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필요하다면 몰살시켜서라도
(6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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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필요하다면 몰살시켜서라도
2022.07.26.
에스텔의 눈가가 붉게 물들며 이슬 같은 눈물이 어렸다.
“나, 난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에스텔은 한 떨기 꽃처럼 가련하게 슬퍼했다. 다이아나는 물론이고, 이사벨라 왕비, 헤센마저도 가냘파 보이는 에스텔의 모습에 탄식했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금방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너무나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미르유는 속으로 이를 아득 갈았다.
‘함정이었어!’
그래서 일부러 자신이 오해하도록 상황을 설정해 둔 게 틀림없었다.
‘저 가증스러운 계집애!’
미르유의 속에 분노가 차올랐다. 당장 에스텔의 실체를 밝혀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무슨 행동을 해도 미르유 자신만 더 나쁘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건 에스텔이 노리던 바였다.
‘내가 왜 멍청하게 널 티 나게 깎아내렸겠니?’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이렇게 많은데.
***
다이아나 공주와 친분을 가지게 된 건 우연이었다.
다이아나는 나한테 잘못한 게 많았던 만큼, 나에게 더 빠르게 호감을 가졌다. 나 역시 기분 나쁜 일이 있기는 했어도, 솔직한 호감을 드러내는 다이아나 공주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난 다이아나와 미르유를 완전히 떼어놓고 볼 수 없었다.
‘미르유가 알면 난리가 나겠지.’
미르유는 내가 로이엄 공주인 다이아나와 친해졌다는 사실만으로 미치고 펄쩍 뛸 것이다. 그리고 내 의도를 불순하게 오해할 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난 그 기회를 조금 더 영리하게 사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를 좋아하던 다이아나 역시 계속해서 나와 미르유 사이에 있던 일의 진실을 알고자 했다.
“그런데 에스텔, 미르유 언니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물어봐도 돼요?”
그때마다 나는 빙빙 말을 돌렸다.
“정말요? 미르유가 다이아나에게 그렇게 말했나요?”
“왜요? 에스텔이 알던 것과 다른 거라도 있어요?”
“음, 아니에요. 미르유는 다이아나와 곧 가족이 될 사람이잖아요.”
다이아나가 더 큰 의문을 가지도록. 그리고 이어서 미르유를 칭찬했다. 조금 더 수상할 수 있게.
“지금은 사이가 멀어지긴 했어도, 미르유는 좋은 아이예요. 다이아나한테 그렇게 잘해줬다면서요.”
“하지만 지금은 그게 진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한 번 나쁜 일이 있었다 해서 모든 일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어요.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요.”
그렇게 의심이 계속 쌓이던 다이아나가 로이엄 저택에 날 초대했다.
“새언니가 쥬티 남작저로 간 날이니 에스텔이 더 편하게 올 수 있을 거예요.”
기다리던 때가 왔다.
내 계획과 달리 미르유가 갑작스럽게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서 일이 더 잘 풀렸다. 불안했던 미르유가 멍청한 행동만 골라서 해줬으니까.
“어, 어머님. 헤센, 이건 함정이에요.”
그래서 난 미르유를 더 확실한 쓰레기로 만들어주기로 했다.
“저 애는 일부러 제가 말실수를 하도록 유도한 거라고요!”
“……흑.”
나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한 것처럼 안쓰럽게 눈물을 흘렸다. 다이아나가 나를 감싸며 소리쳤다.
“새언니,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통할 것 같아?”
“다이아나, 넌 에스텔한테 속아서 날 오해하고 있어. 내 얘기부터 들어봐.”
미르유가 억울한 목소리로 다이아나를 달래려 했다.
“오해?”
하지만 그 말은 다이아나를 더 분노케 할 뿐이었다.
“여기에 무슨 오해가 있을 수 있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증인인데!”
다이아나가 거침없이 빈정거렸다.
“새언니 입으로 전엔 사고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선 에스텔의 자작극? 이제는 새언니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 진짜가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네요.”
“다이아나.”
미르유가 애절하게 다이아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우리 누구보다 잘 지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틀어지게 된 게, 정말 우연 같아요?”
“우연이 아니면?”
내 어깨를 감싼 다이아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이아나가 턱에 힘을 주며 이를 빠득 갈았다.
“이게 다 에스텔 책임이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옛날부터 새언니를 질투해 왔기 때문에?”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날 멍청하게 봐도 정도가 있지.”
