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너, 나 사랑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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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너, 나 사랑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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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너, 나 사랑하잖아
2022.07.05.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앗, 이렇게 발랄하게 외칠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나도 너무 신나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것 같다.
‘리안드로한테 쌓인 게 많아서 그런가?’
내 말을 들었는지, 리안드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지금 신성한 결투를 장난처럼-”
철퍽!
요한은 긴말 없이 내 손을 통해 리안드로의 안면에 장갑을 던졌다. 얼마나 잘 맞았는지, 소리가 방금 전보다 더 요란했다.
‘와, 리안드로가 날아오는 걸 고개를 들어서 피했는데.’
그것까지 감안해서 던졌는지 정확히 안면에 맞았다.
리안드로의 얼굴에 자국이 벌겋게 올라왔다. 검은 장갑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롱 내부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리안드로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얻어맞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싸늘하게 나를 바라봤다.
“자, 명중.”
고요한 사위에 요한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벌 더 있었으면 또 던지게 해줬을 텐데. 아쉽다.”
“……블란쳇 공작. 신성한 기사의 결투를 조롱하지 마십시오.”
리안드로는 이를 아득 갈며, 바닥에 떨어진 요한의 검은 장갑을 주워 들었다. 요한의 도발을 받아주지 않는 것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 같았다.
“블란쳇 공작, 나 역시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좀 짜증 나지만, 리안드로는 동화 속 고결한 기사처럼 보였다.
“하나 내 백야의 검 역시 그리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펠시스 후작가.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가.
블란쳇 공작가가 가장 긍지 높은 귀족 가문이었다면, 펠시스 후작가는 우직한 기사를 본떠 만든 듯한 가문이었다.
대대로 황궁 기사단장을 역임하며, 황실을 수호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블란쳇 공작가에 밀려 두 번째란 소리를 듣긴 했지만…….’
블란쳇 공작가가 사라진 뒤엔, 제국의 유일한 긍지로 불렸었다.
그중에서 리안드로는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워 ‘백야의 기사’라는 칭호까지 받은 남자.
날 선 리안드로의 푸른 눈이 요한을 향했다.
“그러니 당신 역시 그 오만에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겁니다.”
“그럴 수 있다면, 환영이야.”
하지만 요한은 리안드로의 기세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보다 네가 그토록 중요하다던 참고인이나 데려가는 게 어때?”
리안드로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기절해 있는 미르유를 바라봤다.
“쥬티 영애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중요 관련자라기에 극진히 모셔왔을 뿐이야.”
“극진히 모셔왔다는 쥬티 영애가 기절할 리가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변명입니다.”
“글쎄. 갑자기 기절하고 싶어졌던 모양이지?”
입매를 비틀어 웃던 요한이 미르유를 향해 턱짓했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내 부인 말고 이 여자나 데려가서 물어봐.”
그 순간 레이몬드가 품에 안고 있던 미르유를 던졌다. 리안드로는 황급히 움직여 바닥에 처박힐 뻔한 미르유를 받아냈다.
리안드로는 주먹을 꽉 쥐며 요한에게 이를 갈았다.
“블란쳇 공작, 당신이 아무리 감싼다 해서 그녀의 악행이 지워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 악행이 뭔지나 까발리고 얘기하도록 해.”
다이아나 공주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미르유에게 다가와 ‘새언니, 괜찮아?’ 하며 리안드로에게서 미르유를 넘겨받았다.
나는 기절해 있는 미르유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저 흉터, 뭔가가 있어.’
솔직히 난 미르유의 목에 흉터가 있다는 사실도 사교계의 소문을 알아보다가 알게 됐다. 그 정도로, 미르유의 흉터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아마 혼자 만들어내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닌 거겠지.’
나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나라고 짐작할 수 있도록.
‘그런데 왜 하필 흉터일까?’
