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숨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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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숨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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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숨 쉬어
2022.06.14.
난 스텔라의 표정이 흐트러진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성녀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순수하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빛마저도 성녀를 걱정하는 것처럼.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신가요? 갑자기 식기를…….”
“아, 그러게요.”
스텔라는 놀란 듯 흐트러진 표정을 수습했다.
“언제 식기를 떨어뜨렸지? 두 분의 그림 같은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졌나 봐요.”
스텔라가 서둘러 식기를 주워 들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좋은 시간을 방해해 버렸네요.”
식사 중에 식기를 떨어뜨리는 건 품위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예외적인 상황인 만큼 넘어가기 좋은 변명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나는 스텔라를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면 제가 성녀님께 부탁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제게요?”
“네, 지금 성녀님만이 들어주실 수 있는 부탁이거든요.”
스텔라는 걱정스러운 듯 눈썹을 모았다.
“제 입장이 있다 보니 멋대로 부탁을 들어드릴 수는 없어요.”
“성녀님께서 힘드시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자애로운 성녀는 남의 부탁을 멋대로 거절하지 않는다.
‘스텔라는 그린 듯한 성녀님이시니…….’
스텔라가 신관의 눈치를 힐끔 보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부탁해 주세요. 어떤 부탁이신가요?”
난 예쁘게 웃는 얼굴로 스텔라의 선물을 돌려주었다.
“이 성물 대신 성녀님께서 저희 두 사람의 미래를 축하해 주세요.”
성녀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네?”
“저를 걱정해 주신 마음은 알지만, 성물은 너무 귀한 선물인걸요. 저보다 더 필요하신 분들이 있을 거예요.”
반지 낀 손을 자연스레 식탁 위에 올리며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전 이 성물보다, 성녀님께서 지금 이 뜻깊은 순간을 축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성녀님께 축하를 받으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아요.”
스텔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입가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요한이 반지 낀 내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물었다.
“그런 축복 없어도 상관없지 않아?”
“하지만 결혼식에선 다 신관의 축복을 받잖아.”
나는 새 신부처럼 배시시 웃었다.
“성녀님께서 축하해 주시면, 우리가 올리지 못한 결혼식을 하는 기분이 날 것 같아.”
“결혼식 하는 느낌이라…….”
요한이 잠시 생각에 잠긴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가 선뜻 주었던 선물을 다시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래도 잡을 수밖에 없을걸?’
방금 전 식기를 떨어뜨린 스텔라의 변명이 적절했듯, 내 핑계 역시 적절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선의로 준 선물을 거절했다고 딴소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래도 부인을 위해서 준비한 선물인데…….”
“물론 제게 있으면 좋겠지만, 전 지금 성녀님의 축복을 받는 게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지금처럼 운명적으로 성녀님이 계시기도 어려운걸요.”
모름지기 성녀라면, 축복 기도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그건 신성력이 드는 것도 아니라 힘들다는 핑계도 대지 못하지.’
나는 스텔라의 얼굴을 걱정스레 살폈다.
“성녀님께 무리한 부탁이었을까요. 죄송해요.”
가만히 있으면 축하해 주기 싫은 사람처럼 보일 텐데.
‘그러다 내가 오해해서, 이상한 소리를 해버리면 어쩌려고?’
스텔라가 불안한 듯 성물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
노을이 느지막이 기울어진 시각.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감옥에서 처형대로 옮겨졌다.
본디 반역죄는 제국민의 앞에서 공개 처형을 하는 게 법도였다. 하지만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처형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공식적으로는 제국민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황제는 미리 알고 있었다.
비밀리에 처형하는 이유는, 블란쳇 공작이 그들을 공식적으로 처형시켜 없는 신분으로 만들기 위함이란 사실을.
사형대에 매달린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이,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에스텔, 에스텔을 불러줘. 우리가 이러고 있다고-”
발버둥 치는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보며, 사형 집행자가 히죽 웃었다.
“너무 걱정 마시오. 불에 타다 보면 그런 잡생각도 깡그리 사라지게 될 터이니.”
“우리는 이렇게 죽을 사람이…….”
“다들 그러지. 죽기 직전에는.”
집행자가 그들에게 발치에 불을 붙이려던 순간.
“나중에는 차라리 죽여달라 비명을 지르게 될 거요.”
‘블란쳇 공작의 명으로 생명이 끊기기 직전에 저절로 꺼지게 되어 있다지만.’
그전까지 전신이 불타는 고통을 느끼게 될 거다.
“걱정 마시오.”
집행자가 히죽 웃으며 두 사람의 발치에 불을 올리려던 순간.
“중지하라!”
멀리서 황제의 전령이 달려왔다.
“처형을 멈춰라!”
