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네가 나서지 않게 내가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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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네가 나서지 않게 내가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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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네가 나서지 않게 내가 해줄게
2022.05.17.
스텔라가 맑고 푸른 눈동자로 요한을 뜨겁게 바라보았다.
‘꼭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만난 것 같은 눈빛이네.’
스텔라는 이내 수줍게 긴 속눈썹을 내리며 다시 남자 신관의 뒤에 숨었다.
스텔라 앞의 신관이 그녀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 바깥에 익숙하지 않아 수줍음이 많으십니다. 배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스텔라의 청순한 얼굴을 티 안 나게 살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아무리 봐도 그녀는 예스텔라 리베르탄이 맞았다.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꿀처럼 긴 금발과 아침 햇살처럼 맑고 청순한 이목구비, 탑 속의 공주님처럼 고귀한 자태까지.
꿈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꿈이 말하고자 했던 게 이거였나.’
죽은 줄 알았던 예스텔라 리베르탄이 살아 있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날 속였던 거야?’
하지만 딸을 잃은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슬픔은 진짜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나는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다들 성녀의 얼굴에서 예스텔라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상적인 반응이 아닌데.’
그들 모두 예스텔라의 어린 시절 초상화를 봤을 거다. 비슷한 외향에, 이름까지 비슷하다.
‘어떻게 나만 알아볼 수가 있지?’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려봤다.
‘아니면 지금 내가 과민반응하고 있거나.’
그때 스텔라 성녀가 신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신관에게 작게 속삭였다.
“역시 제가 괜히 왔나 봐요.”
이 자리의 모두에게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성녀님. 모두가 성녀님을 반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 불편해하시는 것 같은걸요.”
스텔라의 시무룩한 눈빛이 나를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신관을 비롯한 모두가 내 얼굴을 바라봤다.
‘정말 신관 말대로 낯을 가리는 성격인 걸까?’
일단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려던 순간.
“신관을 찾기는 했지.”
요한이 나보다 먼저 대답했다.
“에스텔의 몸이 약해서, 고위 신관 정도 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방금 전 성녀가 했던 말 같은 건 깔끔히 무시한 태도였다. 요한의 대답에 성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블란쳇 공작님은 참 자상하시네요.”
스텔라가 입을 작게 가리며 배시시 웃었다.
“어쩌면 제가 블란쳇 공작가에 온 것은 운명의 부름이었나 봐요.”
“그런가?”
요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난 성녀가 내 집에 온 게 불편한데.”
“예?”
“방금 전 했던 말, 나 들으라고 한 말 아니었나?”
눈을 크게 깜빡거린 스텔라가 어쩔 줄 모르고 신관의 소매를 당겼다.
“베, 베르토…….”
“괜찮습니다, 성녀님.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베르토 신관이 요한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블란쳇 공작님께서 공작 부인의 치료를 위해서 저희에게 부탁하신 것 아니십니까? 성녀님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나야말로 네 반응이 우스운데.”
“도대체 뭐가 문제여서-”
“하나하나 다 짚어줄까?”
요한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내가 한 건 부탁이 아니라 거래였지. 노골적으로 말하면 명령과 협박이었고.”
“…….”
“대놓고 그런 소리를 하고, 안 들리길 바란 것도 우습지 않나.”
“…….”
“더 이상 내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곤란해.”
베르토 신관이 입매를 떨며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베르토 신관은 성녀를 대신해 요한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께서 귀족 가문에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 오해를 산 모양입니다. 저희 쪽에서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행동하겠습니다.”
“다음번은 없어.”
요한은 나를 확 안아 들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들어가도 되나?’
뒤로 스텔라가 ‘전 괜찮아요, 제가 좀 더 공작님의 마음에 들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신전 측에서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내가 봐도 요한의 행동이 좀 과했어.’
내 눈에 성녀가 예스텔라로 보여서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잘못한 건 없다.
잘못하면 괜히 블란쳇 공작가에서 기껏 초대한 성녀를 홀대했다는 악소문까지 돌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요한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요한. 신관들 때문에 많이 불편했어?”
