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나를 사랑한다고? (52/182)


52화 나를 사랑한다고?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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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리안드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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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리안드로가 눈을 크게 뜨며 욱신거리는 뺨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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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날 때렸어?’

심지어 에스텔에게선 일말의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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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그런 행동을…….”

짝!

에스텔은 대답 없이 리안드로의 반대쪽 뺨을 다시 한번 쳤다. 이번에는 강하게 치지 않아, 더욱 모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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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에스텔!”

리안드로의 푸른 눈동자가 강렬하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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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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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으니까 정신이 좀 드나요?”

리안드로는 에스텔의 가녀린 팔을 붙잡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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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습니까? 이딴 행동을 벌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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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놀라시나요?”

에스텔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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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못 할 짓이라도 한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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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허탈한 듯 헛웃음 친 리안드로가 이를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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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악마에게 물들었을 줄이야.”

리안드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에스텔의 모습을 살폈다.

귀족들을 위한 고급 경매장.

위장을 위해 가면을 쓴 듯했으나, 에스텔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분홍빛으로 반짝이는 백금발, 고급 비단에 은사가 수놓아진 연보라색 드레스.

자세히 뜯어볼수록 에스텔은 이전에 봤던 것보다 몇 배는 호사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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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이 그 악마가 해준 거겠지.’

아니면 소문대로 헤텔 백작가를 모함해 빼앗은 돈으로 꾸몄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경매장에 와서 또 보석을 구매하려 하는 거다.

이제 리안드로는 에스텔의 아름다운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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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진짜 귀한 것을 모른다.’

값비싼 물건 따위로 애써 공허한 마음을 가리고 있지만, 에스텔도 곧 악마의 진실을 알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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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버지의 부탁으로 이 경매장에 온 것은…….’

지금이 에스텔을 구할 마지막 기회여서일지도 모른다. 리안드로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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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얼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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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기사가 레이디의 손이나 팔을 함부로 잡는 건 폭력이 아닌가요?”

에스텔이 태연히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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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고 거절한 레이디에게 윽박지르거나, 멋대로 끌고 가려고 하는 건요?”

리안드로의 입매가 뻣뻣하게 굳었다.

에스텔은 그런 리안드로를 보며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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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날 구원하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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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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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하지 마세요. 당신한테 구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요.”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에 냉소적인 빛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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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착각에서 깨어날 때도 됐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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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하지만 리안드로는 에스텔을 붙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가슴이 마구 불타는 기분이었다.

리안드로의 에스텔은 이런 식으로 그를 대해선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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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그녀라면…….’

악마 같은 블란쳇 공작에게 붙잡히기 전까지, 그땐 그녀에게 가망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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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당신 같은 악녀를 신경 쓰고 싶은 줄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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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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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당신 같은 악녀, 도덕도 모르는 악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노기 섞인 리안드로의 말에 에스텔이 한숨처럼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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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신경 쓰지 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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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신은 내 책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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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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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당신이 지옥인 줄 모르고 어리석게 구는 꼴을 봐줄 수 없습니다.”

리안드로는 후회 가득한 눈빛으로 에스텔에게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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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때 당신을 구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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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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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멈출 수 있었을 텐데.”

경매장에 도착한 손님들이 두 사람을 보며 웅성거렸다.

하지만 리안드로의 눈에는 오로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어리석은 에스텔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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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그 남자가 당신 같은 악녀를 진짜 사랑하는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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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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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당신을 진짜 책임질 사람은 나뿐입니다.”

리안드로가 에스텔을 가까이 당긴 뒤 나직이 진심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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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블란쳇 공작이 아니라.”

에스텔의 얼굴을 가린 가면이 떨어졌다. 설탕 인형처럼 고운 외모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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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겠죠.”

에스텔이 흰 속눈썹을 내리깔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선 사람을 홀리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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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이 날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수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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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아주시는 겁니까?”

리안드로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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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하지만 에스텔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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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그렇다 해도 난 당신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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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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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손에 구원받기 싫다고요. 당신 말대로 난 어리석은 악녀니까.”

에스텔이 뾰족한 구두로 리안드로의 발을 콱!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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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불시에 기습받은 리안드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에스텔의 팔을 놓고 말았다. 에스텔은 우아하게 리안드로가 붙잡았던 팔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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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이 다 진짜라 해도, 당신에게 구원받느니 차라리 요한의 품에서 죽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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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자의 이름을 부릅니까?”

리안드로의 푸른 눈이 질투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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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그자의 손에 죽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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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그 순간, 경매 시간을 알아보러 갔던 베티가 돌아왔다. 베티의 뒤로 경매장 지배인과 경비 기사들이 나타났다.

