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결혼식을 미루는 건 어떻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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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결혼식을 미루는 건 어떻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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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결혼식을 미루는 건 어떻겠느냐?
2022.07.08.
잠시간의 침묵.
오르테카 재상이 심상치 않은 리안드로를 보며 물었다.
“펠시스 경,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소문에서 어떤 부분이 악의적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굳이 따지자면, 마치 블란쳇 공작 부인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도 되는 것처럼 꾸며진 부분이 가장 큰 문제겠지요.”
오르테카 재상은 눈썹을 내리며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블란쳇 공작 부부는 우연히 헤텔 백작가에 들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블란쳇 공작 부인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고 했던 것은 헤텔 백작가였고요.”
“…….”
리안드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르테카 재상이 헛된 소리를 할 리 없다.’
블란쳇 공작 부인만큼이나 속을 알 수 없는 자였지만, 폐하의 이름을 댄 재판에서 실수를 할 인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펠시스 후작 부인뿐만이 아니다.
리안드로 주위에 있는 모든 이가 다 헤텔 백작가가 에스텔의 수작에 놀아난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들이 모두, 그 여자를 모함했던 거라고?’
그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지?’
리안드로는 제 주위가 다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난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 죄를 사죄할 순 없잖아요?’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단호하던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 리안드로는 그 모습조차 에스텔의 무지함이라 여겼다.
‘만약 나와 내 주변이 전부 잘못된 거였다면…….’
리안드로는 단 한 번도 제 세상을 의심한 적 없었다.
펠시스 후작가의 상징은 튤립을 새긴 방패였다.
제국을 보호한다는 염원을 담은 상징답게 펠시스 후작가는 제국을 지키고, 신전과 함께 선행으로 제국을 보살펴왔다.
리안드로 역시 방패가 되어 선하고 질서 가득한 제국을 지키려 했다.
‘이거 하나만 알아두세요.’
그런데 그의 방패에 말도 안 되는 오물이 묻어버렸다. 리안드로는 서둘러 아무도 보지 않게 그 오물을 닦으려 했다.
‘당신이 믿고 싶지 않다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진 않아요. 진실이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아무리 닦으려 애써도, 그의 방패는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다이아나에게서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군요.”
그 순간 헤센 왕세자가 충격받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안드로가 고개를 들자, 헤센 왕세자 역시 심각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도 참 신기했습니다. 제가 중재한 사건에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이 계속 퍼지니 말입니다.”
오르테카 재상의 대답에, 헤센 왕세자가 시선을 바닥에 두며 물었다.
“그렇다면 재상님께서는 이번 결투에 대해서 더 아는 게 있으십니까?”
“글쎄요, 오히려 로이엄 왕세자님께서 잘 아셔야 하는 일 아닙니까?”
헤센 왕세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헤센 왕세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급히 자리를 떠났다. 당장 결투에 들어가야 할 리안드로에게 건투를 비는 것도 잊은 채.
하지만 당사자인 리안드로 역시 그걸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오르테카 재상이 떠나자, 리안드로는 대기실에 홀로 남았다. 리안드로는 자랑스러운 백야의 문장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펠시스 경, 결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똑똑.
“이제 결투장으로 이동해 주셔야 합니다. ……펠시스 경?”
아무 반응이 없자, 시종은 대기실 문을 멋대로 열 수밖에 없었다. 시종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
이번 결투는 황실 결투장에서 열렸다.
요한 블란쳇 공작과 황실 기사단장 리안드로 펠시스.
귀족 당사자가 결투에 나서는 일은 잘 없는데, 고위 귀족인 두 사람이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블란쳇 공작께서 부인의 명예를 위해서 직접 결투 신청을 한 것이라지요?”
“블란쳇 공작께서 정말 공작 부인을 아끼고 있나 봅니다. 이제 블란쳇 공작의 마음을 의심할 사람은 없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에스텔은 리베르탄 공작가의 입양아였다. 그래서 블란쳇 공작이 무슨 목적이 있어 부인으로 들였다는 평가는 여전히 따랐다.
‘아무리 리베르탄 공작가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지만…….’
‘어떻게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지? 심지어 본인이 부인의 집안인 리베르탄 공작가를 멸문시켰으면서.’