“그건 왜?”
“평소 요한이라면 그 정도까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요한은 대답 대신 날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너는 괜찮아?”
“나?”
“난 크게 불편하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불편한 게 느껴졌지.”
최대한 당황을 숨기려 했지만, 가까이 있던 요한에게까지 감출 순 없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성녀가 묘하게 먼저 너를 무시하는 듯 나한테만 인사한 것 같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다.
헤텔 백작가에서 겪었던 것처럼, 성녀는 노골적이지 않았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냥 넘겼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요한은 넘기지 않고…….’
직접 나서서 성녀와 신전에 경고해 주었다.
그 순간, 난 내가 성녀를 본 순간부터 불안해하고 있단 사실을 자각했다.
“이럴 땐, 네가 나서는 것보다 내가 나서는 게 더 괜찮거든. 쓸 수 있는 것도 많고.”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니 성녀가 널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면 얘기해. 알았지?”
난 불편하지 않았다느니, 이럴 필요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간질간질한 손가락을 배배 꼬며, 그에게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
***
치료는 내 방에서 이루어졌다.
요한의 경고가 심히 잘 들었는지 성녀는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붕대를 풀어 내 상처를 확인한 스텔라가 눈썹을 내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런. 발목을 심하게 다치셨군요. 어쩌다가…….”
발목의 상처를 보고 있으니, 새삼 신기했다.
공작저에 올라오기 전, 나는 내 발목의 상처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결에 침대 기둥에 부딪혀서 다친 거야.’
‘그렇게 세게 부딪쳤다고?’
‘잠버릇이 예상보다 나쁘던데.’
솔직히 내 잠버릇에 대해 듣는 건 몹시 부끄러웠지만 수확은 있었다.
리베르탄에서 생긴 흉터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다행히 신성력으로 치료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스텔라가 내 발목을 감쌌다.
스텔라의 손에서 흰 기운이 나와 내 발목에 스며들었다.
‘진짜 쉽게 치료되잖아.’
퉁퉁 부어 있던 내 발목이 빠르게 치료되기 시작했다.
“와…….”
왠지 접한 것만으로도 따스하고 친숙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손을 떼어낸 스텔라가 힘겹다는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힘든가?’
하지만 그런 것치곤 그녀는 식은땀 하나 나지 않았다.
주변의 신관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극성맞게 스텔라를 챙겼다.
“성녀님. 무리하신 것은 아닙니까?”
“맞습니다. 치료의 기적을 행하시다 쓰러지실 때도 있으시지 않았습니까.”
스텔라는 신관이 챙겨주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성녀님…….”
“성녀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신관들을 안심시킨 스텔라가 요한을 보며 생긋 웃었다.
“이제 블란쳇 공작님께서 제 앞에 앉아주시겠어요?”
요한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나를 말하는 건가?”
“네. 블란쳇 공작님도 제 진료를 받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스텔라는 청초한 얼굴로 사근사근 대답했다.
“몸에 아무 이상이 없어도 신성력으로 진료를 받으면 좋거든요. 미리 확인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제 두 손을 잡아주시면, 바로 확인할 수 있거든요.”
요한은 팔짱을 끼며 대답 없이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때 베르토 신관이 스텔라의 어깨를 붙잡으며 끼어들었다.
“스텔라 성녀님의 치료 능력은 신전 내에서 가장 뛰어납니다. 웬만한 추기경분들의 신성력을 압도하는 신성력을 갖추셨고요.”
“그래서, 치료를 받으라?”
“블란쳇 공작님께서 염려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아마 성녀님께서는 방금 전 불편했던 응어리를 풀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베르토 신관의 물음에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방금 전 제가 실수해서인 것도 있지만, 어째서인지…….”
고민하는 듯했던 스텔라는 긴 속눈썹을 아련하게 내리깔았다.
“블란쳇 공작님의 안에서 깊은 상처가 느껴져서요.”
“그런 뜻이.”
베르토 신관이 감탄하며 나를 콕 집어 쳐다보았다.