다이아나의 주황색 눈동자에 경멸이 서렸다.
주위의 분위기 역시 미르유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미르유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오열하며 헤센을 바라보려 할 때였다.
그때 바로 내가 나섰다.
“미안해, 미르유!”
나는 아주 슬픈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네 말대로 다 때문이야. 나만 가만히 있었으면 너는 무사히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
막 오열하려 하던 미르유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다이아나, 헤센 왕세자님, 그리고 로이엄 왕비님.”
적대적인 시선으로 미르유를 보던 로이엄 왕족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긴 속눈썹을 아련하게 내렸다. 그리고 애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미르유를 너무 나쁘게 보지 말아주세요. 이건 미르유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헤센 왕세자가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건, 다 제가 미르유의 허락 없이 다이아나와 친해졌기 때문이에요. 제가 다이아나와 친해지지만 않았더라면 미르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당연히 다이아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에스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와 친해져서라니요.”
“여러분 모두 눈치채셨겠지만, 미르유는 제가 로이엄 왕가와 친분을 맺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제 나쁜 평판을 오해할까 두렵다는 이유에서였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저는 그런 미르유의 마음을 무시하고 다이아나와 친해지고 말았어요. 부디 제 실수로 분노하고 말았던 미르유를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나와 눈이 마주친 다이아나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에, 에스텔. 그건 정말 말도 안 돼요. 왜 당신이…….”
“미안해요, 다이아나. 제 평판과 상관없이 솔직하게 다가와 주는 당신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그만. 미르유의 부탁을 어기고 말았어요.”
다이아나는 울컥하는 얼굴로 제 입을 감쌌다. 차마 말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헤센 왕세자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사태를 조용히 관망하고 있던 이사벨라 왕비가 입을 열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 그건 공작 부인의 탓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경솔히 굴지 않았다면 미르유가 로이엄 왕가에 실수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나는 일부러 ‘경솔히 굴다’는 표현을 쓰며 미르유가 저지른 ‘실수’를 왕비에게 되새겨줬다.
붙잡은 미르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르유는 뒤늦게 파랗게 질린 입술로 말을 더듬었다.
“어머님, 이건, 그게 아니라.”
하지만 그 말은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겠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지금 미르유는 내 말이 거짓이라 우기지 못한다. 이미 거짓말하다 걸렸으니까. 그렇다고 착한 척을 하자니,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모두 진짜가 되어버린다.
‘짜증 나서 미칠 것 같지?’
울먹거리던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미르유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르유. 내가 잘못했어. 하나뿐인 친구인 너를 더 배려했어야 했는데…….”
그리고 흐느끼는 것처럼 미르유의 어깨에 내 얼굴을 묻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이아나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에스텔, 그건 에스텔 잘못이 아니에요. 오히려-”
헤센이 격양된 다이아나를 불러세웠다.
“다이아나. 그만해.”
“그러는 오빠야말로 뭐라도 좀 해! 오빠가 사랑한다고 데려온 여자잖아!”
“그건…….”
남매 싸움이 불같이 커졌다. 미르유가 작은 목소리로 이를 갈며 물었다.
“너, 속셈이 뭐야?”
“속셈이라니. 오해야.”
나는 아주 가증스럽게 눈썹을 내리뜨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그리고 아주 작게 풉, 하고 웃어줬다.
미르유에게만 들리게, 지금 미르유의 신세를 비웃듯이.
‘긴 독설보다 짧은 웃음 하나가 더 기분 나쁠 때가 있거든.’
고개를 슬쩍 들자, 미르유의 안면 근육이 주체하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렸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아주 보람찬 기분이 들었다.
‘그래, 더 짜증 내 봐.’
나는 더 가증스럽게 미르유를 걱정해 줬다.
“왜 그래, 미르유. 내 사과가 충분하지 않다면-”
미르유는 순간적으로 불쑥 화를 참지 못한 것처럼 내 몸을 뿌리쳤다. 나는 미르유의 손길이 굉장히 거칠었던 것처럼 밀려났다.
“아앗!”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아주 가련하게.
서로 싸우고 있던 헤센과 다이아나가 놀라서 우리를 바라봤다. 다이아나가 곧장 내게 달려왔다.
“에스텔! 괜찮아요?”
“아, 나는 괜찮아요. 그냥 놀랐을 뿐…….”
