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나도 젖어버렸네
(5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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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나도 젖어버렸네
2022.06.21.
파티장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악사들조차 내 심기를 거스를까 연주를 멈추었다.
나디아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부인. 맹세컨대 그런 의도는 없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대놓고 연합 왕국 귀족과 틀어지는 건 내게 좋은 일만은 아니다.
연합 왕국 쪽에서 나를 더욱 어려워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까다로운 존재가 되는 게 나아.’
어차피 다들 나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만하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러면 거래할 상대로도 여겨지지 않을 테니까.’
그때 파티의 주최자가 나섰다. 로이엄 왕국의 테밀러 상단주였다.
“블란쳇 공작 부인,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파티의 주최자로서 큰 책임을 느낍니다.”
나디아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테밀러 상단주를 바라봤다. 하지만 테밀러 상단주는 나디아의 구세주가 아니었다.
“모르스 영애, 부인께 다시 정식으로 사과하십시오.”
그럴 수밖에.
여기서 내가 더 크게 트집 잡으면, 데펩 왕국에서 로이엄 왕국까지 불이 번질 수 있다.
나디아가 무척 당황해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 전 그냥…….”
“이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릅니까? 연합 왕국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 제국의 손님께 무례한 언사를 보이다니.”
테밀러 상단주가 강경하게 나왔다.
“데펩 왕국 측에서 영애를 벌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서 부인께 자비를 구하십시오.”
결국 나디아는 눈물이 그렁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데펩의 나디아 모르스가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제 불편한 언사로 부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여…….”
파티장은 불편한 공기가 가득했다.
나는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나디아가 안쓰러워졌다.
‘먼저 잘못한 건 저쪽이지만…….’
어차피 나디아 혼자서 날 험담했던 것도 아니다.
물론 나디아와 함께 수군거린 영애들은 내 눈치를 살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교계에서 문제가 생기는 건 나디아 하나뿐일 거다.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회복하기 어렵겠지.’
제국에 가자마자 말썽을 부린 귀족 아가씨가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려울 테니.
‘이쯤이면 됐어.’
테밀러 상단주가 나디아의 사과에 이어 다시 사과할 때였다.
“공작 부인, 죄송합니다. 이 잘못에 대해 벌이나 배상을 바라신다면…….”
“그럴 필요 없어요.”
“……네?”
나디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난 영애가 진심으로 사과한 것으로 만족해요.”
주변의 귀족들조차 헛숨을 들이켰다. 나는 태연히 나디아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애초에 과도한 벌을 바란 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모르스 영애는 이번에 제국에 처음 왔지요?”
나디아는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지.’
아무리 뒷말을 모른 체한다는 게 귀족의 관습이라지만, 세상일이 관습대로 돌아갈 리 없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래서 대부분은 뒷말을 하면서도 자중하는데, 나디아는 무척 미숙하게 대놓고 일을 저질렀다.
“제국의 사교계는 엄격한 곳이에요. 때론 별것 아닌 것 같은 말실수도 큰 문제가 되고는 하죠.”
“……예. 부인.”
“이번 일로 모르스 영애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면 됐어요.”
큰일 한 번 겪었다고 피곤이 몰려오는 기분이다.
나디아가 감격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정말 이 정도로 되겠습니까?”
테밀러 상단주의 말에 나는 작게 끄덕였다.
“그럼요. 되도록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어가면 더 좋겠어요.”
“……정말입니까?”
“다만 좀 피곤하니, 휴게실에서 쉬고 싶네요.”
파티를 망치지 않을 수 있어서인지 테밀러 상단주가 내게 감사를 표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호감을 사둔 거겠지?’
나는 휴게실에 도착해서 기지개를 켰다.
테밀러 상단주는 나를 직접 휴게실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주최자인 테밀러 상단주인 저 역시 부인을 위해 따로 보상하고 싶습니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해줬다.
‘나중에 테밀러 상단주를 불러서 친분을 더 다지면 되겠어.’
그 정도면 오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
‘예상외로 일이 좀 쉽게 풀렸어.’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좀 있었다.
‘연합 왕국들의 적의는 이해가 안 가.’
그들이 내게 보였던 태도는, 소문 속의 악녀를 넘어 적을 대하는 것에 가까웠다. 연합 왕국과 관련된 적도 없는데.
그때 누군가 휴게실 문을 두드렸다.
“쉬시는 중에 죄송해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나디아였다.
