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제는 네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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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이제는 네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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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이제는 네 차례야
2022.07.15.
미르유는 아침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오늘 로이엄 저택에 에스텔이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그간 미르유는 헤센에게 은근히 물어보며 에스텔과의 일을 낱낱이 듣고, 에스텔의 속셈을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에스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르유의 주변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블란쳇 공작 부인과 별 얘기도 하지 않았다던 헤센은 에스텔을 칭찬했다.
‘미르유, 참 좋은 친구를 두셨습니다.’
이사벨라 왕비 또한 미르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더 가혹하게 대할 뿐이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구나. 하지만 이렇듯 좋은 마음을 보여주신 만큼 더 실수가 없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런 탓에 미르유는 매일 밤 쉬이 잠들지 못했다. 겨우 잠이 든다 싶으면, 비명을 지르며 악몽에서 깨어나고는 했다.
미르유가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겨우 버린 어린 시절의 습관이다.
‘이대로는 안 돼.’
걸어가는 미르유의 발치에 화분이 걸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주위의 하녀들이 깜짝 놀라 미르유에게 달려왔다.
“어머, 미르유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누가 화분을 이딴 장소에 두었어? 다칠 뻔했잖아!”
하녀들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짜증이 치솟은 미르유는 하녀들을 들들 볶을 뿐이었다.
“빨리 치워! 이런 식으로 해서 손님 접대는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다시 이딴 식으로 행동했다간, 이 저택에서 쫓겨날 줄 알아!”
미르유가 사라지자, 하녀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시지? 평소엔 저런 분이 아니셨는데.”
미르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냥하게 자신들을 대해주던 아가씨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미르유의 새로운 모습이 무척 당혹스러웠다.
“결혼식 전이라 신경이 날카로워지신 걸까?”
“글쎄. 그럴 수도 있지만. 또 알아?”
가만히 깨진 화분을 치우던 하녀가 낮게 속삭였다.
“원래 저런 분이었는데 숨기고 있었을지.”
“설마…….”
“결혼 전에야 뭔들 못해. 그러니 너도 조심해. 눈치 없이 근처에 있다가 피 보지 말고.”
그렇게 로이엄 저택에서부터 천사처럼 착한 미르유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
로이엄 왕가는 내게 사죄하는 의미로 연회를 열어주었다.
로이엄 별장 전체를 큰 연회장으로 꾸민 것이다. 내 도착 소식을 들은 이사벨라 왕비는 고아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안녕하십니까, 블란쳇 공작 부인.”
“안녕하십니까, 로이엄 국왕 대리님.”
이사벨라 왕비는 철의 왕비라는 별명처럼 굉장히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페트리샤가 생각나네.’
페트리샤처럼 엄청 까탈스럽고 깐깐해 보이지만, 동시에 전에 본 다이아나처럼 사냥꾼 같은 느낌도 풍겼다.
“조촐한 연회지만, 오로지 블란쳇 공작 부인을 위해 준비한 연회입니다. 부디 부인의 눈에 차는 연회가 되었으면 싶군요.”
조촐하다고 평가한 것치고, 로이엄 연회는 꽤 공들여 준비한 티가 났다.
‘내가 쉽게 넘어가 줘서 고마워서 저러나?’
하긴. 그때 헤센 왕세자가 너무 기분 좋게 떠나기는 했다.
‘안녕하십니까, 블란쳇 공작 부인. 저는 로이엄의 왕세자 헤센 로이엄입니다. 제 약혼녀의 무례로 어려운 일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헤센 왕세자는 아주 정중한 얼굴로 블란쳇 공작가에 찾아왔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합당한 보상 목록을 전달하기까지 했다.
‘다이아나 공주의 기사직위 박탈이라, 그건 너무하지 않을까요?’
‘기사로서 해서는 안 될 무례를 끼쳤으니, 그 애도 책임을 져야지요.’
