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저 여자 말은 믿으시면 안 돼요! (67/182)


67화 저 여자 말은 믿으시면 안 돼요!
2022.07.22.



 
다이아나는 내 앞이라 민망해했지만, 그래도 어색하게 씨를 닦아내며 블루나를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블루나가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내게 부비적거렸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째액, 짹.

솔직히 나는 그런 블루나가 매우 귀여웠다. 물론 주인인 다이아나의 입장은 확실히 달랐던 모양이다.


“가까이 오는 사람은 다 쪼아버리던 놈이.”

“정말요?”

‘이렇게 애교 많고 얌전한데.’

블루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이아나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블루나를 노려봤다.


“새끼 때부터 저 녀석을 돌봐왔지만, 사람을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오죽하면 블루나를 돌보다 제 손이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다이아나는 블루나에게 쪼인 제 손을 보여줬다. 확실히 심했다.


“많이 아프셨겠어요.”

“사실 별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 녀석을 어찌 데려가야 할지…….”

다이아나의 손이 다가올 때마다 블루나는 총총 뛰어 그 손을 피했다. 하필 내 근처에서 계속 있다 보니 거칠게 손을 뻗을 수도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평소에는 블루나를 어떻게 데려가나요?”

“보통은 새장에 넣어서 갑니다. 녀석이 새장 문을 부순 탓에 근처에서 새장을 구해 로이엄 저택에 돌아가야 하지만…….”

“멀지만 않으면 제가 로이엄 저택까지 같이 가드릴게요. 그러면 일이 해결될까요?”

그러자 다이아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혹시 로이엄 저택이 많이 먼가요?”

“그렇다고 많이 가깝지는 않습니다. 30분 정도는 걸어가야 합니다.”

내가 다이아나와 좋게 끝난 사이도 아닌지라, 이렇게까지 해주는 게 이상해 보이겠지. 하지만 어차피 그 일은 미르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다이아나는 미르유에게 휘둘렸을 뿐이다.


‘그런다고 다이아나의 잘못이 사라지진 않지만.’

“그 정도면 가깝네요. 마침 저도 블루나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거든요. 그렇지, 블루나?”

블루나는 쪼르릉 하는 신기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지만…….”

“대신 로이엄 저택에서 마차를 빌려서 대공저까지 가야 할 것 같은데,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지요?”

“그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어색하게 말하던 다이아나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흠칫 고개를 굳었다.


“아니. 제가 말하려던 건…….”

“걱정 말아요, 이해했어요.”

내가 가볍게 웃자, 다이아나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볼수록 나쁘지 않은 사람이네.’

솔직히 다이아나는 한때 나를 크게 몰아붙였지만, 그렇게 밉지 않았다.

로이엄 왕국은 저번 일의 사과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그중에는 다이아나의 사재인 영지와 재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힘들게 얻었던 기사 작위마저 잃었는데.’

다이아나에게선 나를 향한 악의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이아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지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어쩌면 이런 점 때문에 다이아나의 잦은 실수에도 사교계 친구가 많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기적일 수 있지만, 머리를 굴려 상황을 계산했다. 우연으로 생긴 이 일을 단순히 도와주는 걸 넘어서, 다이아나와 친분을 가져도 되는지.


‘그녀는 로이엄의 유일한 공주지. 평판이 깎였어도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 친해지면 좋겠지.’

나는 애매한 사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 애매한 호감은 말도 안 되는 적의로 돌변해, 나를 공격하곤 했으니까.


‘그럴 바엔 확실하게 적의를 사두는 게 낫지.’

애초에 기대도 안 하게 해서, 피곤할 일이 없으니까. 물론 호감을 사둔다고 해서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었다.


‘아가씨인 척하지만, 당신도 결국 나 같은 평민이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처음에는 나를 좋아하는 척해도, 결국 다들 나를 미워하곤 했다. 사실 이쯤 되면 문제는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호감은 믿을 수 없어. 호감은 너무 쉽게 변해. 멋대로 기대하다가 적의로 바뀌잖아. 하지만…….’

마음속 저울추가 흔들거리며 움직였다.

리베르탄에서 나온 지금은 적의로 바뀌지 않는 일들이 조금씩 벌어지곤 했다.


“그러면 잠시 쪽지 한 장만 남길게요. 제 시녀가 저를 데리러 오고 있거든요. 갑자기 사라지면 다들 걱정해서요.”

다이아나의 주황색 눈동자에 묘한 호감이 서렸다. 나는 그 눈동자를 보며 짧게 고민했다.


