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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그녀에게는 시간이 없다 (72/182)


72화 그녀에게는 시간이 없다
2022.08.09.


발표회장에 충격으로 가득 찬 침묵이 터져 나왔다. 모두 서로의 눈치만 보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성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미르유 쥬티 영애가 임신했다고?’

‘로이엄 왕국에서도 알던 사실인가? 그러면 파혼은 어떻게…….’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난 성녀와 그에 못지않게 충격적인 이야기.

헤센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성녀님. 그게 사실입니까? 정말 미르유가…….”

스텔라는 오히려 그런 헤센의 질문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센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으로 미르유를 돌아봤다.


“미르유, 당신도 알고 있었습니까?”

미르유는 성녀에게 손을 붙잡힌 채로 속상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헤센.”

“왜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아이라는 이유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헤센의 주황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먹을 꽉 쥔 헤센이 새삼 충격에 빠진 것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당신이 털어놓지 못하게 만들었던 거군요.”

헤센이 미르유의 어깨를 감싸며 이사벨라 왕비를 바라봤다.

이사벨라 왕비는 성녀의 말에 무척 당황했으나,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무척 태연했다.


“헤센, 신중하거라. 모두가 보는 자리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헤센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르유와 결혼해야겠습니다. 제 아이까지 가진 이 사람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데도?”

“예. 어머니께서 반대하신다면, 저는 왕세자 자리를 놓고 미르유와 결혼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너를 기다려준 이 어미를 저버리고 말이냐?”

이사벨라 왕비의 질문이 헤센의 가슴을 찔렀다. 왕세자가 성인이 되었음에도, 이사벨라가 왕위를 물려주지 못한 이유는 모두 헤센이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오빠! 어머니께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다이아나, 미안하다. 나는 애초부터 왕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이아나는 헤센의 담담한 사과에 입술을 깨물었다. 미르유는 눈물을 머금고 헤센을 말렸다.


“그러지 말아요, 헤센. 나 때문에 당신이 모든 것을 잃게 할 순 없어요.”

“괜찮습니다. 당신을 저버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애초에 제 것이 아니었겠지요.”

“그래도 당신 가족인데…….”

미르유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성녀님, 역시 성녀님의 말대로 말하지 않을 걸 그랬어요.”

“그렇지 않아요, 미르유. 이사벨라 왕비님, 다시 한번 미르유를 재고해 주세요.”

“죄송하지만 이건 로이엄 왕국 내부의 일입니다.”

“왕비님의 걱정은 이해하지만 이건 서로 간의 비극을 불러일으킬 뿐이에요. 신의 목소리를 듣는 제 조언을 귀담아 들어주세요.”

성녀는 이사벨라 왕비를 애절하게 바라봤다. 주위의 귀족들이 크게 수군거렸다.


“신의 목소리라니…….”

“그러고 보니 성녀님께서 로이엄 왕국의 축복이라 하셨지요? 무언가 있는 걸까요?”

철벽처럼 굳건하던 이사벨라도 신이라는 이름에는 약했다. 이사벨라 왕비가 다시 한번 미르유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헤센을 바라봤다.

한 번 헤어질 뻔해서인지 헤센은 더 확신 있어 보였다.


‘이 또한 신의 뜻인가?’

이사벨라는 한숨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저, 정말입니까, 어머니?”

“그래. 로이엄 혈통까지 가진 아이를 내칠 수야 있겠느냐. 그간 결혼을 미루던 내 책임일지도 모르지.”

이사벨라가 스텔라를 보며 말했다.


“신의 뜻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헤센이 미르유를 잃고 행복할 것 같지 않군요. 상황이 이러하니 성녀님의 조언대로 두 사람의 결혼을 일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왕비님께서는 결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이토록 사랑스러운 새 가족과 아들의 행복을 얻으셨으니까요.”

스텔라가 꽃처럼 활짝 웃었다.


“어렵게 이루어진 사랑이니만큼 제가 두 사람의 미래를 축복하고 싶어요.”

미르유가 배시시 웃으며 헤센을 올려다봤다. 헤센도 기쁜 듯 미르유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미르유는 쑥스러운 듯 성녀의 축복을 사양했다.


“아니에요, 이렇게 도와주신 걸로도 너무 큰 은혜를 입었는걸요.”

“사양할 필요 없어요. 이 행복은 미르유 당신이 노력해 얻은 행복이니까요.”

성녀 스텔라의 주위에서 성스러운 빛이 피어올랐다. 스텔라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며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빛이 헤센과 미르유를 감쌌다.


 
미르유는 눈을 끔뻑거리며 손으로 목을 더듬거리다 리본을 풀었다.


“목이 이상하게…….”

그녀의 목에는 아무런 흉터도 없었다.

희고 매끄러운 목을 보며, 주위에서는 환호했고, 미르유는 ‘감사해요, 감사해요, 성녀님’ 하며 오열하며 헤센의 품에 쓰러졌다.

동화의 결말처럼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스텔라가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

성녀 스텔라.

로이엄 왕비가 파혼을 위해 사람들을 많이 불러모았던 탓에 소문은 빠르게 제국 전역에 퍼졌다.


“제국에 성녀 스텔라 님 얘기 들었어?”

“그전까지 가장 낮은 곳에서 제국을 위해 봉사하고 계셨다던데. 이번엔 쥬티 영애의 아픔을 넘기지 못하고 나서셨던 모양이야.”