‘설마 또 시비를 걸러 온 건 아니겠지?’
피곤한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나디아는 수줍은 미소로 쭈뼛쭈뼛 내 옆으로 다가왔다.
“블란쳇 공작 부인, 공작 부인께 다시 사과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다시 사과를요?”
“예. 다시 생각해도 제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제 사과를 받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나디아 입장에서는 꽤 고마울 만했다.
‘제국과 문제 일으킨 영애란 꼬리표는 떼기 어렵지.’
그래도 그녀는 단둘이 있는 자리까지 사과하러 왔다.
그건 용기 있는 행동이다.
특히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한 뒤라면 더더욱 그랬다. 나는 주춤주춤 다가온 나디아의 손을 붙잡았다.
“난 영애가 자신의 실수를 반성한 것으로 충분히 괜찮아요. 그러니 이제,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 봐요.”
“…….”
“방금 전 일을 수습하려면 할 게 많을 거 아니에요.”
느릿하게 깜빡거리던 나디아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울지?’
베티도, 에리히도 요즘 들어 내 앞에서 우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문제는 왜 우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나는 나디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물었다.
“왜 울어요? 설마 아까가 억울해서는 아니겠죠?”
“아, 아니에요. 이 파티의 주최자님께서 제 대부님이시라 상관없어요.”
……테밀러 상단주가 네 대부님이었니?
‘어쩐지 너무 고마워하더라.’
대녀의 체면을 살려줘서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냥, 제가 너무 나빴던 것 같아요. 제가 부인에 대해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증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멋대로 험한 소리를 했어요.”
나디아가 나를 울망울망 바라봤다.
“부인께서 이렇게 착하신데, 왜 미르유는 그런 말을 했을까요?”
“미르유? 미르유 쥬팃?”
“아, 맞아요. 사실 제가 연합 왕국에서 미르유와 절친한 사이였거든요. 그래서 부인께 더 못되게 굴고 싶었나 봐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이름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미르유 쥬티.’
가슴이 선득해졌다.
***
미르유 쥬티.
리베르탄 공작가와 친해지기 위해 굽신거리던 가문 중 하나였다.
특이했던 점은 쥬팃 남작이 뭔갈 착각하고, 어린 내 놀이 친구랍시고 미르유를 리베르탄에 들여보냈다는 거다.
‘보통 외부인이 오는 걸 철저하게 막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르유는 몇 번이고 리베르탄에 놀러 올 수 있었다.
난 미르유가 너무 좋았다.
미르유와 만날 땐 단둘이 남겨져 있어서, 괴롭힘을 받지 않았다. 감금당할 때도 풀려났고, 굶던 와중에도 다과를 먹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몹시 그리웠다.
그래서 미르유와 너무 친구가 되고 싶었다.
‘친구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미르유는 달랐던 모양이었다.
“너는 좋겠다, 이런 귀한 간식도 마구 먹을 수 있고.”
“……나도 네가 올 때만 먹을 수 있어.”
나는 겨우 용기 내어 그 애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동안 공작 부인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형벌방에 갇혀 있었거든. 그래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
그때 미르유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부럽다.”
“응?”
“더러운 평민인데…… 너무 특별해 보이는걸. 있잖아, 다른 일은 또 없었어?”
미르유는 내가 리베르탄에서 겪었던 학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이제 친구가 생기는 걸까?’
나는 털어놓을 곳이 생겼다는 게 기뻤다.
하지만 그 애는 그런 내게 실망했던 건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
“마님. 도착했습니다.”
방금 전 파티장에서 출발한 것 같은데, 어느새 블란쳇 공작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 스치는 미르유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네가 특별한 줄 알지?’
완전히 틀어진 이후로 미르유는 리베르탄에 오지 않았다.
‘결혼 전까진 바깥소식을 듣지 못했고.’
마지막에 그 애가 했던 거짓말이 너무 커서, 지레 찔려서 오지 않는 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미르유는 전부터 밖에다 온갖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난 사람들이 그냥 날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왠지 저택 안에 바로 들어가기 싫어서 정원 근처를 걸었다.
‘오늘도 조금 더 자랐네?’
운디네 티어를 심어둔 에덴 로즈.
그 장미 덤불 사이로 다른 에덴 로즈보다 큰 에덴 로즈 몇 송이가 자라고 있었다. 내 주먹 두 개보다 더 컸다.
-정령력을 받아 크고 있는 거다.
