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공평하게 싸가지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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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공평하게 싸가지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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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공평하게 싸가지가 없어요
2022.05.20.
베르토 신관이 애절한 눈빛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책임이라…… 그건 너무 슬픈 말이에요.”
스텔라가 베르토 신관의 두 손을 붙잡으며 요한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저는, 블란쳇 공작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성녀로서의 네 판단인가?”
“물론 제가 블란쳇 공작님께 용서를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저 부탁드릴 수 있을 뿐이죠.”
일순 방 안의 빛이 스텔라에게 쏟아진 듯했다.
요한에게 자비를 구하는 스텔라는 성서 속 성녀처럼 완벽했다.
신을 모시는 이들이라면 눈물을 흘리며 감동받았을 광경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베르토 신관조차 위기감을 잃고 감탄했다.
“그 입은-”
요한의 냉소가 성녀의 분위기를 깨버렸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줄 모르나?”
요한은 무섭게 굳은 얼굴로 스텔라를 응시했다.
주위가 온통 요한의 기운에 짓눌렸다. 요한의 옆에 있던 에스텔 역시 긴장한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스텔라의 반응은 더했다.
“제 잘못이에요.”
스텔라가 울 듯 말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안쓰럽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베르토.”
“성녀님?”
베르토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에스텔은 그런 스텔라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 몇 마디 하고 끝이야?’
저 신관은 스텔라를 대변할 정도로 최측근인 것 같은데.
‘보통은 그래도 구하려고 더 노력해 봐야 하지 않나?’
요한이 이번 일을 문제 삼는다 해도 정도가 있다. 성녀 정도 되는 위치면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스텔라는 어렵사리 베르토 신관의 손을 놓았다.
“내가 미욱하여 여기까지인가 봐요. 당장의 저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성녀님. 그러면 저는…….”
“블란쳇 공작님, 제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어요.”
등진 스텔라를 바라본 베르토 신관의 눈동자에 절망이 스쳤다.
“블란쳇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베르토 신관을 벌하시어요. 다만…….”
“그게 네 결정인가?”
“……네.”
주변의 다른 신관들이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토 신관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요한이 우아하게 일어나 베르토 신관의 앞으로 걸어갔다.
“성녀가 내 마음대로 하라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성녀님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은 제 책임입니다.”
베르토 신관은 두 눈을 감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제 목숨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블란쳇 공작님께서도 그 정도면 만족하시겠지요.”
“무슨 착각을 하는 거지?”
요한은 픽 웃으며 발로 베르토 신관의 무릎을 꽉 눌렀다.
“감히 네 목숨값 같은 걸 내가 받아봐야 뭘 하지?”
“끄으윽-!”
무릎을 밟힌 베르토 신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듯해서 하나 말해주지.”
요한이 베르토 신관의 뒤통수를 붙잡아 자기를 올려다보게 했다.
“블란쳇 공작가가 복권되면서 내가 만든 새 가훈이 있다. 들어본 적 있나?”
요한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이 베르토 신관을 조롱하듯 그의 앞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죽음을 각오한 듯해 보였던 베르토 신관도 막상 죽으려니 겁이 나기는 한 모양이었다. 베르토 신관이 기절할 듯이 몸을 떨었다.
“[봄이 오더라도 겨울을 잊지 말라.]”
단검이 빠르게 베르토를 향해 휘둘려졌다.
촤악-
“으아아악!”
베르토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피가 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검에 잘려나간 베르토의 갈색 머리카락이 한발 느리게 공중을 부유했다.
“이, 이건 무슨…….”
베르토가 급히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거렸다. 손에 옅은 피가 묻어났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단검은 베르토의 머리카락과 볼을 가볍게 그었을 뿐이었다.
‘주, 죽지 않았어?’
베르토는 놀란 눈으로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눈앞을 스쳤는데…….’
요한 블란쳇 공작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단검을 든 채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포에 휩싸인 베르토는 그 얼굴만 봐도 기절할 것 같았다.
“내가 말했지 않나.”
“…….”
“네 목숨값은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딸꾹질을 시작한 베르토에게 요한이 나른하게 말했다.
“신전에 돌아가서 전해. 지금 누구와 거래하고 있는지 기억하라고.”
베르토 본인이 신전에 돌아가 블란쳇 공작가에 보낼 보상을 마무리 지으란 이야기였다.
“아, 알겠습니다.”
“다음엔 고할 혀가 없게 될 거다.”
베르토가 사색이 된 얼굴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뒤를 돌아 천천히 에스텔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신관들이 베르토 신관에게 급히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베르토 신관?”
“겨, 겨우 살았어…….”
요한은 에스텔에게 다가가 자상하게 뭔가를 물어보았다.
에스텔이 그 얘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대조될 정도로 달달한 분위기가 흘렀다.
숨을 돌린 채, 제 갈색 머리칼을 움켜쥔 베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가짜라는 소문은 거짓 같은…….’
그 순간 베르토의 눈에 스텔라 성녀가 들어왔다.
