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나랑 결혼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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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나랑 결혼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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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나랑 결혼해줘
2022.06.17.
신관들은 성녀를 대신해 어색하게 변명하고 떠났다.
‘성녀님께서 오늘따라 몸이 몹시 좋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부디 너른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아마 신성력을 무리하게 사용하시어 최대한 빨리 신전으로 돌아가시려는 모양입니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성녀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몸이 힘들어서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저런 식으로 주인한테 인사도 없이 떠나는 손님은 처음 봤다.
요한이 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에스텔, 나 봐야지.”
다시 잘생긴 그 얼굴을 보고 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꾸 요한의 입술을 힐끔 보게 됐다.
‘평소보다 촉촉해 보이는 게…….’
방금 전 뜨거웠던 키스가 떠올랐다.
요한은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혀로 입술을 살짝 축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반지를 낀 내 손을 깍지를 껴 잡았다.
“우리 정식으로 결혼식 올릴까?”
“……결혼식을?”
“사정상 결혼식을 하지 못했잖아. 좀 아쉽기도 하고.”
반지만으로도 충분히 기대했던 내 마음이 더 크게 반응했다. 머릿속에서 두 가지 충동이 번갈아가며 싸웠다.
‘이미 원작은 달라졌어. 너는 진짜가 된 거야.’
‘순진하긴. 그동안 사람들에게 계속 배신당하고, 버려졌잖아. 그러고도 또 믿고 싶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한 이목구비, 단단하게 다져진 몸과 나른함과 단정함을 오가는 특유의 분위기까지.
그는 내가 탐내서는 안 될 보물처럼 근사했다.
가끔 난 그를 넘보는 것 자체로 죄를 짓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미 부부 생활도 했는데, 나중에 결혼식을 올려도 되는 걸까?”
일반적으로 우리 같은 경우가 잘 없거니와, 부부 생활 후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내가 하고 싶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
“법으로 금지되어 있더라도 널 위해 식을 열어줄게.”
요한의 눈빛이 진심처럼 강렬했다.
“요한도 우리가 결혼식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워?”
그가 다른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었다.
“벌써 상상돼. 네가 내가 고른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붉은 카펫을 걸어 내게 오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림 같은 결혼식이 상상됐다.
“화동들이 뿌리는 꽃비가 떨어지고, 악단이 연주하는 우아한 음악이 흐르겠지. 손님들은 우리를 보고 감탄하기 바쁠 거고.”
“…….”
“나는 네 손을 잡고 신관 앞에서 맹세하겠지. 영원히 너와 내가 함께할 것이라고.”
“…….”
“넌 어때?”
“……상상만 해도 좋다.”
요한의 모습 위로 검은 턱시도를 입고 있을 그가 겹쳐졌다.
‘이게 욕심일지 몰라도.’
나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물었다.
“그런데 내가 부를 손님이 없어서 어떻게 하지?”
“내 결혼식인데, 누구든 오고 싶어 난리 칠걸.”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요한이 내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입술이 무척 뜨거웠다.
우아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우리 결혼하자, 에스텔.”
“…….”
“나랑 결혼해줘.”
요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청혼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심장이 말도 안 되는 충동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감동으로 가득한 와중에도, 머리는 이상하게 냉정해졌다.
‘……왜 요한은 내게 사랑한다고 하지 않을까?’
그토록 소중히 대해주고, 안주인의 상징인 반지도 주고, 청혼까지 하면서.
‘유난히 사랑한다는 말을 피하고 있어.’
이번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요한과 함께 지내며 은근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듣기 위해 유도한 적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은 계속 사랑한다는 말을 피했지.’
요한의 진심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된다.
그때는 다른 말로 적당히 돌려서 회피할 수 없을 거다.
청혼하는 요한의 얼굴 위로 원작의 내용이 겹쳐졌다.
에스텔은 떠나는 요한에게 애타게 울며 매달렸다.
‘공작님. 어떻게 하면 저를 사랑해 주실 건가요?’
요한은 그런 내 손을 발로 밟으며 귓가에 우아하게 대답했다.
