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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가짜를 진짜로 만들기로 했어 (55/182)


55화 가짜를 진짜로 만들기로 했어
2022.06.10.



 
성녀의 푸른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모두와 친구가 된다면, 제가 모두에게 행복을 선물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녀가 내뱉은 ‘모두’란 말 사이에서 요한 이야기가 사라졌다.


‘어떠한 흑심도 없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감정 상한 티를 낸다면, 남편한테 집착하는 예민한 여자가 되겠지.

성녀 옆에 있던 신관이 끼어들었다.


“성녀님의 신분이 있으니, 블란쳇 공작 부인과 같은 식사로 부탁드립니다.”

베티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어색하게 굳었다.

내가 나서려던 찰나, 페트리샤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블란쳇 공작가는 은인을 결코 소홀히 대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성녀님께서는 재료에 정성이 부족하거나 조리가 조금이라도 맞지 않은 요리는 잘 드시지 못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하는 어조였지만, 대접을 맡겨놓은 듯한 무례함이 느껴졌다.


“그러면 만찬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님께서는 만찬 준비를 위해 성녀님과 따로 움직이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페트리샤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양 고개만 끄덕이고,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을 살짝 주었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보겠지만.’

성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성녀를 에스코트하려고 나서지 않네?’

주변에는 공작 부인인 나를 지키기 위해 블란쳇 공작가의 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성녀를 에스코트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기사 입장에서, 성녀 정도 되는 레이디를 모시는 건 큰 영광일 텐데.’

대놓고는 아니어도 다들 성녀를 꺼리는 눈치였다.

내가 먼저 사람을 붙여주기도 전, 신관은 성급하게 저택의 사용인을 불러다 만찬장까지 성녀를 모셔갔다.


‘저래서 싫어하나?’

난 방에 올라가 만찬을 위해 새로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파란색 비단에 노란색 레이스가 달린 반팔 소매로 되어 있어 우아해 보이는 드레스였다.

보석함에서 사파이어 목걸이를 걸어준 베티가 승부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우리 마님이 제일 예쁘세요.”

솔직히 베티의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


“맞습니다. 보면 알지요, 성녀도 제법 아름답기는 하나, 마님께서 가지고 계신 특유의 분위기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페트리샤가 나를 칭찬했다. 난 놀라서 눈을 살짝 깜빡였다.


“내 분위기?”

“마님께서는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있으십니다. 그래서 전 항상 마님을 뵐 때마다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페트리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나를 칭찬했다.


“고, 고마워.”

“당연한 사실을.”

담담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져 볼을 붉혔다.


‘페트리샤가 전부터 왜 저러지?’

원작의 페트리샤는 원리원칙주의자였다. 그래서 하녀장으로서의 의무가 아닌 일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이제는 나를 위해 계속 나서주는 거 같아.’

다른 사람들과 달리 페트리샤는 계기가 없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내 모습을 다 점검한 뒤 바깥으로 나갔다. 만찬장으로 안내하기 위해 에리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찬 준비가 완성되었습니다. 가시지요.”

에리히는 앞머리를 내린 채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한 거겠지?’

기사 정복을 입어 보좌관보단 기사 분위기가 물씬 흐르는 그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기사들이 성녀를 피하던 것 같던데. 혹시 나를 의식해서 그러는 거야?”

“아닙니다.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상대여서일 뿐입니다.”

“성녀 정도면 영광스러운 상대일 텐데?”

“애초에 블란쳇 기사들은 신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리히가 나를 에스코트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저 성녀 자체가 묘하게 꺼림칙해서도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기사가 성녀가 어딘지 불편하다더군요.”

에리히는 몰라도, 다른 기사들까지 그러는 건 의외였다. 베티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다른 사용인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성녀랑 신관 다 진짜 비호감이에요.”

“성녀는 축복받은 존재라 만물의 사랑을 받는다던데.”

“그런 축복이 있다면…… 저렇게 비호감이 되기도 쉽지 않을 거예요.”

물론 그건 성서 속 성녀 이야기였다.


‘어떻게 그냥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어.’

성녀를 떠올린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도 동의합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블란쳇 공작가에선 쉽지 않을 겁니다. 묘하게 마님을 무례하게 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도대체 성녀란 사람이…….”

“신성력도 인성은 못 고치나 보지.”

“……크흡!”

에리히는 참으려는 것처럼 목이 벌게졌지만, 계속 웃음이 올라오는 눈치였다.

참고로 베티는 ‘맞네요, 신성력도 만능은 아니네요’ 하며 편하게 박장대소했다.

난 에리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편히 웃어요, 뭐 어때요.”

“-큼큼, 죄송합니다. 큭. 너무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 만찬장에 다 도착했는걸요.”

만찬장 문 앞에 도착하자, 사용인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스텔라는 만찬장의 정중앙에 앉아 있었다.


‘저긴 안주인의 자리인데.’

주위에 있는 블란쳇 사용인들은 당황스러운 듯 우물쭈물하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스텔라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공작 부인,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그런가요?”

“예. 저는 보다시피 성녀라, 신관복만 입을 수 있지만…….”

가녀리게 눈을 내리깐 스텔라는 상냥하게 박수 쳤다.


“그래도 부인께서 다른 옷을 입어주셔서 제 마음까지 좋네요.”

“칭찬 고마워요.”

“이렇게 뛰어난 만찬에 초대해 주신 공작 부인께 제가 더 감사드려야 하겠는걸요.”

스텔라의 앞에 화려한 만찬이 차려졌다. 스텔라가 만찬 식탁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근사하면서도 따스한 분위기 때문인지, 평소에 제가 머무르던 신전만큼이나 마음이 무척 편한 것 같아요.”

난 너 때문에 몹시 불편한데.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알겠어.’