황실 결투장에 블란쳇 공작 부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반역자가 된 리베르탄의 여자.
그리고 리베르탄을 반역죄로 몰락시킨 남자.
심지어 남자의 가문은 리베르탄 공작가로 인해 멸문했었다.
아무리 봐도 사이 좋기 어려운 두 사람은, 신기하게도 애정이 가득해 보였다. 두 사람만 보고 있으면,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말 사랑하는 사이란 말이야?’
댕-
결투 시간이 되자 요한이 아래로 나섰다.
에스텔은 손을 흔들어 주며 요한을 응원했다. 하지만 결투 시간에 맞춰 당연히 나타났어야 할 리안드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펠시스 경께서 늦으시다니, 별일이 다 있군요. 설마 이대로 결투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요?”
“설마 그러시겠습니까. 그분은 백야의 기사답게 명예를 아시는 분입니다.”
귀족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봐온 긍지 높은 리안드로의 모습을 믿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강철같은 믿음마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시는 길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게 아닐까요?”
“설마 블란쳇 공작과의 결투가 두려우셔서.”
“어허! 그건 너무 지나친 말씀입니다.”
요한은 팔짱을 낀 채 심판인 오르테카 재상에게 물었다.
“결투가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러게 말입니다. 펠시스 경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염려되는군요.”
오르테카 재상이 곤란한 듯 시종에게 물었다.
하지만 리안드로를 찾으러 갔던 시종은 의외의 답을 들려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펠시스 경께서는 대기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에 가셨단 말입니까?”
“저희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으셔서…….”
귀족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결투장에 앉아 있던 미르유를 향했다. 미르유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통로를 바라봤다.
‘도대체 왜…….’
미르유는 리안드로를 믿었다.
아무리 블란쳇 공작이라 해도 제국 최고의 기사인 리안드로를, 그것도 결투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헤센 왕세자가 굳은 얼굴로 미르유를 다독였다.
“미르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펠시스 경께서 조금 늦으시는 걸 겁니다.”
“그렇겠지요?”
“물론 나타나지 않으실 경우 이번 결투는 당연히…….”
물론 미르유를 위로해 주는 헤센 왕세자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리안드로가 나타나지 않은 이상, 비난은 리안드로에게 몰리겠지만 로이엄 왕국 역시 져야 할 부담이 컸다.
미르유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애가 비겁한 수를 쓴 거야.’
미르유는 바로 건너편에 앉아 있는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에스텔과 미르유의 눈이 마주쳤다.
에스텔은 미르유를 보며 어깨를 으쓱여보았다.
‘도대체 리안드로가 왜 안 온 거지?’
놀랍게도 에스텔 역시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한이 무슨 짓을 한 건가?’
에스텔이 놀란 눈으로 결투장에 선 요한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요한은 에스텔을 향해 곱게 눈웃음 지어줄 뿐이었다.
***
“이번 결투는 블란쳇 공작의 승리입니다.”
결국 오르테카 재상은 요한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 결과에 따라 로이엄 왕국과 펠시스 후작가는 블란쳇 공작 부인의 명예를 더럽힌 것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십시오.”
***
로이엄 저택.
승부조차 하지 못하고 결투에서 패배한 로이엄 왕국의 분위기는 무척 좋지 않았다. 그 분위기는 저녁 식사 시간까지 이어졌다.
이사벨라 국왕 대리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명예를 걸고 나선 기사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 역시 우리의 잘못. 결투대로 결과에 승복하는 수밖에. 쥬티 남작가에서는 무어라 하느냐?”
“그건.”
미르유는 차마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쥬티 남작가는 이 결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한미한 가문이다. 쥬티 남작가에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헤센 왕세자가 미르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이번 일은 다이아나가 미르유를 데려갔다가 생긴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 로이엄 왕국 측에서 쥬티 남작가의 몫까지 배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가, 네 생각은 어떠하냐?”
“죄송합니다, 어머님.”
미르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 못했다.
이사벨라 왕비는 미르유와 헤센을 번갈아 보다가 미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쥬티 남작가에서 책임지기엔 과한 규모지. 헤센 네 말대로 다이아나의 책임이 크니 로이엄 왕국에서 블란쳇 공작 부인께 배상 책임을 다하도록 하겠다.”