‘벌써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그게 무슨.’
‘아아.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게.’
요한이 내 턱을 붙잡고 냉소했다.
‘난 너한테 복수하기 위해 결혼했어. 널 가지고 놀다 버리려고.’
심장을 찌르는 냉정한 목소리.
‘그동안 연기하느라 제법 재밌었는데, 넌 더 오래 가지고 있다 버릴 수 있을 줄 알았어.’
‘전부…… 연기였다고요?’
‘아니겠어?’
요한은 악귀처럼 웃었다.
‘애초에 내가 너 같은 걸 사랑할 리 없잖아.’
그 진실은, 내가 먼저 그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너를 믿고 싶어.’
하지만 함부로 너를 믿어도 될지 모르겠어.
‘사랑한다는 말뿐만이 아니야.’
요한은 복수에 대해서도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부풀어 오르는 희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배시시 웃으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요한, 청혼이 조금 늦은 거 알지?”
“나도 알아.”
“하지만 그래도 기뻐.”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해놓고 있으면 돼.
그렇게만 하고 있으면…… 계속 요한의 옆에 있어도 될 거야.
***
성녀가 떠난 후, 나는 헨리 씨를 비롯한 여러 의사에게 진찰받았다.
특히 그때 곁에 있던 페트리샤가 아주 강경했다.
“주인님. 다른 마도구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한 번 더 마님을 진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 친해졌는지 베티나 에리히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어떤 문제가 생기신 걸지도 몰라요. 마님께선 아프셔도 참으시거든요.”
“충분히 동의합니다. 주인님께서 명하신 마도구와 의사들도 모두 도착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나는 검진을 위해 진료실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괴상한 마도구가 쌓여 있었다. 나는 주치의 헨리 씨에게 물었다.
“저 마도구들은 다 뭔가요?”
“환자를 진단할 수 있는 마도구란 마도구는 전부 수집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정확한 진단이 나올 겁니다.”
의료용 마도구는 6개 정도였다. 첫 번째 마도구가 내 몸의 전반적인 상태를 체크했다.
“전반적으로 몸이 약하긴 하지만,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수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정상이니까.’
하지만 두 번째부터 오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님께선…… 기운의 흐름이 마도구로 검진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그래프가 출력되는데, 마님께선 아예 그래프가 나오지 않습니다.”
“…….”
“이럴 수가! 다른 마도구로도 나오지 않다니. 어째서…….”
의료용 마도구 3개가 연달아 망가졌다.
‘이제 마지막인가?’
마지막 마도구는 모자처럼 생겼다. 헨리 씨가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마도구를 머리에 씌워주며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제발…….”
베티는 두 손을 모으며 기도했다. 너무 심각해서 괜히 뻘쭘해졌다.
‘언제 끝나려나…….’
삐빅- 삐비빅! 삑!
범상치 않은 경고가 터졌다.
갑자기 헨리 씨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마도구와 연결된 어떤 판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 쓰레기 같은 마도구!”
“결과가 어떻길래요?”
“이 마도구가 고장 난 게 틀림없습니다. 최신 마도구라기에 구매했는데…….”
헨리 씨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멍청한 기계가, 마님께서 인간이 아니라지 뭡니까.”
“뭐라고요?!”
베티가 버럭 화냈다.
“그러면 뭐예요? 마님께서 인간이 아니시면 뭐냐고요! 아무리 마도구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 마도구를 판 놈들에게 따져야 할 것 같습니다. 마님, 너무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맞아요. 인간이 아니라니, 그런 모욕이 어디 있어요.”
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 마도구…… 너무 정확한데.’
마도구의 판 위에 붉은 원이 깜빡였다. 붉은 원을 보고 있는 와중에도 베티가 날 위로하기 위해 애썼다.
“저 마도구가 말하는 건 이런 거 아닐까요? 마님께서 인간이 아닐 정도로 아름답다고요.”
“으응.”
“저도 가끔 마님을 보면 인간이 가질 아름다움이 아니란 생각을 하곤 하거든요. 어쩌면 마님께선 전설 속 천사나 요정이 아닐까 하고요!”
