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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리안드로의 후회 (70/182)


70화 리안드로의 후회
2022.08.02.



 
펠시스 후작 부인이 모욕적이라는 듯 부채를 든 손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더 기분 나쁘라고 열심히 장작을 넣어줬다.


“생각해 보니 펠시스 경께서는 성인이시니 후작 부인을 조롱한다고 하면 마음이 편찮으실 수 있겠어요.”

나는 막 깨달았다는 듯 눈을 내리떴다.


“그러니 부인께서 속상하시지 않게 부인이 아니라 아드님을 조롱하는 것으로 할게요. 그러면 이제 만족하시나요?”

“블란쳇 공작 부인! 지금 저와 말장난을 하자는 겁니까?”

“네? 장난이라니요. 그러시면 너무 섭섭해요.”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자부할 수 있다. 원래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더 큰 미움을 살 때는 내가 사랑받으려고 애쓸 때였지.’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던 나는 이제 그것을 미움받기 위한 특기로 사용하게 됐다.


“저는 부인께 진심이었는데요. 부인께는 지금 저와 나눴던 우정이 다 거짓이었나요?”

사람들은 미워하는 상대를 대할수록 쉽게 평정을 잃어버리니까.


“블란쳇 공작 부인. 이 이상 저를 조롱한다면 펠시스 후작가를 모욕한다는 것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주변 귀족들이 한층 더 격해진 후작 부인의 모습에 놀라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작 부인에게 주위의 반응을 신경 쓸 여력은 없어 보였다.


“앗, 어떤 부분이 모욕적이셨나요? 말씀해 주시면 제가 사과해 드릴게요.”

나는 증오가 가득한 후작 부인의 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드님이 불륜 지망자라는 것, 아니면 부인께서 그런 아들을 키우셨다는 것? 어떤 부분이 슬프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그 입 다물지 못해!”

펠시스 후작 부인의 푸른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손에 쥔 부채를 휘두를 듯이 움켜쥐었다.


“운 좋게 귀족들 사이에 낀 더러운 평민 따위가-!”

“……어머니.”

그 순간, 묵직한 저음이 우리 사이를 갈랐다.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펠시스 후작 부인의 얼굴이 소리가 들린 쪽을 보지 않고도 뻣뻣하게 굳었다.


“……리, 리안드로. 이건 말이다.”

리안드로는 검은 정장에 장미꽃다발까지 한 아름 들고 있는 상태였다. 누가 봐도 준비한 티가 확연했다.


‘아, 이미 아들까지 부르셨어?’

나는 한껏 가라앉은 두 모자를 보며 팔짱을 꼈다.

대강 후작 부인이 노린 게 어떤 상황이었는지 감이 잡혔다.

***

리안드로는 계속 아버지와 엇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기껏 후작 부인이 골라 놓은 선 자리조차 무례하게 불참하곤 했다.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야.’

하지만 펠시스 후작 부인은 쉽게 절망하지 않았다.

리안드로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엇나가지 않던 훌륭한 아들이었고, 귀족이라면 으레 그렇듯 한 번쯤 여자 문제를 앓고는 했으니까.


‘내가 어미로서 잘 이끌어주면 돼.’

다행히 펠시스 후작 부인은 리안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천박한 것을 혐오했다.


‘최근 블란쳇 공작 부인이 행동을 바꾼 것 같긴 하지만…….’

그래 봐야 멍청한 평민의 변심이다. 그만큼 빈약한 것도 없을 거다.


‘여차하면 내가 직접 움직여주면 될 터.’

펠시스 후작 부인은 오랫동안 사교계의 큰손으로 고고하게 군림해 왔다. 사교계 경험 하나 없는 멍청한 평민 하나 손봐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조금만 흔들어주면 제 천박한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겠지.’

리베르탄 시절부터 방종하게 굴던 여자니까. 이참에 아들을 정신 차리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멍청한 공작 부인에게 사교계의 질서를 똑똑히 심어주는 것도 좋을 터다.

그렇게 후작 부인은 블란쳇 공작 부인이 참석하기로 한 자선행사를 알아놨다.

주최자는 후작 부인과 친분이 깊은 사이였고, 그 자리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귀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안드로, 이 어미는 갑자기 우리 모자의 사이가 틀어진 것이 무척 슬프구나.

