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새 신분이 필요해 (66/182)


66화 새 신분이 필요해
2022.07.19.



 
베티는 돌아온 에스텔을 보고 무척 놀랐다.

로이엄 왕국에 사죄를 받으러 갔던 마님의 드레스가 엉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쁜 얼굴은 운 것처럼 눈가가 부어 있기까지 했다.


“마님, 거기서 또 마님께 이상한 짓거리를 했나요?”

“아. 참.”

에스텔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거 내가 부은 거야.”

“……네?”

“일부러, 미르유가 흥분해서 나한테 부은 것처럼 뒤집어씌우려고.”

잠시 에스텔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베티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람들이 마님의 말을 믿어주었나요?”

그곳은 로이엄 왕국에서 아끼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다.

대부분 미르유를 알고 있고, 미르유를 좋게 생각하던 사람들이니만큼, 에스텔의 음해를 믿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글쎄, 알아서 하라고 나와서 모르겠네.”

“예?! 그러면 그 여자가 마님의 자작극이라고 변명할 수 있잖아요!”

베티가 드레스를 갈아입혀 주던 손도 멈추고 경악했다.


“그러다 저번 일처럼 마님이 한 게 아니냐고 오해를 사게 되면…….”

“새삼 억울해할 것 없잖아. 최소한 이번은 자작극이 맞으니까 사실이긴 하고.”

에스텔은 남의 이야기를 하듯 건조하게 말했다.


“설령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미르유의 말을 믿고 날 더 미워한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어차피 날 미워하던 사람들이고, 이번 일 하나 추가된다고 해서 내 평판은 달라질 것도 없거든.”

“하지만 그래도…….”

“하지만 미르유는 다르겠지. 그 앤 나한테 시달리던 피해자였잖아?”

결투에 패배하는 것으로 평판이 크게 깎이긴 했지만, 그동안 미르유가 사교계에 쌓아온 시간은 아주 길다.


‘한 번에 그걸 다 없애버리려고 하면 반발이 오겠지.’

그러니 다른 수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날 본 광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던 상황과 매우 달랐을 거야.”

사람들은 시각에 약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빠짐없이 악녀라던 에스텔이 미르유에게 당한 것처럼 와인을 뒤집어쓴 채 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때 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더 강렬해질 것이다.


“그래도 그 연회엔 대부분 미르유랑 친하던 사람들일 텐데, 잘 먹혔을까요?”

“최소한 이상해 보이지 않았을까?”

베티가 막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은 로이엄 왕국의 사죄도 바로 받아주고, 미르유와 친한 친구인 척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자작극을 벌였다고 하면 단번에 믿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 의심이면 충분해.”

조그마한 의심 하나가 쌓여서 미르유를 더 힘들게 할 테니까.


“그래도 마님의 방식은 너무 오래 걸려요.”

베티가 분이 안 풀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난 화가 안 풀려.’

처음 베티가 미르유에 대해 들었을 때 말도 안 될 정도로 분노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여자가 있을 수 있지?’

베티는 인간의 악의에 무척 익숙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그런 악의에 충격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에스텔이 겪어왔던 일들은 베티의 상상을 초월하곤 했다.

물론 미르유라는 여자 때문에 과거에 큰 아픔을 겪어서인지, 에스텔은 그때 일을 다소 두루뭉술하게 언급하곤 했다.


‘미르유는 리베르탄에서 내가 겪었던 일을 자세히 캐묻고, 그게 다 내 잘못이라 했어. 내가 배가 불러서 힘들어하는 거라고.’


‘……그 여자 미친 거 아니에요?’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몰라. 최소한 환경적으로는 풍족했잖아?’

흉터가 어쩌다 생겼는지 아직도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던 것처럼.


‘나도 이제야 알게 됐어. 나에 대해 밖에 얘기하고 다니던 대표적인 사람이 그 애였다는걸.’


‘마님을 만나던 중에도 그랬다는 거지요?’


‘그랬겠지? 시기를 보면 친구처럼 지내고 있을 때니까.’

에스텔이 없는, 그리고 나가서 들을 수도 없는 처지라는 걸 알면서 괴롭힘당한 피해자처럼 행세했다는 점에서 미르유는 더 악질적이었다.


‘그, 그 여자도 마님의 상처를 봤다고요?’


‘응. 그땐 친구라서 생각하고 있었거든. 사실 일부러 말해주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 애가 억지로 본 거에 가깝기는 해. 그때- 그렇게 징그럽다고 했으면서. 정작 남들한테 자기 상처를 자랑하듯 얘기하던 건 좀 신기하긴 하네.’

사교계에 퍼진 소문을 알아본 베티는 반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 흉터는 마님의 흉터를 보고 따라 한 거야.’

