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제 무례를 사죄하고 싶습니다 (50/182)


50화 제 무례를 사죄하고 싶습니다
2022.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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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가 눈을 크게 뜬 채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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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신의 아픔을 두고 볼 수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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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누가 그걸 신경 써달라고 부탁했습니까?”

에리히는 제 상처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성녀에게 피가 흐르는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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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이 뭐라고 내 흉터에 멋대로 간섭합니까? 내 흉터인데!”

에리히에게선 기이한 박력이 느껴졌다.

예민하고 까칠한 외모가 오늘따라 더 빛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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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해라, 더 해.’

솔직히 성녀가 마음에 안 들기는 해서 속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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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또 시달려봐서 알지.’

물론 에리히의 독설은 나한테 큰 상처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말을 거는 게 더 귀찮았다.

하지만 평생 좋은 말만 들어본 성녀 스텔라에겐 다를 거다.

그것도 상처를 치료해 준 뒤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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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해요.”

스텔라가 크게 충격받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그때 에리히의 박력에 놀라 굳었던 신관들이 나섰다. 그들은 스텔라의 앞에 서서 그녀를 보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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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뉴 남작! 성녀님께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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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

에리히가 고개를 돌려 신관에게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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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 손에 피 좀 낸 게 무례입니까?”

신관들은 에리히의 까칠한 대답에 멈칫하며 눈을 끔뻑였다.

에리히가 그런 신관과 스텔라를 보며 빈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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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전은 법리가 좀 달라진 모양입니다. 성녀님이 기껏 치료한 상처를 들쑤신 무뢰한이라고 신문에 나면 딱이겠군요.”

와, 진짜 얄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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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싸울 땐 좀 별로였는데…….’

신전 사람들한테 저러고 있으니 좀 든든했다.

신관들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에리히에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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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녀님께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까!”

에리히는 건성으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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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그렇지요. 제가 심약한 성녀님께 소리를 지르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건 성녀님이 멋대로 움직여서였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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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뉴 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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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제게 소리 지르는 무례를 범하십니까?”

에리히가 안경을 고쳐 쓰며 그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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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지만, 블란쳇 공작가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크르르-

에리히는 손에서 놓아버린 마수의 목줄 끈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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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의 말조차 무시하고 나가지 않은 손님들의 안전까지 보장하지는 않을 겁니다.”

흑표범 마수는 목줄을 발톱으로 끊었다. 신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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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블란쳇 공작가의 정식 손님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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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의 불찰까지 저희의 몫은 아니겠지요? 그것도 공작저에서 함부로 주인을 헐뜯기까지 한 손님인데.”

사람보다 더 큰 흑표범 마수가 한 발자국씩 다가오자 신관들이 더욱 해쓱해졌다.

신관들은 주춤주춤 물러섰지만, 마수가 따라서 움직이자 에리히에게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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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았네. 우리가 잘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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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있을 시간이 있습니까? 모두 잡아먹히기 전에 혼자라도 살아남으셔야 할 텐데요.”

흑표범 마수는 크게 짖었다.

그 소리에 신관들은 스텔라를 붙잡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물론 흑표범 마수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쫓을 듯이 금색 눈을 번뜩였지만, 입맛만 다시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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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악한 놈들.”

에리히가 미간을 찌푸리며 피 묻은 손으로 머리를 풀었다. 긴 회색 머리카락이 챠르륵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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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이제 손님들도 다 떠나셨으니 나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나는 어색하게 덤불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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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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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도 다시 만나서 반가워.”

흑표범 마수가 신나서 내게 달려왔다.

나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흑표범 마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에리히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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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는 거 알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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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 머저리들이 아니면 다 알 수 있었을 겁니다.”

그때 에리히의 청회색 눈동자에 묘한 죄책감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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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마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 괜찮냐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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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손등이 제일 안 괜찮아 보이는데.’

얼마나 세게 찔렀는지 피가 멎지도 않고 흘러내렸다.

***

에리히는 요한의 명령에 따라 흑표범 마수를 인계받았다.

때때로 주인인 요한조차 무시하는 흑표범 마수가 웬일로 매우 얌전했다.

막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로 가려던 순간, 흑표범 마수는 몸을 낮추고 그르릉거리며 불쾌한 티를 냈다.

기척에 민감한 에리히 역시 정원에서의 목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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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 가짜와는 태도 자체가 다른 아량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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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란쳇 공작도 공작이지만, 그 가짜는 도대체 무얼 믿고 그리 성녀님을 괄시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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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께서 뭘 그리 잘못했다고. 오히려 며칠 쉬기만 하면 나을 조그만 상처를 성녀님께서 몸소 오셔서 치료해 주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가짜.