평정을 유지하던 에스텔이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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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황실 기사단장인 리안드로는 사람이 더 많아질수록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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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두 분.”

경매장 지배인은 리안드로와 에스텔 사이에 끼어들어 넌지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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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사이에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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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야 있었지.”

에스텔은 힘든 기색을 보이며 지배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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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 사람이 내게 달려들어 화를 냈네. 덕분에 신분을 숨기려던 내 가면도 떨어졌어. 손님 보호를 이따위로 해도 되는가?”

지배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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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희 경매장에서 불편을 겪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지배인이 힐끔 충격받은 리안드로를 바라보았다. 귀족인 지배인은 리안드로를 곧장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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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두 분 사이의 갈등을 경매장에서 판단하기에는 어려운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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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할 만했다?”

그때 주변에 있던 다른 경매장 손님들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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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인! 이제 경매 시작할 시간이 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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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쪽에서 먼저 시작한 일이니, 분란을 일으킨 자를 내보내면 될 일 아닌가!”

지배인이 에스텔의 눈치를 다시 살피다, 리안드로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 순간, 지배인과 대화하며 움직이던 리안드로의 바지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가 팔랑 떨어졌다.

지배인과 대화하던 리안드로는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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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 티어?’

쪽지에 그려진 그림을 본 에스텔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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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드로가 나와 똑같은 보석을 사려고 왔어?’

운디네 티어, 물의 정령 운디네의 눈물 보석.

전설 속 정령의 이름이 붙여진 유명한 사파이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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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리안드로가 운디네 티어를 사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운디네 티어에 담긴 전설은 진짜였다. 진짜 정령의 힘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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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석은 내가 사야 해.’

나무들은 정령의 힘이 요정의 힘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했다. 정령 역시 흑마법 저주와 상극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인과 대화하던 리안드로가 입술을 깨물며 에스텔을 쳐다봤다.

이제 리안드로도 흥분해서 기사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턱에 잔뜩 힘준 리안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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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 내 지위를 걸고,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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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리안드로와 대화를 마친 지배인이 에스텔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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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을 겪게 해서 죄송합니다. 약속을 받기는 했으나, 미연에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위층에 있는 독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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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도 차질 없이 경매를 볼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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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귀족들 사이를 능숙하게 중재한 지배인이 빠르게 사태를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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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네.”

고개를 끄덕인 에스텔이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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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돈이 많아도, 리안드로는 펠시스 후작가의 후계자야.’

블란쳇 공작가의 돈까지 쓴다면 모를까. 그녀의 돈만으론 운디네 티어를 얻을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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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에스텔의 남색 눈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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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드로가 경매에 집중하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겠지.’

지배인이 정중하게 경매장 안쪽으로 에스텔을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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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에스텔은 지배인의 안내에 따라 걷는 척 리안드로의 옆을 스쳤다.

또각, 한 발자국 걸어가려던 순간.

앞으로 무심히 가던 에스텔이 리안드로의 귓가에 연분홍색 입술로 나직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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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부 사이에 이름만 불렀을까요?”

착각이라도 넘길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리안드로의 귀에 선명히 남기에는 충분했다. 리안드로의 눈동자가 커졌다.

리안드로는 에스텔을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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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말고 무엇을 더…….”

상상 속에서 하얗고 고운 에스텔이 블란쳇 공작의 손에 더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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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리석었다.’

그 순간 리안드로는 자신이 지나치게 안일했음을 자각했다.

엄연히 둘은 결혼한 사이인데.

리안드로가 지배인을 따라 걸어가는 에스텔의 뒤를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줄 알았던 에스텔이 가벼운 춤을 추듯 빙글 그를 돌아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분홍색 백금발이 나비처럼 살랑거렸다.

에스텔은 입술에 검지를 가까이 대며, 리안드로를 향해 사르르 눈웃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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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는 비밀이에요.’

잔상처럼 에스텔이 멀어졌다.

리안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그 자리에 에스텔은 없었다.

***

경매가 시작되었다.

나는 지배인이 안내해 준 호사스러운 독실에서 경매장을 내려다봤다. 베티가 불쾌한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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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타나 마님을 겁박하다니. 마님의 주변을 떠나지 말 걸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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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탁해서 간 거잖아. 그리고 너라도 펠시스 공자를 막기는 어려웠을 거야.”

베티는 뛰어난 인재지만 리안드로는 너무 고위 귀족이다. 심지어 무력도 요한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

아마 베티가 곁에 있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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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휴. 그놈은 왜 그렇게 마님한테 집착하는 거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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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거든.”

원작 때문일까?