심지어 그 흉터로 동정을 사고 다닌 행적으로 보아, 심증은 확증으로 굳어졌다.


‘동정심 사기에 좋다고 생각해서 따라 한 거겠지?’

흉터를 목격했던 사람 중 하나로서, 베티는 미르유가 더욱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최소한의 인간성도 없는 건가?’

그딴 인간이 낸 소문에 휘둘려 처음 마님을 오해했다는 사실에 더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생각해도 이렇게 아픈데, 마님은 정말 괜찮으신 걸까?’

“마님. 그 여자 가만두지 않으실 거죠? 아니면 제가 찾아가서라도 흉터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오겠어요.”

“아, 그래서 말인데.”

드레스를 다 갈아입은 에스텔이 베티에게 물었다.


“저번에 물어봤던 정보길드에 대해서는 알아봤어?”

베티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에리히가 준비도 다 해놔서, 지금 바로 정보길드에 갈 수 있어요. 준비할까요?”

“요한 몰래 다녀올 수 있는 것 맞지?”

“그건 당연하죠. 주인님께서 저녁에 오실 테니, 마님의 외출을 파악하실 순 없을 거예요.”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가 요한이 준 반지로 향했다.


‘비밀리에 계속 움직이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에스텔은 요한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움직이기가 겁났다. 애초에 요한도 자신에게 모든 것을 다 얘기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금은 미르유 일에 집중하자.’

완벽한 무대를 위해, 얻어야 할 조각이 있었다.

***

펠시스 후작 부인은 며칠 만에 겨우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후작을 설득해 몇 번이고 꺼내오고 싶었지만, 그녀는 두 부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리안드로, 고생 많았다. 아버지께서도 널 미워해서 그러신 건 아니란다. 너도 잘 알지?”

“아버지께선 저를 바른길로 인도하고 싶으셨던 것뿐이겠지요.”

“네가 알아줘서 다행이다. 역시 착한 우리 아들이야.”

후작 부인의 회색 눈동자가 리안드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대답하는 건 평소랑 똑같은데.’

후작 부인은 리안드로가 자신이 알던 아들에서 벗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로서의 촉이었다.


“네 아버지는 네가 황궁 기사단장 자리에서 쫓겨난 걸 큰 흠이라 여기는 것 같지만, 난 생각이 달라.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을 겪기도 하는 거지.”

“아닙니다. 제 잘못으로 가문의 명예를 망가뜨린 일 아닙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래도. 마음이 복잡하면 사고도 칠 수 있는 게지. 네 나이에 아무 문제 안 일으키는 사람도 없단다.”

후작 부인이 리안드로의 손을 다정하게 톡톡 두드려줬다.


“아무튼 네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 이 어미가 착한 아가씨를 몇 봐두었단다. 이번 기회에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우리.”

그 순간 리안드로의 푸른 눈에 묘한 갈증이 서렸다. 리안드로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제게 다시 약혼을 하라는 것입니까?”

“그래,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당연히 상대를 찾아야지. 솔직히 이젠 약혼이 아니라 바로 결혼 상대를 찾아도 될 지경이야. 그 천박한 가문 때문에…….”

리안드로의 첫 번째 약혼.

리베르탄 공작가의 외동딸과 맺었던 그 약혼만 생각하면, 후작 부인은 아주 치가 떨렸다.

가문끼리의 결합이라 어쩔 수 없이 승낙하긴 했어도, 어찌 평민 출신 입양아를 제 귀한 아들에게 들이댄단 말인가.

여자 문제에선 한없이 순진한 아들이 상처받아 아무 여자도 못 만나는 데엔 다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이제 너도 사라진 가문 따윈 잊어버리고, 새로 좋은 인연을 찾아야지.”

“그보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그동안 사교계에서 듣고 오셨던 이야기 말입니다.”

리안드로가 후작 부인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 이야기, 전부 사실이긴 한 겁니까?”

후작 부인은 묘하게 질책 어린 목소리에 움찔했다. 그러다 불안감에 날카롭게 되물었다.


“설마 지금 그 여자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니?”

“…….”

“맞구나. 아직 그 여자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

에스텔 리베르탄.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되어 또다시 화두에 오른 여자.


“이래서 이 어미가 네게 새 인연을 찾아주려 했던 거야! 네가 자꾸 이런 식으로 그 여자에게 집착하니까!”

“어머니.”

“억지 결투로 널 농락시키고서 지하실에 갇혀 있게 만든 그 여자가 뭐라고. 그 여자한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저는 그 얘기에 거짓이 섞여 있냐고 물었습니다.”

분노를 참지 못한 후작 부인이 리안드로를 노려봤다.


“나도 모른다! 거기에 거짓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 게 뭐니. 내 자식 얘기도 아닌데.”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그러시면 안 되셨습니다.”

