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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제가 추태를 부렸네요 (53/182)


53화 제가 추태를 부렸네요
202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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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이 경매장에서 돌아오기 전.

요한은 곰돌이 모양 쿠키를 살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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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평범한 쿠키다.’

하지만 그는 그 흔한 쿠키가 뭐라고 보존 마법까지 걸어놓았다. 악마와의 거래에서 내놓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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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이 내게 준 것이니까.’

하지만 악마는 혼돈에서 태어난 악.

결코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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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쿠키에 뭐가…….’

여러 방면으로 분석해 본 요한은 결국 곰돌이 쿠키를 입에 쏙 넣었다.

평범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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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무것도-’

그때,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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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독?’

요한은 마치 잠에 빠지는 것처럼 소파 위에 스르륵 잠들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다른 감각만이 선명했다.

온몸을 스산하게 감싸는 한기와 쇠사슬끼리 부딪치는 소리. 그는 바로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어린 시절 갇혔던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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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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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팠겠다. 지금 너무 많이 힘들지?’

왠지 그 목소리를 들을수록 가슴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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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내. 너는 할 수 있어. 지금을 견디면, 반드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어.’

이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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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단해 보이는 리베르탄 공작가도 무너뜨리고 네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을 거야.’

목소리에 대해 생각할수록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아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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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옥에서 나가면, 너를 도와줄 사람이 있어. 너를 아껴주고 네 편을 들어주고, 네게 충성해 줄 사람도 있어. 그러니 힘들겠지만 참고 버텨줘.’

그래도 한 가지는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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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힘들 때 되새기던 말이야.’

스스로 위안 삼아 지어낸 말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위로였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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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내 온기가 닿으면 참 좋을 텐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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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조금만 기다려줘. 금방-’

그것을 끝으로 몸의 감각이 천천히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찌릿- 손끝에서 시작한 기묘한 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감각만 돌아왔을 뿐,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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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의 고리가 돌아왔어?’

에스텔을 구하기 위해서 완전히 없애버렸던 수호의 고리.

악마와의 계약 외에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그 진귀한 마법이 요한에게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호의 고리가 수복하느라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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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요한은 방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냉철하게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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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부인의 쿠키로 일어났어.’

독이나 마법, 흑마법도 아니다.

정확히 잊었던 감각을 일깨워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목소리를 들은 순간, 요한은 그런 일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꽤 당황했다.

아무리 어린 시절 일이라 해도 요한이 갇혔을 당시의 기억을 잊었을 리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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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힘이 내 기억을 지우지 않고서야…….’

수많은 의문이 뻗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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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넌.’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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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자?”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에스텔이 그의 집무실을 두드렸다.

아직 요한은 감각이 완벽히 돌아오지 않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에스텔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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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잘생겼다…….”

그의 앞에 앉은 에스텔은 낮게 감탄했다.

요한이 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조심스레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에스텔이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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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쳐버리고 싶게.’

몸만 움직였다면, 바로 눈을 떠서 에스텔을 놀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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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귀여운 표정으로 반응했을 텐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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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요한이 너무 그리웠어. 밖에 나가서도 계속 네가 생각났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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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어쩌면 난…….”

숨죽인 에스텔이 겨우 나직한 목소리를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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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요한은 바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이 무척 짜증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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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는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그녀를 붙잡고, 몰아세워 그 진심을 바로 캐내야 하는데.

지금 이 순간을 놓쳐버리면, 선을 철저히 지키는 에스텔은 다시 숨어버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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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왜 안 움직이는…….’

소용돌이치던 의문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졌다.

잠깐 꼼지락거리던 에스텔이 집무실을 쪼르르 빠져나갔다.

요한은 에스텔의 고백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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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너를 사랑…….’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요한이 매끈한 낯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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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이, 나를 사랑해?”

생전 처음 겪어보는 두근거림이 온몸에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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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한다고.”

요한은 쿵쿵거리는 제 심장께에 손을 얹으며 두 귀를 붉혔다.

고백을 처음 받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신랑감인 요한은 수많은 여자의 구애를 받았다. 그건 블란쳇 공작이 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있든 없든, 처지가 어떻든.

태생적으로 잘난 요한은 여자들에게 언제나 인기가 많았다.

솔직히 그 어떤 여자의 고백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요한의 모든 것을 감히 알고, 사랑할 수 있다고 단언하던 여자 중 제 실체를 꿰뚫어 본 여자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대부분 제 본성을 알고 나면 공포에 떨며 도망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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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알고도 좋아할 만큼 정신이 나갔거나.’