“블란쳇 공작 부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부인께서도 부군을 치료하면 좋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왠지 조금 전 상황이 또 되풀이되는 기분이다.
‘치료를 위한 거잖아.’
여기서 거절했다간, 치료하려는 성녀를 질투한다는 악소문이 퍼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긴 했다.
“제 생각보다는 당사자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래도 부인께서 말씀해 주시면-”
그러자 요한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나직이 성녀에게 물었다.
“그보다, 지금 내 부인의 치료는 다 끝난 건가?”
“네. 다 끝났어요.”
“발목 외에도 아픈 부분은 없고? 정확히 어떻게 치료했지?”
요한의 냉정한 말에 스텔라가 입가를 움찔 떨었다.
“날 검진하는 것보다 눈앞의 환자를 더 챙기는 게 상식 아닌가?”
“성녀님께서 말씀은 안 하셨어도 방금 전 공작 부인을 다 치료하시어서 말씀드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네가 성녀라도 되나?”
요한은 고압적으로 다리를 꼰 채 베르토 신관에게 물었다.
베르토 신관 역시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스텔라가 안쓰러울 정도로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신도가 아닌 분을 치료하는 게 처음이라, 실수하고 말았네요. 제 수양이 부족한 탓이에요. 많이 불편하셨나요?”
어차피 치료도 다 끝난 김에 넘어가도 되긴 했다.
그런데 두 번은 싫었다.
“네, 불편했어요.”
“……네?”
“성녀님 말대로 수양이 좀 부족하신 것 같네요. 제 남편이 괜히 화가 난 건 아니거든요.”
난 스텔라에게 생글생글 웃어주었다.
“저야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귀부인들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스텔라는 내게 폭언이라도 들은 양 반응했다.
“그, 그럴 수가, 죄송해요. 그렇게까지 불편하실 줄은…….”
스텔라의 내려간 눈매에 미약한 물기가 서렸다.
근처의 신관들이 귀한 성녀의 반응에 무섭게 반응하려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성녀님. 지금 우시려는 거예요?”
“아, 저는…….”
“아. 제게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나신 거군요.”
나는 작게 감탄하듯 박수 쳤다.
“역시 성녀님은 고결한 성품을 지니셨군요. 하지만 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베르토 신관이 내게 말했다.
“공작 부인, 성녀님께서 힘들어하시지 않습니까?”
“성녀님께서 힘들어하신다고요? 베르토 신관님께서 성녀님을 오해하시는 거예요.”
베르토 신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했다.
“그게 무슨-”
“고귀한 성녀님께서 어렵게 조언해 준 사람이 곤란하게 우실 리 없잖아요.”
한창 스텔라를 대변하던 베르토 신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대대로 성녀님께서는 자애로워, 타인의 고통과 신께 감사하는 마음에만 눈물을 흘린다고 성경에 나오던걸요.”
스텔라가 말갛게 웃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녀님. 베르토 신관님이 오해하신 게 맞죠?”
가만히 베르토 신관를 곁눈질한 스텔라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예, 맞아요.”
베르토 신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스텔라의 말은 바뀌지 않았다.
“전 부인께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흘린 거였어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요한이 헛웃음 쳤다.
“하.”
요한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베르토 신관을 향했다.
“거슬리게 할 일 없게 하겠다더니.”
“…….”
“멋대로 과해석해서 내 아내를 몰아붙이기까지 하네.”
베르토 신관이 사색이 되어 변명하려 했다.
“저는 단지 성녀님을 위해서-”
“그러면 성녀 때문이라고?”
한낱 신관이 성녀를 방패막이로 쓸 수는 없다.
“……아닙니다.”
“그러면 네가 해야 할 건 뭘까?”
우아하게 일어선 요한이 베르토 신관 뒤에 있는 스텔라에게 물었다.
“성녀는 이 일을 어떻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스텔라의 두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렸다. 베르토 신관은 성녀를 구명줄처럼 바라보았다.
“성녀님……!”
스텔라가 분홍색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