제대로 알고 지내던 약혼자 사이도 아닌데, 리안드로가 왜 그렇게 내게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지배인이 준비해 준 음료를 마시며 경매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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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이 잘 통해야 할 텐데.’

솔직히 내가 리안드로에게 한 말은 별거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바로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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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잘 통할 거 같았어.’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역린이 있다.

요한에게 복수가 있는 것처럼, 역린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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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리안드로의 역린은 잘 몰라.’

하지만 오랫동안 미움을 받아 온 나는 사람의 역린을 대체로 알아보곤 했다.

미움은 역린과 가장 가까워, 사람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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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기사 리안드로라면 크게 반응할 거야.’

그동안 리안드로는 요한을 악마라 부르며 지나치게 의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이름에 반응했던 것만 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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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몰라도, 내가 리안드로에게 꽤 중요해 보이거든.’

악녀라 깎아내리면서도 집착하는 걸 보면 더더욱.

리안드로의 강압적인 행동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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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난 리안드로가 싫어.’

이젠 단순히 과거의 악연 때문만이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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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나한테 그렇게 강압적이지 않았는데.’

그는 어떤 상황이 와도 내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다. 심지어 크롤린 떼가 덮치는 위기 상황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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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복수 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것 같아.’

어쩌면 그래서 요한에게 기대게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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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올 경매 물건은, 전설 속 물의 정령 운디네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사라졌다는 운디네 티어입니다!”

화려한 샹들리에 빛 아래에서 운디네 티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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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보석 안에 뭔가가 보여.’

오로라색으로 일렁거리는 반짝이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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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 티어의 경매 시작가는 5천 골드입니다. 모두 숫자판을 들어주시며, 입찰하실 가격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나는 판을 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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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골드.”

경매장 아래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너무 지나친 가격이었으니까.

사람들 사이로 리안드로가 보였다.

리안드로는 숫자판을 들 생각도 못 한 채 생각에 잠긴 듯 뚫어져라 앞을 보고만 있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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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내 생각보다 더 잘 먹힌 것 같은데.’

진행자가 카운트를 세며, 다른 입찰자를 찾았다. 하지만 나보다 더 높은 금액을 부르는 귀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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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그 이상은 전 재산을 써야 했는데.’

그렇게 나는 경쟁 없이 운디네 티어를 바로 손에 넣었다.

***

경매가 마치자마자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왔다.

블란쳇 공작저에서 에리히가 바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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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요한한테 들키진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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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을 찾으시긴 했지만, 들키진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예상보다 더 일찍 돌아오시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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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에리히 경. 오늘 외출이 들키긴 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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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에리히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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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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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시스 공자와 마주쳐서 소란이 있었거든. 근데 그걸 하필 경매장 귀족들이 다 목격했어.”

그 정도 소문이면 요한이 모를 수 없다.

하지만 에리히는 내게 불평하기보다는 리안드로에게 더 분노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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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도한 작자가. 갈아버려도 시원치 않을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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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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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대비할 수 있습니다.”

에리히가 안경을 고쳐 쓰며 깔끔하게 대답했다. 난 그런 에리히에게 영수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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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몰라서 블란쳇 공작 부인 이름으로 따로 보석을 몇 개 구입했어. 이걸로 나중에 요한에게 소소한 일탈로 놀러 갔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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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완벽하게 다 해주셨는데 어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편히 들어가시지요.”

확실히 내 편이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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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부탁할게.”

난 씻은 뒤, 베티와 함께 쿠키를 준비해서 요한의 집무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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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요한의 반응이 꽤 좋았지?’

하지만 똑똑 문을 두드려도 평소처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슬며시 문을 열고 안을 바라보니, 요한이 집무실 소파에 피곤한 듯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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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힘들었나 보네.”

집무실에 잠든 모습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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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자?”

최대한 요한이 깨지 않게 조용조용 발걸음을 옮겨 요한의 앞까지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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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잘생겼다…….”

황홀할 정도로 근사한 얼굴은 자고 있어도 완벽했다.

유난히 붉은 눈이 강렬한 요한이어서인지, 깨어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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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어도 될 것 같은 편한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나도 모르게 잘생긴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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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요한이 너무 그리웠어.”

신기하게도 요한이 깨지 않았다. 정말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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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가서도 계속 네가 생각났어.”

리안드로에게 시달려서인지 잠든 요한을 보니 마음이 알 수 없는 뭔가로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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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어쩌면 난…….”

깨어 있는 요한을 향해서는 결코 할 자신 없는 말.

하지만 자꾸만 계속 하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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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작게 말해버린 난, 내 말에 놀라 준비한 쿠키도 들고 방을 빠져나와 버렸다.
 

***

에스텔이 떠난 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요한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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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그의 두 귀가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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