-조금 더 지켜보면, 좋은 일이 생길 게다.
좋은 일이라는 말에 매일 성실하게 꽃을 살피는데, 크기가 자라는 것 빼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아니다. 에리히가 장미에 찔리는 일도 있었지.’
처음 에덴 로즈가 피었을 때 에리히가 먼저 나서는 일이 있었다.
‘마님. 위험할 수 있으니 제가 먼저 만져보겠습니다.’
갑자기 예리해진 장미 가시에 찔려 피가 났고, 그 모습을 보던 레이몬드는 ‘에리히, 기시감이 든다. 저도 전에 겪은 것 같은데……’ 하며 중얼거렸다.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던 그때 일을 떠올리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미르유에 대해선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도대체 나와 관련해서 어떤 거짓말을 하고 다녔는지.
그때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파티에는 잘 다녀왔어?”
“요한?”
요한이 내 턱을 잡고 표정을 샅샅이 살폈다.
“어떤 놈이야?”
다짜고짜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잘 해결한 나디아에게 불똥이 튀면 안 된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네 표정은 무슨 일이 있어 보이는데?”
“없었다니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요한은 가벼운 한숨을 흘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남편으로서 네 기분을 좀 바꿔줘 볼까?”
“내 기분?”
내가 눈을 깜빡거리자, 요한이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우리 약속한 게 있잖아.”
……무슨 약속이었지?
***
바로 내 발을 씻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왠지 낯부끄러웠지만, 요한과 약속한 걸 어길 수는 없었다.
다행히 방에서 둘이서만 하기로 했지만, 어쩐지 둘만 있어서 더 위험한 것 같았다.
“부인.”
일단 요한은 의자에 앉혔다.
의자 뒤에 푹신한 쿠션을 대어 느슨하게 등을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다음 천천히 물을 끼얹으며 발을 씻기기 시작했다.
“물은 어때? 괜찮아?”
“딱 맞아.”
요한이 내 발 위에 세심하게 물을 얹었다.
발가락 사이에 요한의 손가락이 들어갔다. 핏줄이 선명하게 솟은 큰 손이 섬세하게 내 발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을 둥글게 굽혀서 발가락 마디마디를 둥글리며 쓸어내린다. 상냥하지만 어딘가 억누르는 듯 억제된 몸짓이었다.
‘이상해.’
발이 원래 내가 아는 발이 아니게 된 것처럼 묘한 감각이 자꾸만 올라와 자극했다. 찌르르한 감각에 허벅지와 종아리가 당겨왔다.
“어디 불편한 건 아니지?”
“어색하긴 해.”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만 났다.
“흐음.”
요한은 뼈대가 단단하게 솟은 손아귀로 내 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요한이 내 발목에 입을 가까이 댔다.
그의 숨결이 닿기도 전.
요한이 붉은 시선을 올려 나를 보고, 예쁘게 눈웃음지었다. 이내 붉은 혀를 빼 천천히 혀로 적시기 시작했다.
낯선 감각이 발목 사이를 치고 들어왔다.
뜨겁고도 말캉한 입술이 발목 위에 낙인을 찍는 것 같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족쇄를 달 듯.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빼기 위해 발을 움직였지만, 요한의 억센 힘 때문에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 손을 확 잡았다.
요한은 계속해서 내 손가락을 빨고, 혀로 손 사이를 문지르고, 짓누르다가 빠져나와 보란 듯이 집요하고도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갈증이 난 사람처럼.
“요, 요한! 지금 뭐 하는-”
그는 내 말에 멈춰주지 않았다.
연한 손목 안쪽의 살이 뭉근하게 핥아 올려졌다.
요한이 부드럽게 젖은 목덜미를 뭉개다가, 쇄골을 길게 핥아 내렸다.
“나도 젖어버렸네.”
그 상태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동자로부터 정욕과 갈망이 마구 흘러나왔다.
특히 맨살이 닿고 있어서인지 더욱 그 감정이 진하게 전해졌다.
요한은 핏줄이 보이는 부분에 천천히 입 맞췄다. 그리고 차근차근 입술로 다시 내 쇄골 안쪽을 맛보았다.
연한 피부 위를 혀가 따듯하게 적셨다. 그대로 목으로 올라갔다.
버거울 정도로 아찔했다.
“리베르탄 공작가의 처형을 미뤘어.”
그가 목 가까이에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너를 위해서.”
나는 흠칫 굳어 요한과 시선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