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친구가 되고 싶어요 (54/182)


54화 친구가 되고 싶어요
202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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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탄의 문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금 전 보인 게 착각인 것처럼.

하지만 요한이 그런 것을 착각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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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에게선 발견되지 않았는데.’

성녀라는 불쾌한 여자에게선 리베르탄의 보호 문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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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연일까?’

스텔라는 드레스 자락을 수습하고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성녀가 청순한 얼굴로 요한을 보며 전전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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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손수건으로 닦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물기를 제거할 수는 없었어요.”

방금 전보다 더 거리가 가까웠다.

실수로 서로 부딪치거나, 껴안게 될 정도로.

하지만 스텔라의 푸른 눈동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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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 냄새.’

요한은 스텔라와 가까이 있을수록 형언할 수 없는 악취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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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에게선 늘 좋은 냄새가 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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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시면 다음에 비슷한 옷을-”

스텔라의 가녀린 손이 살포시 요한의 어깨에 닿으려던 찰나.

요한은 스텔라를 무시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당장 저 여자를 붙잡고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리베르탄의 보호 문양.

에스텔에게 없는 그 보호 문양을 받았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예스텔라 리베르탄.

본래 요한의 복수 대상이었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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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스텔라 리베르탄은 불치병으로 죽었다.’

무엇보다 스텔라의 얼굴은 예스텔라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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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파악하지 못한 리베르탄의 핏줄인가?’

성국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면, 그가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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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할 필요가 있겠어.’

그길로 요한은 당장 황궁 지하 감옥을 찾았다.

그곳엔 곧 처형대에 오를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있었다.

모진 고문에 시달렸던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꼴은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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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워.”

간수가 차가운 물을 부어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깨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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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드디어 우리를 구해주러-”

두 사람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멍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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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리지?”

우아하게 의자에 다리를 꼰 채 앉은 요한이 그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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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인이 왜 너희를 보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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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란쳇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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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겁에 질려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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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리는 아는 걸 다 말해줬어! 반역죄를 했다는 것도 다 말했잖아!”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거짓 반역죄를 시인했다.

요한은 차가운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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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친딸, 어디 뒀어?”

친딸.

로자리아가 슬픈 눈동자로 헛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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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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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할 생각 하지 마.”

요한이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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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죽는다고 안심하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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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몰라, 나도…….”

로자리아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데미안이 가벼운 피를 토하며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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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죽었다! 그 애의 시체라도 찾아 능욕하려나 본데, 이미 그 애는 신전에서 데려가 화장을 했다. 네놈이 욕보일 수 없는 곳에서 쉬고 있을 거다!”

요한의 붉은 눈에 이채가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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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에서 데려갔다?’

요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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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확신에 차 보이는군.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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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 가엾은 아이가…… 한 줌의 재가 되어 신전의 정화 의식을 치르는 것까지.”

신전의 정화 의식은 신이 계신 곳으로 인도해 주는 최상급의 장례식이다.

요한은 그 말에서 의문을 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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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직접 본 건 아니군?”

정화 의식은 부모라 하더라도 가까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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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뭘 어쨌다고? 천사 같은 내 딸은 천국에 갔을 거다. 그거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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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보.”

그때 휘청거리던 로자리아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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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가 정말 죽었나?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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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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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럴 리 없는데. 왜 장례식을 치른 후 자꾸 우리 예스텔라를 본 것만 같아서.”

로자리아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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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게 살아 돌아와 우리를 안아줬던 것 같은데, 그게 착각이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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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 좀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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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텔라가 살아 돌아온 거 같았다고?”

하지만 요한은 그 작은 단서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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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말해봐. 그게 무슨 소리지?”

요한이 로자리아를 붙잡고 그녀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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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 애는 죽은 게 맞아, 내가, 자식 잃은 슬픔에…….”

로자리아의 눈동자가 흐릿했다. 마치 저번에 리베르탄의 가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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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부탁할게. 부탁하겠습니다.”

그때 로자리아가 요한을 붙잡고 애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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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을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 처형되기 전에 한 번이라도…… 그 애 얼굴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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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왜인진 모르겠지만…….”

데미안이 로자리아를 말리며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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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 애한테 사과할 수 있게 해주게. 이상하게, 그 애한테 사과해야만 할 거 같아.”

요한은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보며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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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아끼는 자식 일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마치 인격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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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너희는 내 여자를 볼 수 없어.”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얼굴이 무너졌다.

요한이 두 사람을 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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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한 목숨 하나 건지겠다고, 딸을 팔아넘길 땐 언제고, 아쉬워지니 착한 부모 행세하게 둘 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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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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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같잖게 굴지 마.”