미르유가 피해자 행세를 하며 대접받고 싶었던 것은 알겠다. 내 평판이 나빠질수록 그녀의 성품이 좋게 평가될 테니까.
‘흉터 말고 다른 더 좋은 수단이 많잖아.’
미르유야 상황이 잘 풀려서 흉터를 이해해 줄 만한 좋은 남편과 시댁을 만났지만 대부분의 경우 흉터를 가진 신부를 기피한다.
‘흉터, 흉터…….’
생각이 불현듯 내 몸에 있는 흉터로까지 이어졌다.
여태까지 내 흉터를 본 사람은 극소수였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 리베르탄 공작 부인의 하녀장, 베티, 주치의 헨리 씨.
‘그러고 보니 미르유도.’
그 순간 미르유와의 기억이 물밀 듯이 기어올라 왔다.
‘친구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안 되잖아. 답답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 이유가 뭔데.’
지금 미르유는 기절해 있지만, 내 눈앞에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어린 시절의 미르유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으으. 이, 징그러운 건 뭐야? 이거 설마.’
‘어쩌다가 갑자기 생겨난 거야.’
‘정말이야? 리베르탄 공작 부부께서 너를 무척 미워하신다며. 이런 게 어떻게 갑자기 생겨. 그리고 네가 아무렇지 않았으면 찾아온 날 돌려보낼 이유도 없-’
미르유가 집요하게 내 허벅지의 흉터를 뜯어봤다.
‘이 흉터 다른 사람도 봤어?’
‘……아니.’
‘그래, 네가 얼마나 못된 딸이면 신께서 이런 흉터가 생기게 했겠어. 평생 감춰.’
그러던 미르유는 좀 전과 달리 친절히 내 드레스를 다시 내려줬다.
‘에스텔. 나니까 네가 리베르탄에서 학대받는단 거짓말을 듣고도 넘겨주지, 다른 사람들은 달라.’
오랜만에 만난 미르유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처럼.
‘거기다 이 역겨운걸? 어우, 너도 무슨 소린지 알겠지?’
마지막에 미르유가 내 뺨을 때리며 헤어지지 않았다면, 별것도 아닌 걸로 자기를 감정적으로 괴롭힌다며 화내지 않았다면.
‘너는 네가 특별한 줄 알지?’
‘정신 차려, 넌 리베르탄에 운 좋게 입양되어 잘 살고 있을 뿐이야. 너 같은 걸 상대하고 있는 내가 다 한심해진다.’
나는 평생 그 말이 사실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알지.’
처음부터 미르유는 나를 친구로 보지 않았다.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고 싶어 했다. 그녀는 나를 학대하던 리베르탄 공작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
‘원작을 깨닫기 전에는 그 사실조차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다행히 잠든 미르유의 얼굴을 보고 있어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무튼 내 흉터를 본 것과 흉터로 거짓말한 게 관련이 있을까?’
솔직히 연관성이 없는데도, 그간 미르유가 하고 다니던 거짓말이 있어서 마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내 상태를 느꼈는지 요한이 내 어깨를 감쌌다.
“에스텔,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요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몸을 돌리던 순간.
“-레이디 에스텔.”
리안드로가 서글프게 나를 불렀다.
“저자가 악마처럼 속삭인다 해도 넘어가선 안 됩니다.”
요한은 리안드로의 말이 들리지 않게 내 귀를 막고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난 요한의 손을 내리며 배시시 웃어줬다.
“잠시만.”
요한이 미간을 좁혔지만, 난 고개를 돌려 리안드로를 돌아봤다.
“아무리 지난 일이라 해도 본인이 지은 죄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시작은 참회부터-”
다시 마주친 리안드로의 푸른 눈에 묘한 고양감이 치솟았다.
“펠시스 경, 안타깝게도 난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 죄를 사죄할 순 없잖아요?”
“당신께서 모르시겠다면,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드리겠습니다.”
역시나.
“아니요. 가르쳐 주지 마세요.”
나는 빙그레 입가를 올렸다.