‘약속해 주신 보상 외에 추가적인 보상을 해주신단 말씀이 적혀 있는데, 어떤 보상을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쥬티 남작가의 보상을 저희 로이엄 왕국 측에서 감당하기로 했기에,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바라시는 보상을 얘기해 주십시오. 다만, 로이엄 왕국에서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이기를 부탁드릴 뿐입니다.’
헤센은 무척 어두운 표정이었다. 내가 많은 걸 요구할 거라 확신하는 태도였다.
‘이건 너무 과한 보상이에요.’
하지만 애초부터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저는 지금까지 주신 걸로도 충분해요. 보상을 받을수록 오히려 너무 걱정돼요.’
일부러 미르유를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적당히 보상을 받아 챙겼다.
‘미르유에게 괜한 피해가 갈까 봐요. 둘 사이에 있던 일이 너무 커지고 말았어요.’
‘미르유를 용서해 주신단 말씀이십니까?’
‘용서라니요, 전 한 번도 그 애를 미워하거나 나쁘게 생각했던 적이 없는걸요. 서로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애는 아직도 제게 유일한 친구예요.’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것은, 로이엄 왕가의 보상 같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 목적은 악소문을 퍼뜨리던 미르유, 그 애가 하던 짓의 진실을 완벽히 파헤치는 데 있었다.
‘분명 미르유 혼자서 벌인 일일 리가 없어. 뒤에 누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제국 사교계가 몽땅 믿을 정도의 소문을 퍼뜨릴 수 있을 리 없다.
이사벨라 왕비는 나와 담소 몇 번을 나누다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떠났다.
‘격식을 차리기 위해서 사람을 많이 초대했나 보네.’
내가 연회를 돌아다니는 다른 귀족들을 살펴보며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정면에 내가 찾던 사람이 보였다.
미르유는 보라색 드레스로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풍성한 보라색 드레스는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하얗게 질린 미르유의 얼굴을 더 시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 미르유.”
나는 생긋 웃으며 돌처럼 굳은 미르유의 손을 마주 잡았다. 미르유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블란쳇 공작 부인.”
“섭섭하게 그렇게 부르지 마.”
어색한 미르유의 반응을 보며, 속상한 것처럼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니면 설마 이번 일 때문에 나한테 화난 거야?”
“……어?”
“미안해. 내가 더 강하게 요한을 말렸어야 했는데. 역시 결혼에 지장이 생긴 거지? 아니면 약혼자와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아닌 척해도 주위 귀족들은 나와 미르유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흥미로운 구경거리겠어.’
미르유는 곁눈질로 주위 귀족들을 보고 빠르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에스텔. 우리 결혼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정말?”
“그럼. 헤센과 나 사이도 여전히 좋고. 식은 예정대로 진행될 거야. 이게 다 네가 날 용서해 준 덕분이지.”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 하는 미르유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화려한 화장으로 감추려 한 것 같았지만,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느껴졌다.
‘내가 뭔 짓을 할지 무서운가 봐?’
이제 슬슬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게 해줄 때가 됐다.
나는 감격한 것처럼 미르유를 확 끌어안았다. 오해가 풀려 기쁜 것처럼 눈시울도 붉혀줬다.
그리고 귓가에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럼 터뜨려도 되겠네?”
속삭이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마주친 미르유는 억지로 환히 웃은 채 아무것도 못 들은 척했다.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겠어?”
“아아. 못 들었구나. 그러고 보니 여기는 둘이 오붓하게 이야기하기엔 사람이 좀 많은 것 같아.”
우리의 얘기를 엿듣던 귀족들이 큼큼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르유가 내 어깨를 꽉 누르며 낮게 속삭였다. 여전히 얼굴은 웃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야.”
“난 그저 널 돕고 싶을 뿐인데. 그런 식으로 오해하면 곤란해.”
“오해는 무슨-”
“그러면 다 얘기해?”