너도 이 어미처럼 옛날의 우리로 돌아가고 싶다면, 오늘 내가 참석하는 자선행사에 참석해서 이 어미를 기쁘게 해주렴.]

아무리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들 착한 리안드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움직여 줄 거다.


‘아주 완벽해.’

모든 게 펠시스 후작 부인의 계획대로였다.

다만, 후작 부인이 그동안 헐뜯었던 에스텔이 예상했던 대로의 상대가 아니었을 뿐이다. 리안드로가 생전 처음 보는 차가운 눈으로 후작 부인을 바라봤다.


‘왜 하필 지금 리안드로가 와서……!’

리안드로가 막 휘두를 듯이 들려 있었던 후작 부인의 팔을 붙잡았다.


“어머니, 정말 실망입니다.”

“아니다, 리안드로. 내 말을 들어보렴.”

자랑스러운 아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후작 부인의 안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애원하듯 아들에게 매달리며 호소했다.


“네가 잘못 본 것뿐이다. 어디 이 어미가 그럴 사람이니?”

진심으로 후작 부인은 사람들 앞에서 블란쳇 공작 부인에게 폭력을 휘두를 생각까진 없었다. 그저 아들 얘기에 정신이 나가 습관처럼 팔을 들었을 뿐이다.

리안드로는 입술을 꽉 깨물며 후작 부인에게 물었다.


“그러면 방금 제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블란쳇 공작 부인이 내 앞에서 너와 펠시스 후작가를 조롱했다. 가만히 넘기려고 해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수준이었어.”

후작 부인은 속으로 안심했다.


‘리안드로라면 나를 믿어줄 거다.’

최근 엇나가긴 했어도, 언제나 후작 부인의 말이면 다 잘 들어주던 아들이니까. 거기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사교계의 선배로서 가볍게 조언했을 뿐인데, 그걸 견디지 못해 너의 명예까지 더럽히려 들었다. 그것이 이 어미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겠니? 네가 어떤 애인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거늘.”

“…….”

“그래서 도저히 가만히 봐줄 수 없어 흥분했을 뿐이야. 네가 오해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었다.”

리안드로만을 보던 후작 부인이 에스텔을 힐끔 곁눈질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잖아?’

억울한 척 아무 말이든 던지려 들 줄 알았던 에스텔은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초연한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고귀해 보여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도 봐라. 블란쳇 공작 부인도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는 것을.”

“어머니의 말이 사실입니까?”

어쩐지 리안드로는 이상할 정도로 평소보다 더 격양된 상태였다.


“정말 방금 제 어머니의 말이 다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주위의 귀부인들이 후작 부인의 편을 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아요, 펠시스 경. 저희도 다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후작 부인께서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블란쳇 공작 부인의 행동이 선을 넘었습니다.”

쏟아지는 후작 부인의 옹호에 후작 부인 역시 기운을 되찾았다. 후작 부인이 아들의 뺨을 감싸며 애달프게 속삭였다.


“모두가 하는 얘기 잘 들었지? 네가 잠깐 오해한 거야. 아들, 이 어미의 눈 좀 보렴.”

하지만 그 말에 울컥한 리안드로는 어머니를 외면했다. 리안드로가 어머니를 떼어놓고 에스텔에게 다가갔다.


“제가 말씀을 여쭌 건 블란쳇 공작 부인입니다. 정말 제 어머니와 다른 귀부인들이 했던 말이 다 사실입니까?”

“그렇다잖아요?”

선선한 바람이 에스텔의 백금발을 흐트러뜨렸다. 유독 분홍색처럼 발그레한 백금발이 푸른 장미로 장식된 리본과 함께 살랑거렸다.

에스텔은 관조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서 다른 대답이 필요하신가요?”

“예. 필요합니다. 저한테는 몹시 중요합니다.”

주먹을 꽉 쥔 리안드로의 목소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 진실입니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선 많은 감정이 용솟음쳤다. 당연히 이번 일만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에스텔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리안드로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는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는걸요.”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 것인지. 저는 그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펠시스 후작 부인이 성큼성큼 다가와 아들의 팔을 붙잡았다.