제국민 모두가 고귀한 성녀 스텔라의 등장을 반겼다. 특히 그녀가 등장부터 만든 완벽한 사랑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두 사람이 역경을 딛고 결혼하다니, 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워요.”

“성녀님께서 신께 기도를 드리자, 신께서 그 기도에 답하듯 쥬티 영애의 목에 있던 큰 흉터도 한 번에 없애주셨다고…….”

 

***

나는 미르유 소식을 들으며 정보 길드로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


“성녀의 등장만으로 새로운 신자와 기부금이 그렇게 늘었다면서?”

옆에 앉은 베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전의 세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늘고 있어요. 아무래도 기적이라는 얘기가 신자들의 마음을 크게 울렸던 것 같아요.”

소식을 전하던 베티는 불만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마님,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상황이 너무 공교롭잖아요.”

“가끔 현실에선 거짓말 같은 일이 계속 벌어지곤 하잖아.”

“그래도 그렇죠.”

물론 나도 이번에 일이 전부 진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오히려 반대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미르유의 뒷배가 성녀였던 걸까?’

그동안 나는 미르유 혼자서 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배후를 추측하고 있었는데, 성녀가 등장했다.


‘그런데 왜 성녀가 그랬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리베르탄에 입양되어서?’

하지만 그렇다기엔 더 이상했다. 리베르탄 공작가는 나를 입양한 뒤로도 계속 스텔라를 그리워했고, 스텔라는 언제든 리베르탄 공작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처형당하기 전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상식적으로 리베르탄 공작가와 관련된 문제라면, 스텔라는 진작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뭔가 있어.’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정보 길드에 도착해 있었다. 꽃집으로 위장되어 있던 저번과는 장소가 달라져 있었다.

완전 허름한 민가였다.


“베티. 여기가 맞아?”

“네. 기밀을 위해 다른 지점으로 안내했더라고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보호해 드릴게요.”

위장한 장소는 어둡고 칙칙했다.

내부로 들어가니 안에 있던 길드 마스터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의뢰인님.”

“의뢰는요?”

“완벽하게 완료했습니다. 여기 의뢰인님이 명하셨던 미르유 쥬티에 대한 조사와 새 신분증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베티가 추천했던 대로 이 정보 길드는 아주 우수했다.


‘역시 미르유가 태어났을 때, 쥬티 남작 부인은 임신 중이 아니었어.’

비밀리에 쥬티 남작가를 드나들던 코르티잔에 대한 정보까지 완벽했다. 나는 정보 길드 마스터에게 조사한 서류를 다시 돌려줬다.


“이제 이 정보를 보관했다가 제가 말씀드린 사람이 오면 정보길드에서 조사한 것처럼 전달해 줘요.”

“예, 알겠습니다.”

이제 미르유의 결혼식을 위한 준비가 완성되어 갔다. 그래서 나도 무척 그녀의 결혼식이 기대됐다.


“그러면 의뢰는 여기서 마무리된 걸로 할게요. 다음에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들를게요.”

내가 자리에 일어서자, 길드마스터가 조심스럽게 나를 붙잡았다.


“그런데, 의뢰인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됩니까?”

“무엇인가요?”

“저…… 새 신분증을 준비하신 이유를 물어봐도 됩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대답해야 하나요?”

“꼭 대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런 겁니다. 의뢰인님은 공작가에서 무척 잘 지내고 계셨으니까요.”

“정보길드의 조사로는 그런가요?”

확실히 정보길드의 조사로는 내가 갑자기 새 신분을 준비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사교계에 데뷔할 준비까지 하고 있는 나는, 누가 봐도 어디 떠날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 주신다면, 새 신분으로 정착하시는 데 저희 길드에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 부인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셨든 저희 길드의 도움이 의미 없진 않을 겁니다.”

“뭐, 어차피 별거 없는 얘기예요.”

애초에 솔직하게 말할 생각도 없었다. 정보길드의 뭘 믿고?


“그냥……. 지금처럼 있을 수 없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서요.”

 

***

에스텔이 있던 곳의 건너편 방.

요한이 싸늘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마도구에는 에스텔과 정보 길드 마스터의 대화 장면이 보였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사실 요한은 에스텔이 위장 신분증을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장 무슨 속셈이냐고 에스텔을 찾아가 묻고 싶었다.


‘왜 도망치려고 하지?’

누가 봐도 그녀의 의뢰는 도망을 위한 거였다. 에스텔이, 그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요한은 인내를 발휘하여 에스텔이 의뢰한 정보 길드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대신 에스텔이 자연스럽게 오게 하여 그녀의 속내를 알고자 했다.


“뭐, 어차피 별거 없는 얘기예요.”

길드마스터에게 질문받은 에스텔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지금처럼 있을 수 없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서요.”

그 순간, 요한은 번개에 맞은 것처럼 그녀가 새 신분증을 준비하려 한 이유를 눈치챘다.

모든 게 완벽하다.

그런데 그녀가 떠날 이유라면 딱 하나밖에 없다.


‘불치병, 잠자는 공주.’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잠자는 공주가 심해지면서, 그녀가 서서히 주변을 정리하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안 돼, 에스텔. 너는 내 곁에 있어야 해.’

에스텔에게는 시간이 없다.

결국 요한은 마지막까지 아껴두던 수단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둠에 물든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

결혼식 날.

새 신부 미르유가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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