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너한테만 이래 (59/182)


59화 너한테만 이래
2022.06.24.


달콤한 꿈에서 강제로 쫓겨난 기분이다.


‘나를 위해서 처형을 미뤘다고?’

나는 긴장한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걸까?’

“우리 부모님의 처형?”

“그래. 바로 어제가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처형일이었어. 최대한 감추려고 해서 몰랐겠지만.”

원작에서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아주 떠들썩하게 죽었다.

전 제국민이 돌을 던지는 가운데 화형을 당했다. 흑마법사인 요한은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그대로 죽게 두지 않았다.


‘흑마법으로 죽지 못하는 상태로 되살렸지.’

황궁에서 고문하는 와중 저주를 걸어두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모든 진실이 밝혀진 뒤, 내가 죽지 못하는 몸이 된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발견하고 충격받도록.


‘하지만 지금 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어.’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소식까지만 들었지, 구체적인 처형일이나 처형이 미뤄졌다는 소식은 몰랐다.


‘요한이 철저하게 정보 통제를 했단 거겠지.’

“……그걸 나한테 말해주는 이유가 뭐야?”

“그러게.”

요한은 자신도 궁금하다는 듯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번 맞춰볼래?”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겠다.


“……설마 내가 속상해할까 봐?”

나조차도 납득하지 못한 그런 대답이었다. 당연히 요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목 언저리에 입술을 눌렀다.


“그래서일 거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뭔데?”

나는 최대한 순진한 얼굴로 요한을 슬쩍 밀어냈다.


“우리 부모님껜, 죽을죄가 있다고 했잖아. 그래서 처형을 피할 수 없다고.”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나 때문에 미뤘다니까,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러자 요한이 자신을 밀어내는 내 손을 잡아서 손가락 하나씩 입 맞췄다.


“아직 죽기엔 그들의 죄가 다 밝혀지지 않은 것 같아서.”

요한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어쩐지 그게, 나에 대한 일인 것만 같았다.


“그게 어떤 죄인데?”

“당장 말하기엔, 확실치 않은 것들뿐이라.”

요한은 가볍게 눈웃음치며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힌트를 줄게.”

의자 쿠션이 벽 끝까지 밀려났다. 발은 아직 대야에 담겨 있었다.


“너에 대한 거야.”

요한에게서 더 물러설 길은 없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나……?”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했다.


‘그 죄에…… 나한테 한 짓이 들어갈까?’

학대는 분명 죄다.

하지만 지금 요한이 밝혀내려는 그 죄가, 내 상처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 학대 같은 죄는 그가 밝혀내야 하는 그런 수고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므로.

거대한 복수를 위한 부품.


‘그러니까 나한테 복수하려고 한 거잖아.’

요한의 곁에 오랫동안 머무르기 위해서는, 나를 잘 통제해야 했다. 잘못했다간 기대도 품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하므로.


“솔직히 잘 모르겠어. 사실, 요한을 만나기 전까지 부모님이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도 몰랐어.”

“…….”

“리베르탄 공작가에 대해 물어봐도, 잘 알지 못해.”

지금이야 원작을 알고 있어서 알지만, 원래 난 아무것도 몰라야 했다.


‘요한이 날 미워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지만.’

그때 요한의 눈빛이 조금 서늘해졌다.


“리베르탄 공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내가 알기에는 무서운 것이 많다고 하셨어. 알려달라고 했지만.”

요한이 알고 있는 내 모습에 슬쩍, 내 의지가 없었다는 부분을 추가했다.

하지만 요한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아무것도 안 가르쳐 줄 수 있지?”

“대신 다른 것들을 많이 가르쳐 주긴 했어. 숙녀의 교양이나 고대어 같은 건 잘할 수 있어.”

어째 요한이 심각한 오해를 할지 몰라 변호했다.

그럴수록 요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래도, 그건 너를 가문의 아이가 아니라 학…… 아니다.”

요한은 표정을 가다듬고 다정히 웃었다.


“걱정 마.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아.”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해.”

“미안해할 필요 없다니까. 리베르탄 공작가 대신 블란쳇 공작가에 대한 것들로 채우면 되니까.”

“어떤 것들?”

“가문의 역사나, 전통?”

요한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신 재미 없다고 도망가면 안 돼.”

“안 그럴 거야. 내가 얼마나 성실한 학생인데.”

“나도 잘 알지.”

요한의 붉은 눈이 다정히 나를 훑었다.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려는지.”

이상하게 요한을 얼굴을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문제는 한쪽 발이 여전히 대야에 잠겨 있었단 거였다.

미끄러운 발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근처에 있던 꽃을 띄워둔 대야까지 다 엎어졌다. 귀족들이 주로 향유와 함께 두는 물이었다.

