재킷 주머니에서 빠져나왔던 편지가 떨어져 있었다.
미르유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일어나 편지를 향해 걸어갔다. 눈에 못질이라도 한 듯 문구가 눈에 박혔다.
[마음을 담아, 에스텔 블란쳇.]
그 순간 미르유는 거추장스러운 부케와 면사포를 버리고, 헤센을 뒤쫓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런 미르유를 불렀다.
“쥬티 양! 어디 가는 겁니까?”
“누가 쥬티 양 좀-”
물론 미르유는 그 목소리를 모조리 무시했다. 사생아라는 얘기가 나온 이상 그녀의 가치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
로이엄 왕가처럼 거대한 권력자가 그녀를 비호하지 않는다면, 미르유는 끝이다.
‘대책은 헤센밖에 없어.’
아마 충격적인 사실에 홧김에 저질러 버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본성은 착한 사람이니, 어떻게든 찾아서 만나기만 하면 설득할 수 있다.
‘오해로 빚어진 일이라 수습하고, 다시 결혼하면 돼.’
식장 바깥에 나오자, 결혼식장 바깥의 숲이 보였다.
당연하겠지만, 헤센은 없었다.
“헤센-!!”
미르유는 정신없이 헤센을 부르며 숲속에 들어갔다.
“헤센! 얘기 좀 해요! 헤센! 제발요!”
울창한 나무들 틈을 돌아다닐수록 미르유는 더욱 초조해지고 절박해졌다.
“아악!”
마구 돌아다니던 미르유는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신경 써서 신은 구두 굽이 부러지고, 하얀 웨딩드레스는 진흙이 묻어 엉망이 됐다.
“이게 뭐야.”
넘어지면서 무릎이 다친 건지 따끔거렸다. 땅바닥을 짚은 손엔 생채기가 났다. 쓰라린 감각에 미르유는 비참하고 서러워졌다.
가장 행복해야 했을 결혼식이었다.
“도대체 왜…….”
그 순간 미르유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타났다.
어디서 불어온 건지 모를 꽃잎이 여자의 주변에 흩날렸다. 푸른 장미와 리본으로 묶은 백금발, 눈꽃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연하늘색 드레스.
“어머, 미르유.”
에스텔은 신부인 그녀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결혼식은 어쩌고 왜 그러고 있어?”
“……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무구한 목소리가 미르유의 증오에 불을 붙였다.
“가증스러운 소리 그만해! 다 네가 꾸민 짓이잖아!”
미르유가 땅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일어나 에스텔의 목을 조를 것처럼 노려봤다. 미르유는 증오와 원망이 뭉쳐 폭발할 것만 같았다.
“로이엄 왕국과의 결혼은 내 유일한 소원이었어. 그래서 내가, 내가 딱 한 번만 봐달라고 했잖아. 어차피 내가 결혼한다고 네가 잘못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너는, 너는 기어코.”
“…….”
“이제 일이 이렇게 돼서 속이 시원하니?”
“진정해, 미르유. 무슨 일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에스텔은 미르유를 위로할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어이없는 수작에 미르유는 에스텔이 하는 꼴을 두고 봤다.
에스텔이 무언가를 꺼내 미르유의 손에 쥐여줬다. 화려한 보석이 장식된 단검이었다.
“배 속의 아이도 생각해야지.”
에스텔은 미르유의 귓가에 작게 키득거렸다.
“로이엄 왕국의 축복이라잖아.”
“닥쳐!”
미르유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에스텔을 밀쳤다.
“운 좋게 인생 하나 잘 풀린 네까짓 게 나에 대해 뭘 알아! 내가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아냐고!”
에스텔은 반항하지 않고 연약하게 바닥으로 쓰러진 채 미르유를 올려다봤다.
미르유가 붉은 입술을 비틀며 악에 받쳐 웃었다.
“너 사람 잘못 봤어. 내가 사생아란 것만 까발리면, 내가 끝날 줄 알았니?”
미르유는 단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웃기지 마.”
두려운 듯 어깨를 떨던 에스텔이 눈을 크게 떴다.
“뭐, 뭘 하려는 거야?”
미르유는 겁에 질린 에스텔을 보고 있자니, 묘한 우월감이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코르티잔인 부모에게 돈 받고 팔려와 사생아란 비밀을 숨기고 있던 미르유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만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공처럼 나타난 에스텔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녀보다 힘들어 보였다.
미르유가 지닌 불행 따위는 에스텔 앞에서 어떤 자랑거리조차 못됐다. 그래서 미르유는 에스텔을 용납할 수 없었다.
‘쟨 일부러 저러는 거야. 아마 내가 입양됐으면, 리베르탄에서 학대도 안 받았을걸?’
머릿속으로 성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동안 가짜 흉터로 미르유가 했던 것처럼 하면 돼요.’
에스텔이 로이엄 왕족을 꼬드긴 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직 미르유가 선량하고 안타까운 피해자라 생각했다.
“네가 뭘 해도 소용없어. 그래 봤자 넌 리베르탄의 악녀고, 나는 불쌍한 피해자니까!”