‘저 호감은 어떻게 되려나?’

 

***

다이아나는 에스텔을 힐끔 바라봤다.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지?’

항상 마차를 타고 다니는 귀부인들에게 30분 거리는 꽤 먼 거리다. 심지어 다이아나는 에스텔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야 도와줘서 다행이긴 한데-’

블루나는 데펩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선물한 새다. 잃어버렸을 때 외교 문제가 번질 수 있기에, 에스텔의 도움이 감사하기는 했다.


“걷는 게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오랜만에 주변 경치를 구경하면서 걸으니 좋은걸요. 예쁜 블루나랑도 같이 있잖아요?”

에스텔이 배시시 웃었다.

따스한 햇볕을 받은 백금발에선 몽글몽글한 분홍빛이 올라왔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까지 분홍빛이 번진 에스텔은 몹시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에스텔은…… 자신이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에 상처가 많았어요. 그래서 귀족인 제가 뭘 해도 마음이 아팠나 봐요. 친구로서 더 배려했어야 했는데…….’


‘이 흉터는, 그 애가. 하지만 다이아나. 실수로 벌어진 사고였어요! 에스텔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줘요.’

가족이 될 미르유를 아끼는 마음에, 다이아나는 에스텔을 더 미워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너무 미르유의 말만 믿었던 것 같았다.

어느덧 로이엄 저택이 보였다.

다이아나는 도착하기 직전, 눈을 질끈 감고 계속 고민하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 죄송합니다.”

“네?”

“살롱에서의 일 말입니다. 제가 처음 부인을 뵙자마자 큰 무례를 저질렀었지요. 부인의 얘기는 듣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했어요.”

에스텔이 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았다.


“조금 늦은 사과네요.”

“죄송합니다.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다이아나는 힘들었다. 새언니라고 마냥 좋아하던 미르유의 추악한 실체를 알 게 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부인께서 제게 해주셨던 말을 더 지켜보려 했습니다.”

“…….”

“부인은 미르유 언니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나요?”

그날 이후 다이아나는 미르유의 이상한 점을 계속 발견하였다.


‘미르유 아가씨께선 요새 신경이 날카로우세요. 하녀들에게 손찌검을 하시기도 하고…….’


‘항상 침대를 정리할 때마다 예민하게 구세요. 확실하진 않지만, 뭔가를 숨겨두신 것처럼 반응하십니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알고 있던 게 다 틀린 건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이아나는 염치없게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가 이상한 말을 한 건 알아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에스텔이 다이아나의 손을 마주 잡아줬다.


“부인께 제가 할 얘기는 아니었던 것 같네요. 상담할 곳이 없어서 또 헛소리를…….”

에스텔은 다이아나의 복잡한 속을 이해하기라도 하듯 다이아나의 손을 토닥여줬다. 그제야 다이아나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숙였던 다이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 이제 제 얼굴을 봐주네요.”

“그러니까…….”

“염치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전 괜찮으니까.”

마주친 에스텔은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제가 답을 줄 수는 없지만, 힘들면 울어도 돼요. 힘들면 어쩔 수 없잖아요.”

다이아나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한없이 사랑스럽고 선량한 이 사람에게.

***

미르유의 결혼식이 목전까지 다가왔다.

미르유는 쥬티 남작저로 돌아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은 미르유의 결혼식을 축하해 줬다.

곧 결혼식을 올릴 새신부답게 미르유가 환하게 웃었다.


“다들 축하해 줘서 고마워. 나도 아직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그때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미르유, 그때 블란쳇 공작 부인과 있었던 일은 어떻게 된 거야?”

“맞아. 네게 무슨 일이 또 생겼나 걱정했잖아.”

미르유는 들고 있던 찻잔을 꽉 쥐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니었어.”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울면서 나갔다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때 미르유는 에스텔이 자작극을 벌인 거라 할 수 없었다. 그 연회는 에스텔에게 사죄하기 위해서 열린 연회였으니까.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다.


‘에스텔이 속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에요, 실수로 와인을 흘렸거든요.’


‘와인병이 깨져 있던 건 뭡니까?’


‘에스텔이 실수로 그만…… 출신 때문인지, 에스텔은 종종 그런 실수를 해요. 너무 민망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전처럼 반응해 주지 않았다. 불신하는 기색도 보였다.

이사벨라 왕비는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가, 정녕 네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느냐?’


‘정말이에요. 어머님.’