안에 있던 물이 확 치솟으며 삽시간에 주변이 홀딱 젖었다. 꽃잎이 나풀거리며 몇 개가 쏟아졌다.

나뿐만 아니라 요한도 몸 전체가 젖어버렸다.


“어떡해, 요한!”

 

 
옷이 물에 젖어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가 물이 치솟자마자 나를 끌어안으면서 보호했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행동 같았다.


‘마치 위협에서 보호하듯이.’

이걸 위협이라고 치면 좀 우습다.

그런데 요한은 쏟아지는 물도 내 위험으로 간주하는 듯했다.

온몸이 요한의 품에 갇힌 상태로,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단정한 외모가 물에 젖어 더욱 퇴폐적으로 보였다.

물에 젖어 그의 향이 더욱 진하게 배어났다.

그의 긴 속눈썹 끝에 물기가 고여 아롱거렸다.


“닦아야겠다.”

요한은 푹 젖은 윗옷을 벗었다. 자연스럽게 맨살이 드러났다. 우아하고도 짜임새 있는 선을 따라 단단한 근육이 움직였다.


“어디 아프진 않지?”

“과보호야. 이 정도는 괜찮아.”

“네가 괜찮다고만 하니까, 나도 이럴 수밖에.”

요한이 옆에 둔 수건으로 내 얼굴과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

이거 봐.


‘나보다 본인이 훨씬 젖었으면서.’

다정하고도 세심한 손길이 나를 어루만졌다.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요한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솜털이 바짝 긴장했다.


‘진짜라고 오해하고 싶을 정도로.’

“나, 난 바로 옷 갈아입으러 갈게.”

막 일어서려던 나를 요한이 멈춰 세웠다. 묘하게 강압적인 손길이었다.


“물기. 바로 안 닦으면 감기 걸릴지도 몰라.”

수건이 내 앞머리의 물기를 털었다.


“……알아서 할 수 있는데.”

“내가 해주고 싶어.”

“어째서?”

나는 용기 내어 그를 직시했다.


“왜 나를 챙겨주고 싶은데?”

“…….”

“원래 아무한테나 이렇게 챙겨주는 거야?”

요한은 말없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적요한 침묵이 주위에 고였다.


“난 너한테만 이래.”

살짝 물기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고혹적인 눈매, 우아하게 솟은 콧대, 모양 좋은 입술. 요한이 조용히 눈웃음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특별히, 네게만 그런 마음이 들어.”

따듯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스치듯이 닿았다.


“너를 피하려고 해도 도저히 피해지지가 않아. 자꾸 시선이 가고 욕심이 생겨.”

이내 입술은 살며시 내려와 눈가 위와 코끝에 정성스럽게 내려앉았다.

요한은 장난스럽게 코끝을 가볍게 깨물고, 얼굴을 떼었다. 탐욕스럽고 진득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입가에는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로.


“다음에는 어디일 것 같아?”

……귓가에는 아주 나른하게.

우리의 입술이 맞닿았다.

***

로이엄 저택은 한창 사람들로 붐볐다.

로이엄 왕세자에 비해 가난한 남작가 출신 미르유는 많이 떨어지는 신붓감이었다.

국왕 대리인 이사벨라 왕비는 미르유가 움츠러들지 않도록 결혼 전까지 매일 파티를 열어주었다.

미르유의 친구들은 이제 곧 왕세자비가 될 미르유를 찾아와 축하했다.


“미르유, 너무 잘 풀려서 다행이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나 봐.”

“헤센 왕자님께서 너한테 그렇게 잘해주신다면서. 난 언제 그렇게 좋은 남자를 만나려나.”

“헤센 왕자님만 한 남자가 또 어딨겠어, 몸 좋고, 잘생기고, 자상하신데 심지어 미르유 너만 엄청 사랑하신다며.”

무엇보다 미르유는 아주 평판 좋은 상냥한 아가씨였기에, 모두가 미르유의 행운을 마음 깊이 기뻐해 주었다.

친구를 떠나보낸 미르유에게, 다이아나가 물었다.


“새언니, 또 리본을 만지작거리고 있네요.”

“아아.”

미르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떼어냈다. 다이아나가 그런 미르유를 걱정스레 살폈다.


“역시 아직도 많이 힘드신 거죠? 가해자에게 사과도 받지 못했으니까.”

“……아니에요. 이제 전 그 애를 용서하려 해요.”

미르유가 힘겹게 웃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어차피 그 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저만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그러면 안 돼. 이번 기회에 사과를 받아내요.”

“하지만 그 애는 블란쳇 공작 부인인걸요.”

블란쳇 공작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였다.

로이엄 왕국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란 뜻이다.