귀족이 아닌 고아 출신 입양아인 에스텔을 의미하는 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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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했던 말인데…….’

이상하게 에리히는 그 가짜라는 말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혔다.

신관들은 멋대로 상황을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에스텔을 깎아내렸다.

가만두고 있으니 신관들의 오만방자함은 끝을 모르고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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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성녀님을 오라 가라 한 것도 모자라 공작이 그렇게 움직이게 조종한 가짜가 문제지요! 신의 벌을 받아도 모자란-”

크와앙-!

흑표범 마수가 더 이상 참지 않고 울부짖었다.

에리히는 얼마든지 마수를 통제할 수 있는 통제구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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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에스텔은 언젠가 사라져 버릴 가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이 지껄이게 놔둘 수 없었으므로.

그러나 에리히는 도착하자마자 예상외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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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덤불 너머에, 당신이.’

흑표범 마수 역시 에스텔의 존재를 느꼈는지, 귀를 쫑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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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 소리를 다 들은 건가?’

에리히는 머리끝까지 분노했다. 아무리 몰랐다지만, 에스텔이 있는 자리에서 공공연히 떠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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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은…….’

사람들을 걱정시킬까 봐 아무도 모르게 피를 토하는 사람.

면전에서 모욕을 들어도 사죄하고, 앞에서는 눈물조차 감추는 사람.

에리히는 일부러 흑표범 마수를 풀어두어 그들을 고생시켰다. 합의는 안 했지만 흑표범 마수 역시 적당히 그들을 상대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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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하세요, 여러분.”

그때 성녀가 나섰다.

신전의 고귀한 공주님, 투명한 햇살을 인간으로 만든 듯 맑고 청순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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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녀로서 도움만 받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나요?”

성녀가 멋대로 거절하는 에리히의 손을 붙잡고 치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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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 흉터가, 전부…….”

어린 시절, 에리히가 리베르탄에서 쫓겨나며 입었던 두 손의 화상 흉터.

한때는 의사에게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마저 들었던 거대한 흉터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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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이, 너무 깨끗해.’

그 순간 에리히는 지독한 상실감을 느꼈다.

이 화상 흉터를 이겨내기 위해 에리히는 온갖 고생을 다 해야 했다. 몇 달 내내 악을 쓰며 물건을 쥐는 연습만 하기도 했다.

손의 화상을 보며, 리베르탄에 대한 복수심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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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보답이 도움이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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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께서는 확실히 아량이 넓으시군요.”

성녀는 그의 속도 모르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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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도움을 받았는걸요.”

에리히는 도저히 깨끗한 제 손을 견딜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검을 들어 손등을 찍어 상처를 냈다.

성녀가 하얗게 질려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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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손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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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성녀님 때문입니다.”

에리히는 성녀의 흔들리는 얼굴이 가증스러워 보였다.

성녀랍시고 남의 일에 멋대로 끼어들어 놓고, 마치 피해자라도 되는 양 구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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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의 오지랖은 매달리는 신도들한테나 해주지 그랬습니까. 저처럼 필요 없는 사람 말고.”

성녀가 겁에 질리자마자, 같잖게도 주변의 신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래서 에리히는 그 우습지도 않은 것들을 조롱하고 위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내 신경 쓰였다.

숨죽인 채 덤불에 가만히 앉아 있는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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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계신 건 아니겠지?’

에리히는 성녀와 신관이 사라지자마자 왠지 불편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에스텔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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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는 거 알고 있었어요?”

다행히 에스텔에게서 울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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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마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노골적인 비난.

본인도 아닌 에리히가 들어도 화가 날 만한 날조가 가득한 비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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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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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신관들이 했던 소리 다 들으셨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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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요?”

에스텔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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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얘기 없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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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얘기가…… 아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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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제가 나가서 사죄해야 했단 건 아니죠?”

에리히가 눈을 크게 뜨자, 에스텔이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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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때문에 블란쳇 공작가에 대해 실망하게 되어서 죄송하다고.”

에리히가 비난했을 때, 그때도 에스텔은 지금과 같은 얼굴을 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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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할 수 있는 건 사죄밖에 없는걸요.’

평온한 듯, 묘하게 슬픈 듯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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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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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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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님께서는, 자기를 모욕하는 말에 화내지 않으십니까?”

에리히가 불쑥 말했다.

에리히는 요한의 명에 따라 에스텔이 있던 라비안느 고아원을 조사했다.

라비안느 고아원은 매우 처참한 곳이었다.