 

***

공작 부인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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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마님께 호감을 드러낸 편지는 이쪽에 두었습니다.”

페트리샤가 고상한 얼굴로 도착한 편지를 분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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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편지들 같은 경우에는 모욕의 정도가 심하여 제 선에서 처리하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페트리샤의 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궁금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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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길래?’

다들 적당히 돌려서 말했지만, 쉽게 표현하자면 이런 말들이었다.

[자기를 입양한 부모가 처형된다는데 멀쩡히 잘 지내고 있답니까?]

[그 가짜가 반역자의 딸이 되었다더군요. 뭘 하겠다고 나서진 않겠지요?]

[가짜가 사교 활동에 나서겠다고 움직이면 저희 가문에 초대하게 해주세요. 주제 파악을 하게 해드리죠.]

새로울 것 없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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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곧 리베르탄 공작가의 처형식인가 보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부모지만 그래도 부모가 죽는다는 소식에 뭔가 기분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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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인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레퍼토리를 확인했다.

[길리테 부인이 보시기에 황태자 전하와 무슨 사이인 것 같나요? 정말 둘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것 같나요?]

[자작극으로 헤텔 백작가를 몰락시켰다는 게 사실인가요?]

[헤텔 백작가에서 재상님을 쫓아다녔다더니, 재상님한테 들러붙으려는 생각은…….]

어휴. 나갈 때마다 별 얘기가 달라붙네.

[그 가짜한테 괴롭힘당한 피해자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사과 한마디 없이 뻔뻔하게. 사교 활동에 나서지 못하게 해주세요. 길리테 부인도 도덕이란 걸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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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괴롭힘당한 피해자?’

오랜만에 듣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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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주 신났네.”

난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잘 나가지도 않았는데, 온갖 곳에서 나한테 괴롭힘당했다는 피해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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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패악질을 부리며 제 드레스를 빼앗아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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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진짜 공작 영애라도 된 양 제가 먼저 인사했는데도 무시하더군요.’

처음 리베르탄 공작 부인한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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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평판 관리를 어떻게 하기에 이딴 얘기가 돌아! 너 때문에 내가 나가질 못하겠어!’

솔직히 너무 억울했다.

나가지도 않았는데, 다들 온갖 나쁜 일에 나를 써먹는 걸 어찌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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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더 처신을 잘했어야지. 괜히들 그러겠니?’

리베르탄 공작 부인 역시 공작 부인치고 재주가 부족해 사교계에 영향력이 적었다. 그런 와중에 사교계에 데뷔도 못 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황태자와의 염문설에 휘말려 거절까지 당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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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기도 힘들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베티가 입술을 꾹 다문 채 내 편지를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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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다 헛소문이잖아요. 마님이 하신 일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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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텔 백작가는 재상님께서 진행하신 일이니만큼 해명되긴 할 거야.”

물론 내 악명 때문에 생긴 의혹이야 여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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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도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귀부인이 나서주지 않으면 어려운 거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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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런 문제가 있군요.”

페트리샤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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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살생부에 이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겠습니다. 마님께서는 곧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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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 그보다 살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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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부는 별거 없는 자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당연히 필요한 겁니다.”

페트리샤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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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마님께서는 사교계에서 가장 빼어난 귀부인이 되실 겁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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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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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의 헛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상황을 정리하고 계셨으니까요. 어차피 진실하다 하더라도 온갖 뒷말이 나돌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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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헛소문으로 그대로 매장되는 경우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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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님처럼 뛰어난 분이라면,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보이실 것 같습니다.”

너무 엄청난 신뢰가 느껴져서 얼떨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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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하는 동안…… 어디서 정신 교육이라도 받았나?’

페트리샤 당신은 원래 원작에서 날 괴롭히는 사람이잖아.

고귀한 블란쳇 공작저에 적응하지 못하게 왕따시키고 안주인 일을 도맡으려고 했던 악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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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교계에 데뷔도 못 한 나한테 기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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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실 수 있을 것 같아 준비해 두었습니다.”

내 의문에 페트리샤가 절도 있게 편지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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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왕국 상단주의 축하연 초대장입니다. 블란쳇 공작가의 이름으로 온 초대장이니, 응당 마님께서 참석하실 수 있지요.”

연합 왕국.

로이엄 해안 왕국을 중심으로 모인 왕국들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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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업을 비롯해 여러 자원이 풍부해 제국에서도 무시 못 하는 곳이지.’