그들은 오랫동안 착한 미르유를 직접 봐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누가 널 믿겠어?”
“……미르유. 그러다 다치면 어떻게 해. 조심해.”
“이제야 네 신세가 걱정되나 보지? 맞아. 내가 또다시 다치면 난 기적처럼 생긴 아이를 잃은 여자가 될 거야. 그러면 다시 예전처럼 모든 게 돌아오겠지!”
미르유의 눈동자에 광기가 넘실거렸다.
“넌 이제 끝이야!”
손잡이를 콱 움켜쥔 미르유가 날을 돌려 제 가슴팍에 강하게 찍었다.
“……!”
당연하게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던 격통은 없었다. 처음에는 제 손의 감각이 잘못된 줄 알았다.
‘장난감이었어?’
단검은 누를 때 자동으로 검날처럼 된 부분이 손잡이 속으로 들어가는 장난감이었다. 검날처럼 보였던 것조차 장난감이라 미르유에겐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럼 대체…….’
주저앉아 있던 에스텔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글썽거렸다. 미르유가 단검을 확 집어 던지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 이 단검이 아니면 내가 방법이 없는 줄 알아? 내가 임신한 줄 아는 이상-”
“또 무슨 방법이 있길래?”
불쑥, 뒤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뻣뻣하게 굳은 미르유가 삐그덕 고개를 돌렸다.
다이아나가 음산한 표정으로 다가와 미르유에게 빈정거렸다.
“저기 있는 나무에 머리라도 박고 유산한 척하시려고?”
“다, 다이아나. 이건 그러니까…….”
“왜, 아까 잘 말하더니 계속 얘기해 보지그래? 너무 능숙한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던데?”
뒤에는 다이아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사벨라 왕비를 필두로 결혼식 하객들이 모조리 모여 있었다.
“어, 어머님…….”
이사벨라 왕비의 서늘한 눈과 마주친 미르유가 몸을 덜덜 떨었다.
‘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고개를 마구 젓던 미르유가, 에스텔을 홱 노려봤다.
“서, 설마 너……!”
하지만 이미 상황은 늦은 뒤였다. 모두가 미르유의 뻔뻔스러운 추태를 목격했으니까.
***
은백조 웨딩홀에 참석한 이들 모두 미르유의 추태를 보고 경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임신을 가지고 거짓말했던 것도 모자라 그동안 공작 부인이 괴롭힌 증거였다던 흉터도 모두 가짜였다는 겁니까?”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짓을……. 방금 전 자해하겠다고 뻔뻔하게 소리치는 거 봤어요?”
미르유는 어떻게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급히 던졌던 단검을 들어 보였다.
“아니에요, 이건 다 에스텔이 짠 함정이에요!”
단검이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이 단검을 보세요!”
“그 장난감이 뭘 어쨌다는 겁니까?”
하객 중 한 사람이 물어보자, 미르유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상식적으로 누가 이런 걸 결혼식장에 가져와요. 그것도 친하다는 친구의 결혼식에요! 아무리 봐도 수상하고 속셈이 있어 보이잖아요.”
그러자 하객 중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르유는 에스텔이 자신을 몰아붙이기 위해 이 단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이렇게 된 이상 에스텔의 시커먼 속내라도 모두에게 까발려야겠다.
“애초부터 이 단검을 나한테 준 것부터가 함정이었던 거예요! 일부러 날 자극해서 모두의 앞에서 이런 상황을 유도하려고요! 제가 거짓말을 했다 해도 에스텔 역시-”
“헛소리 작작해.”
다이아나가 서늘하게 일갈하자, 미르유가 애원하듯 말했다.
“진짜라니까! 다들 저 여자한테 속고 있어! 저 여자는 나한테 복수하려고-”
“그 단검은 당신한테 주려고 에스텔과 내가 같이 고른 아기 선물이야!”
미르유는 둔기로 얻어맞은 듯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뭐라고?”
“네 있지도 않은 아기를 위해 준비한 장난감이었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미르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단검을 내려다보는 미르유의 두 눈에 절망이 서렸다.
‘언제부터 함정이었던 거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허를 찔린 미르유가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을 위로해 주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 속에서 에스텔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나, 난 몰랐어. 결혼식이 이렇게 될 줄도, 그리고 네 배 속에 아이가 없는 줄도. 만약 그런 줄 알았다면 이런 선물은 준비하지 않았을 텐데.”
“그게 왜 공작 부인의 잘못입니까? 애초부터 거짓말한 것도 모자라 괜한 트집이나 잡으려는 사람이 잘못입니다.”
미르유는 디디고 있던 바닥이 무너져 벼랑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녀는 거짓말이 이렇게 탄로 나는 상황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다이아나가 울분이 차오르는 얼굴로 미르유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 어떻게 그 모든 게 다 거짓일 수 있냐고!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다이아나, 그만해라.”
그때 이사벨라 왕비가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미르유에게 다가왔다.
“미르유 쥬티.”
“어, 어머님.”
“감히 날 그렇게 부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