베르토에게 다가와 위로해 줄 줄 알았던 스텔라가 멍하니 블란쳇 공작 부부를 보고 있었다.
요한이 에스텔을 끌어안은 채 사용인들을 향해 턱짓했다.
“손님들이 나가게 안내해.”
명백한 축객령.
요한의 시선이 오도카니 선 성녀를 향했다.
“앞으로 성녀는, 다시 안 봤으면 좋겠군.”
“블란쳇 공작님. 이번 일은 저도-”
“한 번만 더 내 눈에 거슬리게 했다간.”
요한이 살기 어린 눈으로 스텔라를 노려보았다.
“성녀라도 죽여버릴 줄 알아.”
***
원래 이 이후엔 성녀 일행을 위한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고치고 쫓겨난 탓에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그사이 난 오랜만에 나무들을 보러 가려 했다.
요한이 날 걱정하며 물었다.
“혼자 가도 되겠어?”
“치료는 잘했는지, 발목 진짜 멀쩡해.”
심지어 몸에 활력이 돌기까지 했다.
‘확실히 신성력이 대단하긴 해.’
왜 많은 신관이 보물처럼 성녀를 모셨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발목 치료하고, 이 정도 컨디션 회복하자고 성녀를 부르자니.
‘차라리 아프고 말겠어.’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요한에게 물었다.
“지금 따로 할 일 있지 않아?”
당장 요한은 신전 측에서 오늘의 무례를 발뺌하지 못하게 바로 공식 서한을 넣을 게 뻔했다.
요한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너와 정원을 돌고 나서 해도 돼.”
“블란쳇 공작저의 정원이 얼마나 안전한데. 요한은 요한의 일을 하러 가.”
요한은 조금 뒤 만찬에서 다시 만나자는 내 말을 듣고서야 움직였다.
‘요즘 들어 요한이 더 안 떨어지려고 한단 말이지.’
기분 나쁘거나 하진 않았지만, 요한 몰래 일을 꾸미기가 더 어려워졌다.
‘요한은 나보다 일이 더 많을 텐데.’
도대체 언제 일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혼자가 된 걸 확인한 난 나무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나무님, 원하시던 대로 거름은 마음에 드세요?”
-꼭 그렇게 잘해주지 않아도 됐는데.
-맞아, 우리는 진짜 예전처럼 방치되어 있었어도 괜찮았다.
“거짓말! 올라오면서도 계속 눈치 줬으면서.”
나무들은 모르는 척 둘러댔다.
-어느 나무 놈이 우리 아가에게 그런 걸로 눈치를 줬어?
-그런 꼬장꼬장한 나무가 있다니! 나무의 수치다!
-어떤 나무 놈인진 몰라도 지금 자수하면 우리가 불명예를 좀 덜……
“그때 다 같이 말하고 계셨던 거 알거든요?”
당시 나를 걱정한 나무들 모두 일어나 대기 중이었다.
-그,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뭐, 괜찮아요. 저한텐 아무것도 아닌데요.”
솔직히 나무들이 해주는 일에 비하면 더 해줘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대신 저 정원 좀 돌아보다가 갈게요.”
-정원? 요정의 힘을 써보려고?
“네. 시간 날 때마다 써보려고요.”
요정의 힘은 요정마다 달라서 나무들도 잘 알 수 없다고 했다.
현재 난 무의식적으로 요정의 힘을 쓸 수 있었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했지.’
그래서 나무들이 정원을 이용해 보라며 추천했다.
‘꽃을 돌보며 아끼는 마음을 주는 거랬나?’
사실 아끼는 마음과 요정의 힘이 어떤 관련이 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나무들이 쓸데없는 조언을 해주진 않았을 테니, 꾸준히 연습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내 요정의 힘이 어떤 건지 알게 되면, 나도 나만의 무기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걸 테니까.
-그 덤불 근처를 한번 조심스레 어루만져보렴.
무성한 덤불에 초여름의 장미가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이렇게요?”
-조금 더 집중해서!
나는 조심스레 장미 봉오리를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내 손등 위로 연두색 나뭇잎 문양이 떠올랐다.
그때 건너편에서 신관들이 화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감히 성녀님을 이리 홀대하다니! 역시 블란쳇 공작가는 신조차 무시하는 죄인입니다!”
“맞습니다, 성황 폐하께 아뢰어 블란쳇 공작이 더 나서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직 안 돌아갔어?
‘그보다 요한이랑 있을 때랑 다들 태도가 너무 다른데.’
심지어 여긴 블란쳇 공작가의 정원이었다.
“모두가 신의 뜻을 이해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스텔라 성녀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들 성황 폐하껜 비밀로 해주세요. 아마 제가 겪은 일을 알면 슬퍼하실 거예요.”
“성녀님. 그런 수모를 겪으셔 놓고도…….”
“역시 그 가짜와는 태도 자체가 다른 아량이십니다.”
나는 덤불 사이에서 고개를 쏙 빼내 그들을 보았다.
“블란쳇 공작도 공작이지만, 그 가짜는 도대체 무얼 믿고 그리 성녀님을 괄시한 겁니까?”