스텔라는 날 우습게 보고 있다.

저번에 내쫓겨난 걸 잊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앞의 식사들도 전부 준비되었다.


‘과한데……?’

예스텔라의 식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화려했다. 황후가 공식 석상에서 받을 정도다.

내가 베티를 돌아보자, 베티가 내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자리가 어떻든, 안주인과 객은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지요.”

“……언제 또 이렇게 준비를 했어.”

“이래도 정신을 못 차릴 것 같긴 해요.”

베티는 아무렇지 않게 내 뒤로 가 대기했다. 뒤를 힐끔 보자, 주위의 사용인들 모두 나를 지지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예스텔라 때문인가?’

블란쳇 공작가가 내 편인 것 같았다.

그때 볼일이 있다며 외출했던 요한이 돌아왔다.


“에스텔. 다녀왔어.”

요한은 외출복을 입은 채 곧장 내게 달려왔다.

사랑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요한의 시선이 예스텔라에 닿은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저건 또 왜 여기 있지?”

식기를 잡고 있던 스텔라의 여린 손목이 흠칫 굳었다.


“그건…….”

“다시 이 집에 기어들어 온다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나는 요한의 등에 살짝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오늘 내가 아파서 무례를 무릅쓰고 오신 거래.”

“……아팠다고?”

요한은 내 두 뺨을 소중히 감싸며 물었다.


“어디가 많이 안 좋아진 거야?”

“피로가 쌓여서 그랬나 봐. 신성력으로 치료받아서 이젠 멀쩡해.”

“정말 신성력이 잘 듣는 게 맞을까?”

붉은 눈동자가 살짝 사나워졌다.


“저번에 치료했는데도 상태가 안 좋아질 정도면, 실은 신성력이 쓸모없는 게 아닐까?”

확실히 저번에 치료받은 것치고는 너무 빨리 부작용이 오긴 했다.

요한이 슬픈 얼굴로 내 입가에 손수건을 가져갔다.


“여기에 묻었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얼마나 깔끔하게 먹는데.”

“사실 네 입가를 닦아주고 싶어서, 네가 너무 빈틈이 없어서.”

그가 달콤한 눈웃음을 치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가끔은 실수 좀 일부러 하고 그래. 그래야 내가 더 챙겨줄 수 있잖아.”

요한은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손님이 왔을 때, 가주는 중앙에, 그리고 그 옆에 안주인이 앉는다.

하지만 그가 일부러 내 옆자리에 앉음으로써 안주인 자리에 앉은 성녀와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말았다.


‘나로서는 좋은 건가?’

성녀가 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단순한 스트레스였을 뿐, 부인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어요.”

성녀의 뒤에 있던 다른 신관이 나와 성녀의 앞에 고급스러운 상자를 놓아주었다. 성녀는 그 상자를 수줍게 들어 보였다.


“다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서, 부인께 선물을 준비했어요.”

“제 선물이요?”

“예. 제 축복을 담은 성물이에요. 한번 보시겠어요?”

성녀가 내민 상자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있었다.


“이 반지를 끼고 다니시면, 오늘처럼 갑자기 의식을 잃어버리시거나 하는 일이 줄어드실 거예요.”

“전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몸이 아프신 공작 부인이 걱정되어 준비한 거예요. 부디 부담 갖지 말고 받아주시길.”

성녀는 두 손을 모으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성녀의 선물을 바라보았다.


‘예쁘기는 해.’

내 눈에도 이상해 보이는 건 없었다. 하지만 성녀가 준 선물이라니 뭔가 찝찝했다.


‘이걸 받아야 하나……?’

그때 불쑥 앞에서 큰 손이 다가와 상자를 닫아버렸다.

요한이었다.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기로 했어.”

그 말과 동시에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베티부터, 에리히, 다른 사용인들까지 아주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요한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다 아는 내용이야.”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담았다.


“난 너와 평생 함께하겠다고. 그러니 다른 사람한테 처음을 빼앗길 순 없지.”

요한이 품속에서 성녀가 준 것과 비슷해 보이는 상자를 꺼냈다.


‘도대체 무슨…….’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심장은 멋대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요한을 바라보았다.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의 팔, 천천히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굽혀 앉은 요한.

내 눈앞에 내밀어지는 상자.


“푸른색은 블란쳇 공작가의 상징이야.”

영롱한 사파이어가 박힌 고풍스러운 반지.


“이건 대대로 블란쳇 공작 부인에게 내려져 오는 반지고.”

“…….”

“이 반지의 주인은 너뿐이야, 에스텔.”

잘생긴 그의 얼굴이 다정하게 나만을 바라보았다.


“너에게 내 미래를 주고 싶어.”

왠지 모를 감정이 울컥했다. 눈가에선 조금씩 눈물이 새어 나왔다.


“고마워.”

원작의 에스텔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흑막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에스텔의 세상을 가득 채워주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다만 반지는 안 됐다.

그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듯, 에스텔의 새장엔 반지가 존재할 수 없었다.


“지금 나, 너무 기뻐.”

“반지가 마음에 들어?”

“반지를 받은 건 처음이니까.”

지금 내 눈앞에는 흑막, 요한이 있었다.

요한은 원작에서 나왔던 그대로였다. 눈부신 외모, 근사한 체격, 다정하면서도 능숙한 태도.

반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원작과 전혀 다른 남자였다.


“요한이 끼워줘.”

요한은 내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정중하게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쨍그랑-!

건너편에서 성녀가 식기를 놓쳤다.

어느샌가 흰 베일을 벗은 성녀의 화려한 금발이 비극적으로 흔들렸다.


‘성녀는 배우자 아니면 머리카락을 안 드러낸다는데…….’

스텔라는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우아한 표정에 금이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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