***
스텔라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분홍색 입술을 오물거렸다. 신관이 스텔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두둔했다.
“성녀님.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습니까?”
스텔라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힘겹게 입매를 들어 올렸다.
“티가 많이 났나요?”
“성녀님도 참, 당연히 티가 나지요.”
“최대한 애쓰려고 했는데…….”
반달처럼 둥글게 휘어지는 스텔라의 눈매에서 가련함이 묻어났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원래도 자주 아프신 분이신데, 휴식 중에도 괜한 사람 때문에 신성력을-”
신관이 노기에 차올랐다가 흠칫 입을 다물었다.
내 옆에 있는 요한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은 말없이 붉은 눈으로 신관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신관이 요한을 보며 어물쩍 말을 마무리했다.
“아무튼, 성녀님껜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 습니다.”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요한이 신관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왜, 계속 말하지?”
“아, 아닙니다. 저는 신관 보좌로서 성녀님의 걱정하는 마음에.”
요한은 빈정거리듯 오만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계속 지껄여 봐, 자신 있으면.”
신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베르토 신관 일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반응을 봐선, 충분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니.’
난 오히려 그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 순간, 스텔라가 신관을 두둔하며 나섰다.
“부인의 부탁대로 두 분의 앞날을 축하해 드리고 싶어요.”
스텔라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두 분께 행복이 이어지길 바라요.”
스텔라가 가냘프게 긴 속눈썹을 내리깐 순간, 요한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강렬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시선이 열기를 품고, 내 입술을 탐내듯 훑었다.
그러자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찼다. 요한이 픽 웃으며 한 손으로 내 뒷목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요한의 잘생긴 얼굴이 가까워졌다.
“조금만 참아.”
모든 게 눈 깜빡할 순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요한의 단단한 엄지가 야릇하게 내 턱 언저리를 쓸어내리며 얼굴 각도를 맞췄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 걸 본 찰나.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이, 이렇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캉한 것이 침범했다.
상상한 적도 없던 자극이었다. 요한의 숨결에 내 얼굴마저 뜨거워졌다.
입안에 들어온 요한이 내 안을 농밀하게 휘저으며,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던 곳을 애태우듯 문질렀다.
나도 모르는 묘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전혀 상관도 없는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놀라서 요한의 양어깨를 손으로 붙잡았다.
요한은 나직한 웃음소리를 내며, 바깥의 치열부터 더 깊숙한 곳까지 제 것으로 물들였다. 빠르다가도 느릿해져 나도 모르게 점점 애달아졌다.
그건 요한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요한이 내 뒷머리를 세게 쥐며, 잡아먹을 듯이 강하게 내 호흡을 삼켰다. 아득해지는 느낌에 어깨를 잡은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요, 요……한.”
내가 밀어내려고 한다고 착각했는지, 요한이 더 강하게 나를 붙들고 탐했다.
당장 잡아먹힐 것처럼 아찔한 자극.
부드러운 입술이 능수능란하게 움직여 내 감각을 모두 지배했다.
요한은 내 모든 숨을 빼앗았다가, 장난치듯 숨을 불어주었다. 요한의 존재감이 구석구석 나를 지배했다.
발끝까지 짜릿해져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요한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그가 내어주는 자극에 나른해져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입술을 뗀 그가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엄지로 내 입술을 건드렸다.
“숨 쉬어야지.”
그제야 난 내가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서툴게 호흡하기 시작한 나를 귀엽다는 듯 끌어안은 그가 나른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직도 빠르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요한은 멀쩡한 걸까?
‘나만 이렇게…….’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스텔라에게 들리지 않게 물었다.
“……갑자기 키스를 왜.”
“네가 아쉽다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요한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래야 진짜 결혼식 같잖아.”
몽롱한 머릿속을 파고드는 요한의 저음.
쿵, 심장이 떨어졌다. 너른 등을 감싼 내 손가락 끝이 떨렸다.
“그러게. 진짜 결혼식 같다.”
나는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요한은 방금 전 키스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발그레하게 홍조가 돌아 아직도 숨을 헐떡이는 나와 너무 달랐다.
이상하게 속이 뭉그러졌다.
‘하지만 요한, 원래 사람은 가짜일수록 더 진짜에 집착하게 된대.’
너와 내가 진짜가 되어가는 건…….
‘이게 가짜라서인 걸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부끄럽다는 듯 스텔라를 보려던 순간-
스텔라는 얼굴을 살필 새도 없이 급히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내가 본 것은 휘날리는 화려한 금발뿐이었다.
쾅!
바람 소리에 닫힌 만찬장의 문이 닫혔다.
“서, 성녀님-!”
남은 신관이 당황해서 벌게진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
성녀는 급히 신전으로 돌아왔다.