나는 다른 귀족들에게 충분히 들릴 수 있게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네가 사실 쥬티 남작가의 사생-”
“그래, 좋아!”
미르유가 억지로 박수까지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2층에 바로 헤센의 서재가 있어. 거기서 둘이서 오해를 풀기엔 딱일 것 같아. 어때?”
미르유의 헤이즐넛 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눈꼬리를 사르르 접어 웃었다.
“나도 너무 좋지.”
***
미르유는 급히 에스텔을 데리고 헤센의 서재에 들어갔다.
쾅!
거칠게 문을 닫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미르유가 다그치듯 에스텔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하지만 에스텔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짜증이 날 정도로 느긋하게 헤센의 서재를 둘러보며 와인 장식장 앞에 서서 물었다.
“약혼자가 와인을 좋아하나 봐.”
헤센의 취미는 와인 수집이었다. 그래서 미르유는 종종 헤센과 함께 와인을 마시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와인 장식장에서 와인 하나를 꺼낸 에스텔이 산뜻하게 웃었다.
“딱 와인 잔도 두 개 있고, 좋은 와인도 있네. 이렇게 된 거 같이 건배라도 하는 건 어때?”
“헛소리하지 말고, 본심이나 말해. 자꾸 그딴 헛소리로 협박하는 이유가 뭐야?”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에스텔은 미르유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네가 사생아란 얘기를 폭로하기라도 할까 봐?”
“…….”
“걱정 마. 폭로하려고 했으면 진작했겠지. 뭐하러 지금까지 아껴뒀겠어.”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미르유는 겨우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거였구나.”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했던 미르유 자신이 어리석었다. 에스텔이 바라는 거라면 단 하나뿐일 텐데.
“내 약점 하나 잡았다고 나한테 복수하려는 모양이지?”
에스텔이 헤센의 책상 위에 걸터앉아 미르유를 바라보았다.
집무실 조명 아래에서 분홍빛으로 빛나는 몽환적인 백금발, 오밀조밀하고 달콤한 이목구비.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텔은 공들여 세공한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언뜻 보면 진짜 귀족 같았다.
‘짜증 나.’
미르유는 에스텔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가 싫었다.
평민 입양아 주제에, 귀족의 피 같은 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주제에 미르유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게 생겼다.
에스텔 앞에 서면, 미르유는 그녀의 들러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속이 다 시원하니? 남의 비밀을 가지고 천박하게 조롱하는 게?”
“…….”
“너도 힘들어 봤으니까 내 마음 알 거 아냐. 사생아라는 게 얼마나 큰 비밀인지. 같은 처지로서 이해하고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니?”
억울해진 미르유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르유.”
하지만 에스텔의 표정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착각하지 마.”
“…….”
“그건 네가 날 팔아먹으면서 깎아내리기 전에나 통했을 소리지. 너는 날 그렇게 이해해서 널 괴롭히고 흉터까지 낸 악녀로 만들어놨니?”
“그건……!”
미르유가 주먹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가난한 쥬티 남작가의, 그것도 사생아인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쥬티 남작가는 결혼 장사를 위해 사생아인 미르유를 입적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난한 집안을 돕기 위해서 최대한 좋은 집안에 시집을 가야 했다. 하지만 미르유는 빼어난 미모도, 남의 눈에 띄는 재주도, 그럴듯한 능력도 없었다.
에스텔은 그런 미르유에게 너무 좋은 기회였다.
에스텔이 아니었다면, 미르유는 그렇게 남의 눈에 띌 수 없었을 테니까.
“우리 부모님이 날 아껴주시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시집을 잘 갈 거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니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서.”
에스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에스텔은 미르유에게 걸어갔다. 미르유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째서지?’
에스텔은 미르유보다 가늘고 마른 체구였다. 그런데도 에스텔 앞에 서 있으니 왠지 모를 두려움이 밀려왔다.
궁지에 몰린 것처럼.
“내가 너를 이해해 줘야 한다?”