어린 에스텔에게, 리베르탄 공작가로 입양되지 않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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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이상한 부분.’

라비안느 고아원이 있는 곳은 귀족들이 지나다니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하필 라비안느 고아원을 지나다 에스텔을 보고 입양하게 되었다.

하물며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다른 고아원을 들렀던 흔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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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행운이었을까?’

에리히는 갑자기 에스텔을 둘러싼 모든 게 의문스러워졌다.

에스텔 때문에 고아원 비리를 알게 되지 않았다면, 이 정도까지 조사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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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뉴 남작님이 하시기엔 좀 이상한 말이네요.”

에스텔이 연분홍색 백금발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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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화낼 자격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왜 궁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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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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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걱정하시는 건 아닐 거고, 저 때문에 블란쳇 공작가의 명예가 실추될까 그러는 건가요?”

에리히는 말문이 턱 막혔다.

에리히 역시 신관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도 에스텔에게 무작정 감정적인 비난을 쏟아부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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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아시겠지만, 워낙 나쁜 소문이 많아서 이 정도로는 블란쳇 공작가에 흠도 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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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차분한 그 말이 에리히의 가슴을 푹 찔렀다.

에스텔의 말간 남색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을 때마다 참을 수 없이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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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할게요. 블로뉴 남작님은 그만 본인의 손 상처나 신경 쓰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에리히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뒤로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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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별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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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피가 흐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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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라고 낸 겁니다. 이 정도 상처가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아무런 대답도 기대하지 않고 던진 말이었다.

어차피 에리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심지어 본인조차도, 제가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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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틀렸어요.”

정원에 선선한 여름 바람이 불었다. 에스텔의 백금발이 은은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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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의미를 주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사라진다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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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뭘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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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모르죠. 그냥, 블로뉴 남작님께 말하고 싶었어요.”

고요 속에서, 남색 눈동자가 몽환적인 빛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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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상처가 사라져도 자신은 알잖아요. 그러니 잊지 않는 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을 거예요.”

말갛고 하얀 그녀의 얼굴이 청회색 눈동자 가득 차올랐다.

한순간 개화하는 꽃처럼, 에스텔이 에리히의 몸 안 가득 피어버렸다.

화상 흉터로 메말랐던 인생에 의미 모를 꽃이 한가득 채워 걷잡을 수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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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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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고 싶었던 말.’

그 순간, 에리히는 자신이 화상 흉터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화상 흉터가 제 인생이라도 되는 양 여겼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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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왜 당신이. 하필 당신이.’

그토록 매도하고, 비하했던 에스텔에게서, 에리히는 감히 감동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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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에리히의 눈에서 한 줄기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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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마님께 저질렀던 모든 무례.”

사실 에스텔은 에리히가 짐작했던 대로의 여자일지 모른다.

리베르탄의 악행을 알면서, 모르는 척 부정하던 가증스러운 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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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마님을 단언하고, 몰아붙인 모든 것을 사죄하고 싶습니다.”

에스텔이 동그랗게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뒤에 있던 덤불 위로 푸른 장미가 갑자기 돋아나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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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로즈?’

블란쳇 공작가의 상징인 푸른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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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란쳇 공작가의 멸문과 함께 세상에서 완전히 멸종해 버린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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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에리히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에스텔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푸른 장미들 사이에 있는 에스텔은 누구보다 고귀했다. 에리히가 자격을 논했던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에스텔이야말로 진정한 블란쳇 공작가의 안주인이었다.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

요한은 지하실 아래의 제단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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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시지.”

제단을 걷어차자, 제단 위로 공간을 찢고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인간의 형상을 띈 검은 악마가 나타났다.

악마는 그가 그림자 용을 잡아먹고 계약하게 된 존재였다.

악마가 보라색 눈동자를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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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수호 마법을 모두 잃게 되었니? 흑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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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고, 필요한 제물이나 말해.”

수호의 고리를 잃은 요한은 흑마법을 쓰는 데 제약이 많았다.

흑마법을 사용하다 오히려 본인의 흑마력에 잡아먹히게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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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네 소원에 따라 대가를 요구하겠다.”

하지만 회복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적절한 제물만 있다면, 악마와의 거래로 힘을 되찾을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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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제물일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가끔 악마는 구할 수 없는 제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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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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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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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곰돌이 쿠키를 줘.”

에스텔이 요한에게 선물해 준 쿠키다.

악마가 입꼬리를 찢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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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괜찮은 제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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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요한이 정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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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쿠키는 안 돼.”

그러자 악마는 잠시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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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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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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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중 하나만 받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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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요한은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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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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