어쩌면 에스텔 역시 그 여자들과 비슷할지 몰랐다. 그녀 역시 요한의 완벽한 연극에 속아 넘어간 상태였으니까.

심지어 이젠 제국 전체가 불신하던 둘의 결혼을 진심으로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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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달라.’

요한이 귓가에 닿은 것 같던 에스텔의 보드라운 숨결을 의식하며 귀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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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진정이 안 되지?’

그간 능숙하게 부리던 여유는 솔직한 고백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솔직히 요한은 에스텔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두고 멀쩡한 척할 자신이 없었다.

찾아가 은근히 떠보려던 요한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 에스텔의 주변만 빙빙 맴돌았다.

***

이상하지만 요한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저녁 만찬부터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 그러지 않게 되니, 그 변화가 더 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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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요한이 날 피하는 건 아닐 거고?’

아무래도 대공령에서 갑자기 올라오게 되어 일이 많이 생긴 모양이다. 그래서 날 보러올 시간도 없어진 거겠지.

덕분에 요한 몰래 도망칠 준비를 할 수 있어서 좋아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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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걸까?’

괜한 생각 같지만, 요한이 나를 피하는 거라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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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에 집중하자.’

난 운디네 티어를 이용해 요정의 힘을 회복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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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거기가 에덴 로즈의 중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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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로즈 자체가 네 요정의 힘으로 피어난 것이니, 거기에 뿌리에 두면 에덴 로즈가 정령의 힘을 흡수해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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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되기 전에 누가 몰래 파 가면 어떻게 하죠? 비싼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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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그 전에 녹을 거다.

에덴 로즈의 뿌리 쪽을 살짝 파서 운디네 티어를 넣고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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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렇게 하면 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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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에덴 로즈가 정령의 힘을 머금으면, 에덴 로즈를 이용해 네 저주를 풀어나가면 된다. 동시에 너도 네 요정의 힘에 익숙해지겠지.

아직 에덴 로즈에게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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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외에 다른 사람이 에덴 로즈를 꺾어가도 문제는 안 생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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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애초에 그걸 위해 에덴 로즈의 뿌리에 운디네 티어를 넣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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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헛짓거리할 거 같으면 우리가 빨리 너한테 일러바치마.

나무들과 시간을 좀 보내다 베티와 함께 에리히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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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베티 네가 꼭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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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괜찮지 않아요. 충성 맹세라니 믿을 만한데 동시에 믿음이 안 간단 말이죠.”

남매란 그런 것인지 에리히에 대한 베티의 평가는 유독 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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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베티, 에리히는 귀족인데 너는 왜 평민 하녀로 생활하는 거야? 에리히의 아래로 들어가면 되잖아.”

베티와 에리히가 남매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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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식 밑으로 들어가기 싫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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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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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첩자 일을 하는 데 평민 신분인 게 훨씬 편해서가 컸어요.”

가만 보면 내 주변 사람들 다 비범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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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곧 귀족 신분으로 돌아가려 해요. 떳떳한 신분이 필요할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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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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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꼭 마님의 첫 번째 시녀가 되고 싶어요.”

시녀는 공작위 이상의 부인들. 그러니까 황후나 황비, 대공비와 공작 부인 정도의 최고위 귀족만 가질 수 있었다.

시녀란 귀족만이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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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가 내 첫 번째 시녀가 되어주면 나야 너무 좋지.”

나는 베티의 두 손을 잡으며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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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번째 시녀 자리를 언제나 너를 위해 비워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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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베티는 강아지 같은 다갈색 눈동자를 글썽거리며 감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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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전 마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그때 어느샌가 나타난 에리히가 우리를 보며 빈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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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참 눈물겨운 광경이군요. 저도 같이 울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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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제가 마님과 꼭 같이 오고 싶었던 거예요.”

베티가 에리히를 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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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란 게 전혀 없는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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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너나 나나 크게 다를 거 없거든?”

베티와 에리히는 나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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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남매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서로 얼굴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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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네 얼굴 굳이 보고 싶지 않다, 마님만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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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을 처음부터 알아본 건 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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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건…….”

에리히의 눈동자에 죄책감이 스쳤다. 어쩐지 에리히가 시무룩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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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에리히 경. 지난 일이잖아. 그런데 전에 부탁한 책은 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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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앞으로도 이와 관련된 책을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에리히에게 요정과 흑마법에 대한 고서를 수집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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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있는 책들로는 진실을 파악하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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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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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누구도 알지 못하게 깔끔히 처리해 놓았습니다. 주인님께서 보셔도 마님께서 고서를 수집하신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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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의 능력만 아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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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고맙구나, 동생아.”