“새언니가 일부러 당신한테 폭력을 쓴 거잖아요!”
다이아나는 서슬 퍼런 눈길로 미르유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새언니! 이제는 언니를 감싸주려는 사람한테 화풀이로 폭력까지 사용해? 도대체 염치라는 게 있긴 한 거야?”
“아니. 나는-”
“조용.”
이사벨라 왕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볼 것도 없다. 나는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
미르유가 이사벨라 왕비에게 무릎으로 기어가듯이 다가갔지만, 이사벨라 왕비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늘부터 쥬티 남작가와 로이엄 왕국 사이에 있었던 모든 약속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어느 쪽에 책임이 있는지는, 너도 잘 알겠지.”
“어, 어머님!”
“그렇게 부르지 마라. 누가 네 어머니라고 그러느냐?”
미르유의 눈동자에 절망이 서렸다.
근처의 헤센도, 막 미르유에게 화내며 나를 보살피던 다이아나조차도 누구보다 빠른 왕비의 결정에 놀라 굳어 있었다.
짝, 이사벨라 왕비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로이엄 왕국과 전혀 관계없는 쥬티 영애를 바깥까지 모셔다드려라. 영애의 물건이다 싶은 물건은 오늘 안으로 남작저로 모두 보내도록.”
나는 다이아나의 어깨에 기대어 더 이상 매달리지도 못하는 미르유를 바라봤다.
‘국왕 대리인 이사벨라가 결정한 이상, 결혼은 못 하겠지.’
지금 미르유의 쥬티 남작가는 로이엄 왕가의 지원으로 현재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미르유가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사용하던 자금이나 영향력 역시 로이엄 왕국에서 나오던 것이었다.
그런데 좋게 파혼한 것도 아니고, 일방적인 그녀의 잘못으로 파혼당하기까지 했으니.
‘잘 가, 미르유.’
그녀는 높이 올랐던 만큼 추락하게 될 거다.
***
요한은 우아하게 검은 소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문서들을 훑어보던 요한이 검은 복면의 사내에게 물었다.
“잠자는 공주에 대한 조사는?”
“잠자는 공주에 걸린 환자들을 조사하던 끝에 이상한 전설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
“잠자는 공주가 실은 신이 인간에게 분노하여 내린 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정리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벌이라고?”
요한이 무표정하게 턱을 괴었다.
‘그 전설이 사실일까?’
한낱 전설이라고 무시하기엔, 요한 본인 역시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고 알려진 악마와 거래하여 흑마법사가 된 사람이었다.
대개의 신화는 생각보다 현실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의사들을 끌어모아 진찰시키고, 잠자는 공주에 대해 연구하게 시켜도 진전이 없던 이유가 이해가 갔다.
애초부터 병이 아니었으니까.
그 순간 요한은 악마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그 쿠키를 줘.’
설마 에스텔이 앓고 있는 병이, 악마와도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점점 생각의 가짓수를 늘렸다.
‘그걸 다 확인해 보기엔 시간이 없어.’
에스텔의 수명은 길어봐야 1년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요한이 복면의 사내에게 물었다.
“에스텔의 소문을 퍼뜨린 자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지?”
“지금 길드 본부에 내려가시면 결과를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알았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일어서던 순간이었다.
“참, 주군.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뭐지?”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다른 정보 길드를 방문하셨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눈매가 단번에 사나워졌다.
“무엇 때문에?”
“그, 그것까지는…….”
짚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이엄 왕국을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던 그날, 에스텔은 요한에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게 해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요한이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나 혼자 힘으로 해보고 싶어서 그래. 안 될 것 같으면 요한한테 부탁할게.’
그때 요한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에스텔은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환자였고,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역시 어려우려나?’
특히 애교스럽게 휘어지는 그 눈빛을 보고 있으니 사고가 정지됐다.
그래서 요한은 흐뭇하게 눈웃음 지으며 모든 것을 허락해 주었다. 어차피 로이엄 왕국 따위, 무슨 짓을 해도 에스텔을 해칠 수 없을 테니까.
‘……저번에 했던 그 일 때문에 움직인 것일 뿐이야.’
하지만 기이한 불안감이 자꾸만 치밀어올랐다.
“당장 알아와. 내 여자가 뭘 부탁했는지, 뭘 하려고 했는지, 전부.”
요한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길드원에게 협박했다.
“필요하다면 그 길드를 몰살시켜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