“그 자랑스러운 백야의 기사가 하던 대로 하세요.”
“……무슨 말입니까?”
“나를 죄인이라 생각한다면, 제국법대로 하라고요. 내 뒤를 캐고, 죄를 정리해서, 재판장에 올려 처단하라고요.”
원작의 남자 주인공인 리안드로.
‘기사도가 변하는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정의의 기사.’
‘고결한 마음을 가진 제국의 검.’
실제로 원작에서 고통받는 나를 구하려고 한 사람은 리안드로뿐이었다. 그런 걸 보면 리안드로는 고고한 구원자가 맞았다.
“괜히 기회를 주는 척 가만히 있는 사람 성가시게 하지 말고요.”
하지만 그는 고고한 만인의 구원자였을 뿐이다.
리안드로에겐 내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자리에 누가 있었어도 리안드로는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참회를 요구했으리라.
그렇기에 리안드로는 내 사정 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알아두세요.”
난 리안드로 너머, 다이아나와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다이아나는 미르유를 안은 채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믿고 싶지 않다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진 않아요.”
다이아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혼란에 잠긴 것처럼 흔들렸다.
“진실이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
“아, 없던 죄도 속죄하라던 사람한텐 너무 어려운 얘기인가요?”
***
나는 요한과 함께 마차에 올라타는 와중에도 기분 좋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너무 신나서 그랬던 모양이다. 내가 창밖을 보며 실실 웃자, 요한이 픽 웃었다.
“그렇게 기분 좋아?”
이렇게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어색하게 볼을 만지작거렸다.
“티 많이 났어?”
“내 눈에만 보이는 거지.”
요한이 내 앞머리를 살짝 쓸어주며 눈을 맞췄다.
“앞으로도 자주 결투 신청하고 다녀야겠네.”
“왜?”
“그러면 네 기쁜 얼굴을 계속 볼 수 있을 테니까. 또 싫어하는 사람 있어?”
“누가 들으면 내가 사람들을 다 싫어하는 줄 알-”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한이 결투에서 리안드로를 이길 수 있을까?’
요한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다. 가능성 없는 싸움이었다면, 애초에 결투를 신청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리안드로는 제국의 제1검이야.’
저번에 요한이 리안드로를 압도할 수 있었던 건,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보호 마법도 사라졌을 텐데.’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요한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아, 저번에 보호 마법이 깨졌다고 했잖아. 몸 상태도 안 좋고.”
나는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리안드로와 결투해도 괜찮겠어?”
“내가 그놈 하나 못 이길 것 같아?”
“그건 아니겠지만, 요한이 다칠까 봐 그래.”
마차가 덜컹 움직였다. 마차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햇살이 들어왔다.
“걱정 마, 몸은 아주 멀쩡해.”
“진짜? 그래도-”
하지만 내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투의 시작이 기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기에, 검 외의 사술을 쓰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투에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잖아.”
“그래도 그놈은 날 이기지 못해.”
요한이 한쪽 눈을 찡긋해줬다.
“마법 외에도 내가 쓸 수 있는 무기는 많거든.”
갑자기 닥친 다이아나와 미르유를 홀로 상대해야 했던 나완 달랐다.
어떤 상황이 와도 여유롭게 대처하는 흑막. 나는 리안드로의 푸른색과 대조되는 요한의 붉은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차피 결투에 이긴다고 해도 사람들은 나를 믿어주지 않을 거야.”
바람이 불어 마차의 커튼이 흔들렸다.
“아마 권력으로 착한 미르유의 흉터조차 없던 일로 만들어버렸다 생각하겠지. 그러다 요한의 이름이 더러워질지도 몰라.”