베티가 마지막에 투덜거렸다. 에리히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으쓱였다.

에리히는 요한의 최측근답게 못 하는 게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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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에리히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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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나는 에리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초한 미인인 에리히는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 스타일도 어울렸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좀 답답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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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경은 원래 그렇게 머리를 항상 꽉 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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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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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묶지 않으면 답답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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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습관이 되어서.”

에리히의 뒤로 간 나는 그의 긴 머리를 살짝 풀고 느슨하게 묶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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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됐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바짝 긴장한 에리히가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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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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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봐. 경은 앞머리도 살짝 내리고, 느슨하게 묶는 게 훨씬 더 어울려.”

내 칭찬에 에리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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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에리히 경. 부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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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닙니다!”

에리히가 더욱 얼굴을 붉힌 채 ‘아무튼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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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인간도 참…….”

베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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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저 인간은 신경 쓰지 말고 방으로 올라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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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

내 방 앞에 하녀장 페트리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페트리샤는 문서를 한가득 끌어안고 우아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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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령이 끝날 때가 됐지.’

좀 꺼려지는 사람이라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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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테 부인, 무슨 일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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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을 보십시오.”

페트리샤는 내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편지에는 내 험담이나 소문에 대한 진의를 묻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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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나한테 따지려는 건가?’

하지만 페트리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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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이 이름들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 매장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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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페트리샤가 고상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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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블란쳇 공작 부인을 험담하지 않았습니까?”

……페트리샤, 당신은 또 왜 이래요.

***

리베르탄 공작가의 처형일이 되었다.

그간 리베르탄 공작 부부에 대한 보고가 계속 날아왔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심상치 않은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찾지 않았다. 굳이 들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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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이었던가?’

형이 끝날 때쯤에나 들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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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대로 죽을 것도 아니고.’

목숨만 겨우 붙인 채 빼돌려 에스텔의 절망을 목격하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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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딸이 지하실에 있는 다 죽어가는 제 부모를 발견하게 하고-’

요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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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없어.’

그러면 다시 그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지 못하게 될 테니까.

에스텔의 고백 이후 요한은 제 욕망을 강제로 되새기게 되었다.

이제 에스텔을 봐도 복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스텔, 복수.

이 두 가지가 아주 별개의 것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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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뭘 하고 싶은 거지?’

요한은 마지막 처형을 정리하기 위해 황궁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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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처형되어도 되는가?’

문득 에스텔이 걱정이 되었다.

그때 황궁 입구 건너편에서 낯익은 여자가 보였다.

우아하게 흰 베일을 장식처럼 두른 성녀 스텔라였다.

스텔라는 평소처럼 신관 세 명의 보호를 받으며 조신하게 걸어왔다. 청순하게 눈을 내리깐 얼굴은 성녀답게 온화해 보였다.

손에는 소중하게 성수 같은 물병을 수줍게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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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 여자를 볼 때마다 살의가 끓지?’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만났을 때마다 느끼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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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버릴까.’

요한이 의식적으로 짓던 잔잔한 미소가 미미하게 굳었다.

살랑살랑 걸어오던 스텔라의 걸음이 살짝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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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언뜻 달콤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낸 스텔라가 쓰러질 것처럼 멈춰 섰다.

요한의 바로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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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현기증이.”

스텔라는 이마를 짚으며 힘든 것처럼 가냘프게 신음했다.

고개를 든 스텔라와 요한의 눈이 마주쳤다. 스텔라가 놀란 것처럼 푸른 눈을 살짝 크게 뜨고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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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럽군.’

그는 가증스럽게 깜빡이는 저 눈동자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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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추태를 보였네요, 요한.”

사르르 미소 짓던 스텔라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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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멋대로 이름을 부르다니. 정말 죄송…….”

스텔라는 사죄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려다 다시 휘청거렸다.

요한이 그녀를 잡아주지 않자, 옆에 있던 사제들이 스텔라를 부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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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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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괜찮아요. 갑자기 빈혈이 왔나 봐요.”

요한의 눈치를 살피던 스텔라가 요한을 보며 ‘세상에…….’ 하고 무척 놀랐다. 방금 비틀거리며 들고 있던 물을 요한에게 쏟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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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째…….”

눈썹을 한껏 늘어뜨린 스텔라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요한의 발치를 닦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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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께 자꾸 못난 모습만 보여드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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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을 닦던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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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속상해요.”

그러자 파여 있던 드레스의 가슴골이 두드러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쇄골 아래쪽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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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요한이 날카로운 눈매를 좁혔다.

익숙한 문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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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덩굴 문양.’

리베르탄의 보호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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