‘설령 그렇다 해도 아가 네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됐다. 그분은 우리가 어렵게 모셔온 손님이니까. 어제 파티에서만큼은 사고가 있어서는 안 됐는데…….’

이사벨라 왕비는 미르유에게 경고했다.


‘아무리 헤센이 너를 사랑한다 해도 나도 네게 더 이상 기회를 줄 수 없다.’

이렇게 되기를 노리고, 착한 척 가증을 떨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처음엔 당황했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애도 리베르탄에서 사랑받은 척하고 있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처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겠지.


‘나도 똑같이 협박하면 돼. 그래 봐야 나보다 못난 애니까.’

에스텔은 기본적으로 미르유보다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고 착했다. 다시 주도권을 찾는 척하면 금세 휘둘릴 거다.

물론 그 전에 로이엄 왕가에 미리 거짓말해둬야 했다.


‘그 애가 옛날부터 나를 시기해서 나쁜 짓을 벌였다고 고백하자. 저번 일도 날 곤란하게 하기 위한 자작극이었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 에스텔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다. 여태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얘들아. 너무 미안해. 오늘 티 파티, 아무래도 여기서 끝내야겠어.”

적당히 파티를 멈춘 미르유는 바로 로이엄 저택으로 움직였다. 최대한 빨리 티 파티를 중단했기에 만찬 전에 로이엄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모인 자리니 시기가 딱 좋아.’

그때 미르유는 꽃을 꺾어서 들어가는 헤센을 발견했다.


“헤센!”

헤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오늘 쥬티 남작저에서 자고 오는 것 아니었습니까?”

“네. 하지만 모두에게 꼭 전할 말이 있어서요.”

“전할 말 말입니까?”

“네. 어쩌면 모두가 충격받을 수 있지만, 그래도 결혼 전에 내 아픔을 털어놓으려고요.”

미르유가 눈썹을 내리뜨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헤센을 바라봤다.

그런데 헤센이 애매한 표정으로 미르유에게 말했다.


“다음 기회에 하는 건 어떻습니까?”

“네? 어째서…….”

“오늘 만찬엔 손님이 와 있어서 말입니다.”

미르유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손님이요?”

“미르유가 보면 아주 깜짝 놀랄 손님일 겁니다.”

헤센이 반가운 얼굴로 미르유를 데려갔다.


‘아니겠지.’

만찬장 쪽에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갔다.

호화스러운 로이엄 저택의 만찬장.

중앙에 앉은 이사벨라 왕비와 다이아나 공주. 그리고-


“어머, 미르유!”

에스텔.


 


‘쟤가 왜 여기에 있지? 그것도 나만 빼놓고.’

이사벨라 왕비와 다이아나 공주가 자신을 바라봤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인사하지 않고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나 없는 사이에 벌써…….!’

이사벨라 왕비가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 네게 조금 실망스럽구나.”

“네?”

“다 들었다. 어찌 그런-”

미르유는 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어머님, 다 거짓말이에요! 저 여자 말은 믿으시면 안 돼요!”

분위기가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서 미르유는 마음이 더 급해졌다.


“에스텔은 전부터 저를 계속 질투하고 미워해 왔어요. 이번에도 그래서예요. 제 결혼식을 깨려고 자작극을 벌였다고요. 제가 로이엄 왕국과 연을 맺는 게 싫어서!”

“새언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는 억울해요! 어머님, 저를 계속 봐오셨잖아요. 제 출신엔 아무 문제 없어요. 저런 거짓말에 휘둘리시면 안 돼요.”

다이아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르유에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 거짓말이 뭔데! 갑자기 들어와선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미르유의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하고 있던 건데?’

“지금 우리는 언니가 사죄 연회에서 부인과의 오해를 잘 해결하지 못한 일을 얘기하고 있었어. 공작 부인께서는 언니의 미흡한 대처를 계속 감싸주고 계셨는데.”

다이아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미르유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자작극이니, 출신에 거짓말…….”

“아, 아니. 나는-”

“도대체 뭔 짓을 저질렀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미워했다는 소리는 또 뭐고. 나한테는 서로 친하다고 했잖아. 그동안 했던 얘기는 다 거짓말이었어?”

미르유가 멍하니 분노한 다이아나와 딱딱하게 굳은 이사벨라 왕비를 보다가 에스텔과 시선이 마주쳤다.


“네가 날 그렇게 오해하는 줄 몰랐어. 그때 다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에스텔이 슬픈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실은 날 미워했던 거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