“그, 그치만, 결과적으로 넌 다 잘됐잖아!”
미르유가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블란쳇 공작과 결혼하고, 부유한 공작 부인이 되어서 잘 지내고 있잖아. 그렇게 잘 지내고 있으면, 옛날 일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는 거 아냐?”
말을 하면 할수록 미르유는 점점 더 억울해졌다. 저 애는 아무 노력도 없이 얼굴 하나 예쁘게 태어난 걸로 블란쳇 공작과 결혼까지 했다.
심지어 미르유가 애썼던 헤센의 마음마저 쉽게 사로잡은 것 같았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어! 그런데 왜 그 마지막 하나마저 빼앗으려 하는 거야?”
고요하게 미르유를 바라보던 에스텔이, 돌연 생긋 웃었다.
“그래, 네 말은 잘 들었어. 네 비밀은 절대 폭로하지 않을게.”
“폭로하지…… 않는다고?”
“그래, 그러니까 안심해.”
미르유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왜?”
“왜겠어.”
그 순간, 에스텔이 들고 있던 와인을 벽을 향해 휘둘렀다.
쨍그랑-!
와인 파편이 집무실 바닥에 흩어졌다. 에스텔의 흰 드레스 여기저기에 붉은 와인으로 물들었다.
만족스럽게 제 차림을 본 에스텔이 들고 있던 와인을 바닥에 버리고 손을 탈탈 털었다.
“너, 너 미쳤어! 갑자기 남의 집에서 이게 무슨-!”
“뭘 새삼.”
고스란히 붉은 와인을 뒤집어쓴 에스텔이 빙그레 웃었다.
“네가 말하고 다니던 나, 이런 애 아니었어?”
미르유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에스텔은 우아하게 웃는 얼굴로 미르유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 네가 말하던 대로 해줄게.”
“…….”
“리베르탄의 악녀처럼.”
그리고 벌컥 문을 열었다.
유리 깨지는 소란에 연회를 즐기던 사람 몇 명이 달려왔다. 그중에는 미르유의 약혼자인 헤센 왕세자도 있었다.
미르유의 얼굴이 밝아졌다.
“헤센-!”
하지만 에스텔이 서글픈 목소리가 먼저였다.
“미르유, 어떻게 네가 나한테-”
돌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에스텔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며 비틀거리기도 했다.
헤센이 쓰러질 것만 같은 에스텔을 잡아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왕세자님.”
에스텔은 순한 눈망울을 내리뜨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커다랗고 반짝이는 남색 눈동자에 큰 슬픔이 고였다.
“미, 미르유가- 아니에요.”
에스텔이 부끄럽다는 듯 손에 묻은 와인을 닦으며 울먹였다.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자기도 모르게 미르유를 곁눈질한 에스텔이 얼굴을 가렸다. 헤센이 손수건을 꺼내 에스텔을 닦아주며 미르유에게 물었다.
“미르유.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와인에 홀딱 젖은 에스텔.
그리고 멀쩡한 차림의 미르유.
누가 봐도 가해자는 명백해 보였다. 미르유는 너무 기가 차서 바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상황을 다 알고 있는 자신이 보기에도, 에스텔은 너무 완벽한 피해자처럼 보였으니까.
몸 곳곳에 튄 붉은 와인은 에스텔을 추하게 만들기는커녕, 더 가련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미르유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더할 것이다.
“헤센, 이건 다 에스텔이-”
“미르유. 나는 널 이해해. 하지만…….”
에스텔이 헤센의 손수건을 감사히 받아 들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좀 힘든 것 같아.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에스텔은 그 상황에서 미르유를 내버려 둔 채 안쓰러운 모습으로 도망쳤다.
로이엄 저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에스텔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거짓말은 너만 할 줄 알았니?’
미르유 때문에 에스텔은 항상 에스텔은 저지르지 않았던 일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 아무도 믿지 않아도 뭐라도 말해야 했다.
‘이젠 네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