“가, 감사합니다, 어머님.”
미르유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거렸다. 이사벨라 왕비는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감사할 것 없다. 한 가족이 될 사인데, 이 정도는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
이사벨라의 말과 달리 이번 배상은 그렇게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귀족의 명예는 굉장히 무겁다.
아마 이번 일을 배상하기 위해서, 로이엄 왕국은 블란쳇 공작가에서 요구하던 독점 무역권과 해상권을 어느 정도 넘겨줄 수밖에 없으리라.
‘어쩌면 더한 것을 넘겨줘야 할지도.’
이사벨라는 감격한 미르유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가. 결혼을 미루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
미르유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헤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번 일은 넘어가 주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헤센, 이 일은 단순히 돈만 배상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결혼식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헤센 역시 어머니의 말에 크게 부정하지 못했다.
이번 일로 입지를 회복한 블란쳇 공작 부인이 그들의 결혼식을 방해하고 나설 수 있다.
문제는, 로이엄 왕국 측에서 거기에 대해 제대로 나설 명분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럴 바엔 조금 더 체면을 잃더라도 결혼식을 미루는 게 나았다.
“미르유, 당신은 어떻게 생각-”
“어머님.”
의자에서 일어난 미르유가 이사벨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모든 일은 다이아나를 말리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
“솔직히 어머님께서 결혼식을 미룬다 하셔도 어쩔 수 없는 걸 알아요. 하지만-”
미르유의 순한 눈망울에서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쥬티 남작가는 다시 결혼식을 준비할 여유가 없어요.”
“로이엄 왕국에서 네 지참금에 보태주겠다. 그리해도 어렵겠느냐?”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이 목숨을 걸고 로이엄 왕국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미르유는 목이 멘 것처럼 말을 멈췄다. 헤센이 미르유의 어깨를 감싸며 두둔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헤센.”
“오랫동안 기다려온 결혼식입니다. 여기서 더 미루면 이 사람의 명예에 누가 될지 모릅니다.”
솔직히 헤센은 미르유가 결혼식을 미루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두 사람의 처지가 너무 차이 나다 보니, 헤센이 미르유를 버릴 거란 소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직 많이 불안한 거겠지.’
헤센은 제 어머니에게 애원했다.
“어머님께서 나서주시면,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지 않습니까.”
“……알았다.”
이사벨라 왕비는 우아하게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하지만 아가, 너도 기억하거라.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경우, 더 이상 왕국에서도 너를 도와줄 수 없을 거다.”
“어머니. 그런 말은.”
“헤센 너도 마찬가지다. 왕세자답게 왕족의 의무를 잊지 말거라.”
미르유의 역성을 들어주던 헤센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사벨라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흠칫 굳었다.
‘내가 또 지나쳤구나.’
헤센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보살핌 없이 홀로 자라야 했다. 이사벨라가 갑작스럽게 죽은 남편을 대신해 로이엄 국왕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과분하게도 헤센은 훌륭한 왕세자로 자랐고, 미르유는 집안이 부족하긴 해도 나쁘지 않은 며느릿감이었다.
무엇보다 헤센이 사랑하는 여자였다.
“아니다, 내가 실언했다. 이미 벌어진 일, 더 언급해 봐야 무엇하겠느냐.”
이사벨라가 미르유의 얼굴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예의를 다 하기 위해 로이엄 왕국의 이름으로 블란쳇 공작 부인을 초대하여 정식으로 사죄하마. 하지만 너 역시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
“그게 도리다.”
미르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님.”
***
헤센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간 미르유가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번엔 헤센 덕분에 살았지만…….’
에스텔을 매장하기는커녕 도리어 띄워준 꼴이다.
‘대책이 필요해.’
무심코 거울을 본 미르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거짓말처럼 목에 있던 흉터가 사라져 있었다.
‘언제 시간이 다 됐지?’
미르유가 급하게 방에 숨겨두었던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금반지 목걸이가 담겨 있었다.
이 금반지엔 그녀의 흉터를 지속시켜 주는 흑마법이 걸려 있었다.
‘설마 흑마법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미르유의 초조한 시선이 거울을 계속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새언니, 우리 잠깐 얘기 좀-”
그 순간, 다이아나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