“성녀님께서 몸이 좋지 않아, 신전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해두었습니다.”
“평소보다 신성력을 많이 사용한 겁니까?”
신관들은 평소보다 더 파리해 보이는 스텔라를 걱정했다.
스텔라는 다른 신관의 어깨를 머리를 기댄 채, 두 눈을 가련하게 감았다.
“전 괜찮아요, 뜻밖의 상황에 놀라서 더 그랬나 봐요.”
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께서 보시기엔 너무 과한 장면이었지요. 블란쳇 공작도 참, 성녀님도 계시는데 어찌 그리-”
“본디 신관 앞에서 맹세의 키스를 나누기는 하니…….”
“어허! 암만 그래도 순진하고 순수한 성녀님 앞에서 그러면 쓰나!”
신관은 놀란 성녀를 다독여주려 애썼다.
“아마도 결혼식을 하지 않아서, 정도라는 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성녀님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그때 스텔라가 순진하게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나요?”
“예. 정식 혼인을 하긴 했으나, 결혼식을 올리진 않았습니다.”
“……신전의 인준도 받았으면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신관이 아이처럼 순수해 보이는 성녀를 보며 자상하게 웃어주었다.
“글쎄요, 각자 사정이 있지만 제가 듣기론 당시엔 신전의 인준을 받을 마음이 없어서였다 들었습니다.”
“세상에.”
“사실 그래서 공작의 마음을 더 알기 어렵긴 합니다. 우리가 싫어서 일부러 청혼한 것인지, 아닌지.”
“…….”
“블란쳇 공작은 그 정도로 잔혹한 남자입니다.”
“…….”
“상대가 몰락한 집안의 영애이니만큼, 그가 원한다면 신전의 인준이라도 무효화시킬 수야 있을 테고요.”
신관은 순간 성녀의 푸른 눈이 섬뜩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내 착각이겠지.’
신전에서 곱게 자란 성녀는 고귀한 능력과 별개로 아직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다.
그 순수하고 고운 마음 덕분에 신께서 그토록 고강한 신성력을 허락하신 것 아닌가.
“블란쳇 공작이 안타까워요.”
성녀가 슬픈 듯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진짜 사랑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잘못된 방식으로 여자를 대하고 계신 거겠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신의 가호가 그분께 따라야 할 텐데…….”
그때쯤, 성녀의 마차가 신전에 도착했다.
신관들이 입구에서부터 성녀를 반겼다. 마차에서 내리는 성녀를 호들갑스럽게 보살폈다.
“성녀님, 블란쳇 공작가에서 불쾌하거나 힘든 일은 없으셨습니까?”
“블란쳇 공작 부인이 그렇게 악독하다던데…….”
“저번에 베르토 신관 역시 공작 부인의 가증스러운 수작에 큰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
성녀가 희게 질린 얼굴로 그들에게 웃어주었다.
“전 괜찮았어요. 조금…… 힘든 일이 있었지만.”
“신성력으로 자신을 치료해 주려 한 성녀님께 무어라 했단 말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됐어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이에요.”
성녀는 신관들의 우려에도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머릿속에 불쾌한 생각이 떠올랐다.
특히 자신의 것인 양 웃던 가증스러운 얼굴.
‘그럴 리가 없어.’
막 방에 도착하기 직전, 스텔라의 입가가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성녀님.”
그녀를 데려다주던 신관이 스텔라에게 물었다.
“다른 신관을 불러드릴까요? 정말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잠깐 쉬면 될 거예요.”
방 한가운데에는 큰 거울이 있었다.
거울 위로 아름답고 품위 있는 예스텔라의 모습이 비쳤다.
‘이렇게 된 이상 내 자리를 찾을 수밖에…….’
스텔라는 긴 속눈썹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사용인들의 존경도, 기사들도, 남편의 사랑도 모두 잠시 빌려줬더니.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
스텔라는 천천히 기도를 해주었다.
‘잠시 빌려 받은 자리인 줄도 모르고 착각하다니…….’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진정한 자격을 갖춘 건 예스텔라 자신뿐이니까.
성스러운 얼굴로 기도한 스텔라가 생긋 미소 지었다.
방금 전의 동요는 온데간데없이 평소처럼 나긋하고 아름다운 성녀의 모습만 남았다.
천천히 매무새를 다듬은 스텔라가 다시 방을 나섰다. 신관들에게 얘기해 둬야 할 일이 있었다.
“성녀님. 쉬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그때 신관 하나가 급히 스텔라를 찾았다.
“블란쳇 공작이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녀님께서 저택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항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
“앞으로 성녀라 할지라도 멋대로 블란쳇 공작저를 넘으려 들 경우, 피를 보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책임은 성녀는 물론 신전도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항의 서한을 쥔 스텔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