“리안드로,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어머니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리안드로가 후작 부인을 돌아보며 비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동안 거짓말로 이 사람을 헐뜯지 않았습니까? 있지도 않은 사실로 모함하고, 피해자였던 사건에서조차 출신으로 비난했지요.”

“…….”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전 어머니를 믿으려 했습니다. 어머니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이 아니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리안드로의 목소리에는 날 선 비난이 가득했다. 후작 부인은 가슴이 칼로 헤집어진 것처럼 창백해졌다.


“너, 너 어떻게 이 어미한테.”

“그런데 이게 뭡니까? 괴롭히는 것처럼 어머니의 사람들을 잔뜩 불러다가, 폭력까지 휘두르려 하셨으면서…….”

리안드로가 까득, 턱에 힘을 주며 후작 부인의 친우들을 하나씩 노려봤다.


“저보고 그 말을 다 믿으라는 겁니까?”

귀부인들은 리안드로의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움찔 시선을 피했다. 그 광경이 리안드로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깊이 한숨을 내쉰 리안드로가 어머니의 어깨를 꽉 붙잡고 따지듯이 물었다.


“도대체 이 사람에게 왜 그러셨습니까? 또 얼마나 악독한 거짓말을 해댔던 겁니까? 뭐가 그렇게 밉다고 한 사람을 매장할 듯이…….”

“아, 아니야. 리안드로, 어미는 결코 그러지 않았어.”

후작 부인이 주저앉아 쓰러질 것처럼 아들에게 매달려 호소했다. 하지만 리안드로는 더 이상 후작 부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리안드로는 에스텔만 바라봤다.


“에스텔.”

그가 매달리는 후작 부인을 무시하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리안드로의 단정한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동안 당신의 얘기를 듣지 않고 무시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제 어머니가, 제 주변이, 모두 그렇게 잘못된 줄 몰랐습니다. 당신에게 함부로 말했던 것이 후회됩니다.”

리안드로의 품에 들려 있던 붉은 장미 꽃다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흐드러진 붉은 장미 위로 리안드로의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제가 너무 경솔하고, 어리석었습니다.”

“그래서요?”

“당신에게 사죄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동안 어리석게 놓친 진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에스텔은 무심한 표정으로 리안드로를 바라봤다. 에스텔과 마주친 심지 곧은 푸른 눈이 애절하게 떨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거짓이었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가요?”

에스텔이 픽 가볍게 웃었다.


“딱히 중요했던 적도 없잖아요?”

“이제는, 이제는. 중요합니다.”

리안드로가 절박하게 에스텔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야 리안드로는 그동안의 혼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는 악녀인 에스텔에게 빠져드는 자신이, 첫사랑이던 예스텔라로 위장하려던 가증스러운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옳지 않으니까.


‘하지만 에스텔은 악녀가 아니었다.’

고작 일부만 본 것이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아마 리안드로가 놓쳐버린 진실은 더 많을 것이다.


‘이제야 진짜 그녀를 알게 되었다.’

리안드로가 절절하게 후회하는 심정으로 에스텔에게 고했다.


“제가 틀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손을 잡지 못했던 걸 계속 후회하던 이유를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요?”

“예, 조금 늦었다는 걸 압니다. 제 잘못이라는 걸 알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작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후회되지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을 붙잡고 싶습니다.”

가증스럽게 보였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이제는 가엾고 안쓰러워졌다. 나풀거리는 길고 흰 속눈썹이 리안드로의 마음을 찌르르 울렸다.

리안드로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두근거리는 제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그러니 진짜 당신에 대해 얘기해 주면 우리는 누구보다…….”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요?”

그 순간, 리안드로는 이상하게 가까이 있는 에스텔이 몹시 멀어 보였다. 이미 지나가 버린 봄의 자취처럼,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에스텔은 바닥에 흩어진 리안드로의 장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감상하듯이 장미를 바라보며 키득 실소했다.


“난 당신이 생각하던 대로의 여자예요.”

“역시 그렇다면 당신은.”

리안드로의 푸른 눈에 희망과 기대로 빛났다.

그 순간, 에스텔이 장미를 버리듯이 떨어뜨렸다. 에스텔의 구두가 붉은 장미를 우아하게 짓밟았다.


 


“악녀요.”

더러워지는 장미 꽃잎을 바라본 리안드로의 눈빛이 공허해졌다. 그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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