비스듬히 들어온 햇살이 요한의 조각 같은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아니다, 나를 부인으로 들인 순간 요한의 이름이 더러워지는 건 불가피한 일이긴 했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일에 계속 휘말릴 일은 없었겠지.”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요한은 나를 믿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다들 내가 미르유에게 괴롭히다 못해 흉터까지 만들어냈다고 생각해. 가뜩이나 나는 악명 높은 리베르탄의 딸이잖아. 주제도 모르는 입양아.”
요한은 여전히 긴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고위 귀족답게 고고했다.
“너도 내가 그랬다고 생각해?”
“아니.”
요한이 빠르게 대답했다.
“네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
“……어째서?”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한테 상처 입었다던 미르유의 흉터를 봤잖아. 누군가가 칼로 그은 듯한 상처. 심지어 내가 악행을 저지르던 걸 보던 증인들도 있대.”
머리가 말도 안 되는 기대로 부풀었다.
‘이건 지나쳐.’
“그런데도 나를 믿어?”
“믿어, 그런 것들이 있어도.”
“요한이 직접 본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무턱대고 내 말이 맞다고 해도 돼?”
왜인지 말이 점점 뾰족해졌다.
“아아, 어차피 내가 블란쳇 공작 부인인 이상 그게 다 거짓 소문이어야 해서 그런 거야?”
그 순간 요한이 긴 팔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다리를 푼 요한은 천천히 내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울지 마.”
우습게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있지 않았다.
“요한 나 안 울어.”
“내 눈엔 울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요한의 긴 손가락이 내 눈가를 쓸어주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자주 흐르던 때와 달리 희한하게도 아무런 눈물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이런 네가, 어떻게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어.”
요한이 그윽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다들 증거니 증인이니 하면서 들고 와도 난 아무것도 안 믿어. 네가 한 말만 믿어.”
“왜?”
그가 천천히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너, 나 사랑하잖아.”
심장이 쿵 떨어졌다.
***
결투 당일이 되었다.
결투에 앞서, 미르유의 약혼자 헤센 왕세자가 리안드로를 찾아왔다.
“감사합니다, 펠시스 경. 제 아내의 명예를 위해서 움직여주시다니요.”
“별것 아닙니다. 그보다 두 분은 아직 약혼만 한 사이 아니었습니까?”
“곧 결혼할 사이니까 아내라 불러도 다르지 않지요.”
헤센 왕세자는 온화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펠시스 경께서 나서주지 않았다면, 제 동생 역시 곤란할 뻔했군요. 이거 감사를 또 드려야겠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로이엄 공주님은 괜찮으십니까?”
다이아나는 살롱에서의 일 이후 전혀 외출을 하지 않고 있었다. 큰 충격에 빠졌다는 소문이 가득했다.
“왕성에서 곱게 자랐지만, 다이아나는 강한 아이입니다. 분명 혼자서 잘 일어나겠지요.”
하지만 헤센 왕세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오빠, 정말 새언니의 말이 다 사실일까? 오빠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어?’
하루 종일 침대에 박혀 있던 다이아나가 이상한 생각에 취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결투에서 승리하지 못하신다면, 저희 로이엄 왕국 측에서 같이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제 아내 일이니까요.”
“이사벨라 국왕 대리님께서도 허락하셨습니까?”
“예. 어머님도 허락하셨습니다. 칼 같은 분이시지만, 가족 일에는 아낌이 없으신 분이시니까요.”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오르테카 재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펠시스 경. 오늘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두 분의 결투를 심사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오르테카 재상은 우아하게 인사를 마친 뒤 소파에 앉아 리안드로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블란쳇 공작 부인과의 사이에서 재판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군요. 이번은 결투라 좀 다르긴 하지만요.”
리안드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헤텔 백작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공작 부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퍼져서 제가 다 죄송하게 되었지만요.”
“악의적이라니…….”
“공작 부인께서 일부러 헤텔 백작가를 모함했다는 소문 말입니다. 펠시스 경은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리안드로 역시 들어본 적 있다. 그래서 일부러 에스텔에게 더 강경하게 나가지 않았나.
‘그게 악의적인 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