“너야말로 이 어미에게 그래도 되느냐? 그 여자에게 그딴 저열한 소문이 따르는 게 이 어미 탓이냔 말이야?”

온갖 악감정이 들끓은 후작 부인은 끝내 아들에게 소리치고 말았다.


“리안드로, 정신 차려! 그 여자는 애초에 네 인생에 없던 여자였어!”

리안드로는 정중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변은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선 제안은 거절해 주십시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후작 부인이 리안드로를 불렀지만, 리안드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애초에 제 인생에 없던 여자였다고요?’

그럴 수 있었다면, 이토록 힘겹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제가 그 여자를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겁니까?’

리안드로는 펠시스 저택의 지하실을 탐색했다. 그곳에서, 그는 후계자인 자신도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방을 찾았다.

가주의 인장 없이는 열리지 않는 방.


‘정말, 펠시스 후작가는 내가 생각하던 가문이 맞는 것인가?’

리안드로가 가슴 부근을 움켜쥐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그녀를 대하던 내 태도가 전부 잘못된 것이었던가?’

에스텔이 리베르탄에서 악행을 일삼으며, 친딸 행세로 예스텔라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이제 리안드로는 무엇이 사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에스텔을 만나야 한다.’

생각해 보면 그는 여태까지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것 같았다. 막혔던 실타래가 모두 에스텔을 중심으로 꼬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말을 들어봐야겠어.’

어쩌면 에스텔은 리안드로가 생각하던 악녀가 아닐지 몰랐다.

***

나는 베티와 함께 정보 길드에 도착했다.

[리사네 꽃집.]


“진짜 꽃집 같네.”

“실제로 장사도 잘 하고 있어요. 그래야 의심을 안 사니까요.”

에리히와 베티 두 사람이 모두 입을 모아 최고의 정보길드라 했으니, 일처리 하나는 끝내줄 것이다.

기밀을 위해 같이 온 베티도 밖에 두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블란쳇 공작 부인.”

안에는 두건을 쓴 더티 블론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눈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굉장히 인상적인 남자였다.


“저는 정보길드의 카산입니다. 저희 정보길드를 찾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의뢰하기 위해서.”

“두 가지씩이나?”

“하나는 뒤탈 없는 새 신분.”

카산이 눈을 크게 떴다.


“공작 부인 본인께서 사용하실 것입니까?”

“그 부분은 알 필요 없지 않나? 젊은 여자가 사용할 수 있는 새 신분을 준비해 줘.”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말 없이 탁자 위에 돈을 가득 채운 주머니를 올려뒀다. 짤그랑, 돈 부딪히는 소리에 카산이 바로 태도를 바꿨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고객님?”

“미르유 쥬티에 대해 알아봐 줘.”

솔직히 이 두 번째가 내 진짜 목적이었다.


‘새 신분 마련이야, 온 김에 처리하는 일에 가깝지 뭐.’

이 정보 길드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한 대비책은 많을수록 좋았다.


“정확히는-”

카산의 고개가 신중히 끄덕여졌다.

***

정보길드를 접선하고 나오자, 베티가 친절한 미소로 반겼다.


“마님, 볼일은 잘 처리하셨나요?”

“응. 잘 끝내고 왔어.”

“그러면 저도 마차를 가지고 올게요.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위장을 위해 마차를 먼 곳에 대어 놓았던지라, 베티는 마차를 가지러 떠났다.

나는 리사의 꽃집에서 기념으로 산 해바라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 저주는 다 풀린 건가?’

요즘 미르유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운디네 티어를 심고 기다리면 된다지만, 솔직히 바로 안 되어 저주가 풀렸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아 조금 답답했다.


‘이놈의 저주!’

나는 혼자 있는 틈을 타 나무에게 불평했다.


-그 에덴 로즈는 언제 다 피는 거예요?

-아가, 너도 참. 꽃 피는 게 그리 쉬운 일인지 아니?

-그래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죠. 도대체 언제 피는 건데요.

-그건 우리도 기다리라는 말밖에는…….

그 순간이었다.

푸른색 깃털이 화려한 새가 내 앞에 날아와 꽃잎을 톡 뜯었다.


‘이 새는 뭐지?’

깃털이 곱게 다듬어진 것이, 심상치 않은 새였다. 그때 새의 주인이 급히 나를 향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제 새가-”

사과하던 새 주인이 멈칫했다.


 


“……로이엄 공주님?”

“블란쳇 공작부인?”

다이아나는 긴장한 얼굴로 어색하게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블란쳇 공작 부인. 제가 실례를 끼쳤습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어깨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푸른 새를 애타게 데려가려고 했다.


“블루나, 가자.”

그때 푸른 새가 다이아나의 얼굴에 해바라기 씨를 뱉었다.

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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