사실 베티야, 나 요정 맞아.
판을 주워 든 헨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에서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이런 반응이 계속 나오는 거지?”
“그건 또 뭔데요?”
“……붉은 원이 계속되는 건 흑마법사의 저주나 죽음의 기운 같은 걸 의미합니다.”
이 마도구가 내 저주도 감지했다고?
“……죽음의 기운은 어떤 건가요?”
“남은 수명을 알려줍니다. 죽음의 기운이 강할수록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놀라 마도구를 보자, 마도구에서는 여전히 붉은 신호가 삐빅 울렸다.
헨리 씨가 내 손을 애틋하게 붙잡았다.
“평범한 귀족 영애셨던 마님께서 저주 같은 걸 받으셨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래요?”
“예. 보통 수명을 확인할 수는 없는데 마님께선 희귀병을 앓고 계셔서 수명이 진단된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정도 반응이라면.”
헨리 씨는 내 앞에서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마님의 수명은 1-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마님. 이 헨리 한슨! 그 안에 꼭 마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너무 비장해서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이, 일 년이면 뭐예요. 우리 마님.”
어느새 엉엉 울기 시작한 베티가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 마님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이제 행복해질 수 있는데.”
끼이익-
천천히 열리는 문 뒤로 하얗게 질린 에리히와 레이몬드가 보였다.
에리히는 참담하다는 얼굴로 눈을 꼭 감았고, 레이몬드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거, 거짓말이지?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사실일 거다.”
“이럴 수가.”
레이몬드가 요란하게 벌떡 일어났다.
“주군께 빨리 보고드려야 해!”
“레, 레이몬드 경. 잠깐만요!”
“마님! 주군을 모셔오겠습니다!”
이 사람들아. 나 멀쩡하단 말이야!
-아가야, 수습하기는 그른 것 같다.
-그러다 다 탄로 나면 어떻게 해요?
-네가 언제 속인 적 있니? 저들끼리 알아서 오해한 거지.
내 귀로 나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쯤 되었으니, 난리 난 반응을 즐겨보렴. 너 때문에 저택이 발칵 뒤집히는 걸 보는 것도 아주 재밌을 거다.
……그게 되겠어요?
‘역시 답은 이민인가.’
요한이 내려올 때까지, 난 진지하게 도망 계획을 고민했다.
***
여름 축제가 한창 준비되고 있었다.
여름 축제는 거국적 축제인 만큼 제국과 인접한 왕국의 손님들도 초청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마차가 아름다운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소용돌이치듯 별을 감싼 파도 문양.
연합 왕국의 중심이자 실세인 바다 왕국 로이엄.
마차 안에서 여자 하나가 활기차게 뛰어내렸다. 로이엄 특유의 갈색 피부와 초콜릿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였다.
로이엄 공주, 다이아나.
“새언니, 정말 이렇게 제국에 다시 돌아와도 괜찮아요?”
다이아나가 걱정스럽게 자신의 새언니를 살폈다.
“제국에선 안 좋은 기억밖에 없을 텐데. 그러다 또 그 여자랑 마주치면 어쩌려고…….”
흰 피부에 밀색 머리카락, 오렌지빛이 도는 헤이즐넛색 눈동자.
다이아나의 고운 새언니가 친절히 웃었다.
“네, 괜찮아요. 전 오랜만에 고향인 제국에 와서 좋아요.”
“맞다, 새언니는 내내 제국을 그리워했었지.”
다이아나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그 미친 악녀 때문에 피해자인 새언니가 힘들어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다이아나. 너무 성내지 말아요.”
“새언니는 잊을 수 없는 흉터를 얻었는데! 그 악녀는 사과 한마디 없이 뻔뻔하게 잘살고 있고!”
다이아나는 흥분해서 씩씩거렸다.
“리베르탄이 반역죄로 잡혀가서 업보를 치르나 했더니,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되어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니.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난 괜찮다니까. 다 용서한 일이에요.”