“그러니 더더욱 이 사실을 알려야지요. 가해자가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아서 묻혔다는 게 말이 돼요? 심지어 이제 곧 사교계에 나설 것 같던데.”

다이아나가 미르유의 손을 잡고 강하게 말했다.


“블란쳇 공작이 올바른 생각을 가진 자라면, 진실을 알게 된 뒤 새언니가 아닌 부인에게 화를 내겠지요.”

“부담을 주고 싶진 않은데. 이미 오래 지난 일을 끌어올리는 게 맞나 싶어요.”

“하는 게 맞아요. 아니면 제가 먼저 끼어들어 그 이야길 꺼낼게요. 그러면 모든 책임을 다 제가 지게 될 거고요.”

자책하는 미르유를 볼수록 다이아나는 더 화가 났다.


‘새언니는 이렇게 착한데.’

입양된 주제에 신분 높다고 착한 새언니를 괴롭히고, 흉터까지 남긴 에스텔.


‘용서할 수 없어.’

기사 작위까지 받은 다이아나 공주는 정의로운 성격이었다.

기사인 그녀는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어차피 이번 파티에 초대할 사람은 다 내 친구들이에요. 모두 언니의 사정을 알고, 그 여자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도와줄 거예요.”

“고마워요, 다이아나.”

미르유는 감동받은 척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봐, 공작 부인이면 뭐 해.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손바닥에 가려진 미르유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이걸로 무사히 결혼할 수 있겠어.’

연합 왕국의 핵심인 로이엄 왕국.

이사벨라 왕비는 결혼식 이후 왕세자에게 국왕 자리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결혼하면 바로 왕비가 될 수 있다.


‘내가 왕비라니.’

부유하고 강력한 로이엄 왕국.

미르유만 바라보는 잘생긴 왕자.

그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시댁까지.

이제 모든 것을 행복하게 누릴 일만 남았다.

***

방금 전 벌어진 입맞춤은, 일종의 사고 같은 거다.


“이, 이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천재지변인 것이다. 내가 먼저 얼굴을 떼며 그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에스텔 리베르탄.”

요한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차가운 모습인데도, 난 그가 굉장히 초조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진짜 요한 같아.’

요한이 내 턱을 쥐며 물었다.


“왜 안 피했어?”

“……내가 피할 거라 생각했어?”

“…….”

요한의 목울대가 잠시 꿈틀거렸다.


“더 자극하지 마.”

나른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공존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도 신경 쓰였다.


“너한테 멍청한 짓 해버리기 전에.”

“어떤 멍청한 짓인데?”

“네가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지.”

젖은 상태. 가까운 체온.

차갑고도 다정한 그의 시선은 진심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요한의 두 손이 내 두 뺨을 감쌌다. 그가 피식 입매를 올려 웃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돼.”

“…….”

“잊어버리고 싶은 걸까? 다 잊어버릴까?”

순간에 젖어 그저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고 하고 싶었다. 과연, 요한에게 복수를 포기하도록 종용해도 괜찮은 것일까.

내게 올바른 선택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잊어달라고 하는 거다.


“아니, 아무것도 잊지 마.”

“뭔 줄은 알아?”

“모르지. 하지만 모든 걸 잊고 싶다는 요한이-”

나는 떨리는 요한의 붉은 눈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너무 괴로워 보이는걸.”

“…….”

“차라리 내가 계속 기억할게. 그게 무엇이든.”

요한이 나를 보며 손을 쥐었다가 폈다. 공허한 손에 무언가로 잡으려는 것처럼.


“너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다 아는 것처럼 굴어. 정말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하얗고 차가운 손가락이 내 입술 위를 덧그렸다.


“넌 뭘 숨기고 있을까?”

“요한.”

“왜 나한테 말하지 못하는 걸까?”

요한의 시선이 더욱 애틋해졌다. 그가 나를 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방금 전 키스, 사고라고 하려 했지?”

내 눈이 커졌다.


“그게…….”

“사고 맞아.”

뜻밖에도 요한은 가볍게 웃었다.


“성녀가 왔을 때 한 건, 위장 같은 거였고.”

정확히 내 생각을 꿰뚫어 본 말이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내 귓가를 매만지다 입술을 쪽 맞췄다.


“이건 사고 같은 거 아냐.”

나는 벌게진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뭔데?”

“내 흑심.”

요한의 붉은 눈이 오만하게 빛났다.


“마음 준비해 둬.”

“…….”

“뭐가 됐든, 난 알아야겠어.”

요한이 집착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감추고 싶은 것도, 너조차 몰랐던 것들까지. 하다 못해 네가 흘린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전부.”

나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왠지 요한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내 귀에는 요한이 해준 모든 말이,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

***

다음 날, 로이엄 왕국의 다이아나 공주가 내게 초대장을 보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