“성녀님께서 뭘 그리 잘못했다고. 오히려 며칠 쉬기만 하면 나을 조그만 상처를 성녀님께서 몸소 오셔서 치료해 주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블란쳇 공작도 그 가짜 때문에 더 성녀님을 함부로 대한 것 같던데…….”
익숙한 얘기들이라 별생각도 안 들었다.
‘신전도 다 똑같이 생각하고 있네.’
특이한 점은 베르토 신관이 가만히 있다는 거였다.
“베르토, 자네가 가장 심하게 겪지 않았나? 뭐라도 말해보게.”
“아, 나는…….”
“베르토 신관님은 쉬게 두세요. 저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로 고생하셨는데…….”
근처에 있던 다른 신관이 역정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성녀님께서 자책할 일이 아닙니다.”
“감히 성녀님을 오라 가라 한 것도 모자라 공작이 그렇게 움직이게 조종한 가짜가 문제이지요! 신의 벌을 받아도 모자란…….”
나는 신관들의 험담을 하나하나 귀담아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마침 조금 있다가 만찬에서 요한을 만나는데.
‘다 기억해 뒀다가 말해줘야지.’
그때 짐승이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크와앙-!
신관들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크게 놀랐다. 몇몇은 뒤로 넘어지기까지 했다.
신관들이 공포에 질려 마물을 바라보았다.
“으아악! 저, 저 삿된 마물은 도대체…….”
내가 공작령에서 봤던 흑표범 마수였다.
‘아, 도착했구나.’
에리히가 흑표범 마수를 끌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손님분들께선 왜 아직 저택에서 나가지 않고 여기 계시는 겁니까?”
“서, 성녀님께서 잠시 다리가 아프시다고 하시어서…….”
신관은 대답하면서도 흑표범 마수를 연신 힐끔거렸다. 흑표범 마수는 신관을 금방 씹어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그보다, 그 삿된 마물을 당장 치우지 않을 것이오? 위, 위험하게-!”
“여긴 블란쳇 공작저입니다. 제가 손님분들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위험하지 않은가!”
흑표범 마수는 입을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진정하세요, 여러분.”
스텔라가 침을 꿀꺽 삼키며 신관의 앞에 나섰다.
“공작님께서 기르시는 것이니만큼 안전할 거예요.”
스텔라는 흑표범 마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나는…….”
“크왁!”
흑표범 마수는 스텔라의 말이 짜증 난다는 듯 크게 짖었다.
“꺄악!”
스텔라가 깜찍하게 눈을 질끈 감으며 주저앉았다. 다행히 흑표범 마수가 덮치기 전 에리히가 목줄로 제지했다.
“저택에서 나가면 더 겪으실 일 없을 겁니다.”
스텔라는 흐트러진 금발과 베일을 정리하며 청초하게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성녀로서 도움만 받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치맛자락을 조심스레 펼치며 일어선 스텔라가 에리히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나요?”
“당장 나가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에리히가 까칠하게 말했다. 난 그런 에리히를 보며 감탄했다.
‘쟨 정말…….’
나뿐만 아니라 공평하게 싸가지가 없었다.
“그런데 왠지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스텔라가 에리히의 손을 붙잡았다. 흰 신성력이 에리히의 장갑 아래에 스며들었다.
에리히가 움찔하며 손을 확 빼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죄송해요, 성녀인 저는 타인의 고통을 감지할 수 있거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스텔라에게서 떨어진 에리히는 짜증스럽게 제 장갑을 벗었다.
에리히의 청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화상 흉터가, 전부…….”
아무래도 저 아래엔 화상 흉터가 있었나 보다.
‘베티가 말한 가족이 에리히였구나.’
오빠라고 얘긴 했어도 그게 에리히가 맞는지 고민했다.
‘에리히가 맞았구나.’
어쩐지 내게 보내던 에리히의 적의가 좀 이해가 가는 기분이다.
에리히는 다른 쪽 손에도 흉터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멍하니 스텔라를 보았다.
스텔라가 에리히를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그래도 제 보답이 도움이 되었을까요?”
“……성녀님께서는 확실히 아량이 넓으시군요.”
“저도 도움을 받았는걸요.”
“지금 제가 성녀님께 감동받은 것처럼 보입니까? 정신세계가 다른 분답게 눈도 이상하시군요.”
에리히가 이를 꽉 깨물며 품에서 날카로운 검을 꺼냈다. 그리고 제 손등을 쑤셔 상처를 냈다.
콱!
기껏 새 살이 돋아난 손 위로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왜, 왜 손등에…….”
“당연히 성녀님 때문입니다.”
에리히가 스텔라를 보며 다른 쪽 손에도 상처를 냈다.
“성녀님의 오지랖은 매달리는 신도들한테나 해주지 그랬습니까. 저처럼 필요 없는 사람 말고.”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베티가 험담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리히, 걘 원래 성격이 더러워요. 제 오빠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요. 진짜…… 싸가지가 아주.’
베티야. 네 말 아주 정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