특히 중심인 로이엄 왕국은 제국에서도 중요하게 취급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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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인사들이 적을 테니, 연합 왕국 쪽 상단 귀족들과 친분을 나누며 인맥을 넓혀보시는 길을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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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네.”

연합 왕국은 워낙 상업이 발달해 신분 조작이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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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왕국 쪽 사람을 알아두면, 가짜 신분을 만들거나 도주로를 찾기 쉽겠지.’

고개를 막 끄덕이며, 초대장에 답신을 적으려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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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두통에 깃펜을 잡고 있는 손이 떨렸다. 나는 머리를 짚으며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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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급하게 나무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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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주 이제 다 풀리지 않았나요?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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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느냐?

나무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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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잘 안 들리는데, 우리한테 말하고 있는 거 맞지?

눈앞이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저주가 다시 강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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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정령력을 흡수하지 못해서 그런가?’

그 순간, 기사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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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성녀님께서 마님의 아픔을 느끼고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내 창백해진 안색을 본 기사가 무척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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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상황이다! 마님께서 상태가 안 좋으시다.”

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쓰러지기 직전, 페트리샤가 강하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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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찾아오셨는지는 몰라도 당장 성녀님을 모셔와라. 책임은 내가 지겠다.”

 

***

따끔-

묘한 통증에 눈을 깜빡였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변했던 시야가 깨끗해지며, 내 앞에 고상하게 앉아 있는 여자가 선명히 보였다.

성녀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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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신이 좀 드시나요?”

저번과 달리 온몸을 감싼 디자인에 같은 흰색 베일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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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성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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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부인께선 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스텔라는 비극적으로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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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아픔을 느끼곤 차마 외면할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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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덕분에 몸이 훨씬 좋아졌는걸요. 그런데 제가 어쩌다 쓰러진 것인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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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저도 알 수 없어요. 아마도…….”

스텔라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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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안 좋아지신 거 같기도요. 혹시 최근에 부담을 느끼거나, 고단함을 자주 느끼시진 않으셨나요?”

스텔라의 가냘픈 손이 내 한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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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는 몰라도, 부인에게 있는 마음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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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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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은 마음에서 비롯되니까요.”

묘하게 스텔라의 말이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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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료해 준 게 고맙기는 한데.’

말을 나눌수록 그 감사함이 점점 깎이는 것 같다.

사실 난 스텔라가 나타난 상황 자체도 무척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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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일까?’

저번에 성녀는 사람의 고통을 알아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 저주를 느끼고 찾아온 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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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왠지 의심스러운데…….’

나를 살피던 스텔라가 내 몸을 다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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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부인께서 무사하셔서 기뻐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저를-”

그 순간 스텔라가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그때 뒤에 있던 신관이 스텔라에게 서둘러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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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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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괜찮아요.”

스텔라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호흡을 가쁘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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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쓰느라 조금 지쳤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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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편히 누워서 쉬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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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성녀님의 건강은 제국 전체의 건강이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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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텔라가 슬픈 듯 나를 힐끔 보고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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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불편하게 생각하시면 어떻게 해요.”

저거 나 들으란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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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엔 무례라고 지적해 줬는데.’

신관이 성녀의 역성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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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블란쳇 공작 부인을 치료하다가 이렇게 힘들어지신 거 아닙니까, 응당 성녀님이 쉬실 곳을 마련해 주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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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요. 안 그래도 아프신데 저 때문에 스트레스라도 받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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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은 너무 마음이 여리셔서 문제이십니다.”

자세히 보니, 그녀를 둘러싼 신관들은 저번에 본 이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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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람들이랑 같이 왔네.’

만나는 사람마다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면, 성녀가 얼마나 귀중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 갔다.

성녀를 위로해 준 신관이 따지듯 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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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성녀님이 쉬실 수 있게 방을 마련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진작 성녀에게 쉬라고 권유하지 않은 내가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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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은인이신데 당연히 대접해 드려야죠. 방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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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께서는 공작 부인께 급히 오시느라 아무 식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찬을 준비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내가 페트리샤를 쳐다보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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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만찬 시간이니 바로 준비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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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네.”

신관 놈들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언제 또 신성력이 필요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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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적당히 넘겨보자.’

이놈의 저주가, 어떻게 해결될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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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을 위한 만찬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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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스텔라가 살포시 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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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과 함께 식사하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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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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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전 어릴 때부터 신전에서 지내서 친구가 별로 없거든요.”

푸른 눈동자가 살짝 슬픈 것처럼 촉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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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최대한 많은 분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블란쳇 공작님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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