“제가 괜찮지 않아요! 그 여자, 만나기만 해봐. 내가 가만있나.”
그때 로이엄 왕비가 엄하게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어머니!”
“무슨 일이 됐든 네 행동에 로이엄이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지.”
로이엄 왕비는 안쓰럽게 웃고 있는 며느리의 손을 붙잡았다.
“새아가, 너무 걱정 마라.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니나 로이엄 역시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넌 우리 식구지. 난 우리 식구가 힘든 걸 두고 보지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그래도 전 아직 헤센과 결혼하지 않았는데…….”
“며칠 뒤가 결혼식이면 이미 식구나 다름없지.”
왕비의 자상한 말에 며느리는 감동받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왕비는 그런 며느리를 더 안쓰럽게 여기며 토닥였다.
곧 로이엄 왕국의 왕비가 될 신데렐라, 미르유가 긴 속눈썹을 깔았다.
‘반역죄로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리베르탄의 가짜는 운 좋게 공작 부인이 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행히 제국은 여전히 에스텔을 희대의 악녀라 불렀다. 그녀가 왕세자비가 되기 위해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였다.
‘……내 거짓말이 들킬 리 없어.’
미르유는 로이엄 저택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아무도 걜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미르유의 손은 불안한 듯 목을 감싼 초커를 만지작거렸다.
***
나는 화려하게 꾸민 채 파티장에 도착했다. 다들 내 안전을 너무 걱정해서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수명에 대해 오해하고 난 뒤, 내 부탁을 전부 들어줬다는 거다.
덕분에 요한 없이 혼자서 파티에 올 수 있었다.
‘연합 왕국 파티라…….’
이 파티는 제국에 도착한 연합 왕국 상단 귀족들끼리 가벼이 만나는 자리였다.
‘연합 왕국 상단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기엔 딱이지.’
연합 왕국으로 도망치면 제국이라도 쉽게 건드리지 못해 찾기 어려울 테고, 바다로 나간다면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연합 왕국 귀족과 친분이 있다면, 양해를 구하기도 쉽겠지.’
그러니 오늘 연합 왕국에 대해 최대한 알아두는 게 좋았다. 친분을 구하면 더 좋고.
파티장의 연합 왕국 귀족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런 반응은 무척 익숙하다.
하지만 귀족들이 날 힐끔거리기만 할 뿐,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없어서 어색하게 서 있어야 했다.
‘여긴 상단 귀족들 중심이라 실리적으로 움직일 줄 알았는데.’
내 소문이 소문인지라 대놓고 인사하러 오긴 그런 모양이다.
‘그래도 파티 주최자가 인사하러 오겠지.’
그때 뭉쳐 있던 영애 중 한 명이 내게 들리도록 ‘저 악녀가 왜……’ 하고 속삭였다.
“연합 왕국에선 본인의 악행을 모르는 줄 아는 걸까요? 정말 뻔뻔하게…….”
나는 우아하게 그 영애를 향해 한 발자국씩 걸어갔다.
처음엔 모른 척하려던 그 영애도 점차 다가오는 나를 보며 얼굴이 하얘졌다. 내가 그녀의 앞에 도착하자, 그 영애가 고개를 숙였다.
“블란쳇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전 데펩 왕국의 나디아 모르스입니다.”
“반가워요, 모르스 영애. 죄송한데, 모르스는 어떤 가문이지요?”
“데펩 왕국의 백작가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다른 왕국의 사정은 잘 몰라서요.”
나는 나디아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런데 영애께선 날 아주 잘 아시나 봐요?”
“아, 그건…….”
나디아가 치맛자락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 공작 부인께서 들으시기에 다소 힘든…….”
나는 곤란하게 입술을 깨문 나디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돼요, 영애. 그렇게 무턱대고 바로 사과만 하면 내가 영애를 오해할 수 있잖아요.”
“…….”
“데펩 왕국이 제국을 무시하려 했다거나…….”
내가 흘린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더욱 크게 술렁거렸다. 난 그런 반응을 보며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물론 농담이에요.”
“…….”
“아니게 될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