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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그때도 네 곁에 내가 있었다면 (44/182)


44화 그때도 네 곁에 내가 있었다면
202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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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숲이 검은 불길로 넘실거렸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더 장렬하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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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믿음을 주려면 어느 정도까지 보여주는 게 좋을까?”

요한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숲에 번진 검은 불이 폭발하며 크롤린들이 쓸려나갔다.

콰앙-! 쾅!

검은 불길이 튄 곳마다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제국의 기사단이 출동해서 잡는 마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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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크롤린을…….’

요한은 학살하고 있었다.

소리에 민감한 내가 나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리자, 요한이 내 귀를 막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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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끝나.”

검은 불길에 휩싸인 크롤린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검은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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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와아아악-!”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보기만 해도 오싹할 정도의 풍경인데,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요한한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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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도 괜찮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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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무서워?”

요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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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해칠 만한 건 모두 없애고 있는데.”

내 시선이 거칠게 휘몰아치는 요한의 기운에 닿았다. 통제하지 않고 풀어놓은 요한의 흑마력들은 쉴 새 없이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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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방금 전까지 어렵게 잡았던 크롤린이다. 거기다 여기는 마물 숲, 이 정도 힘쓰는 게 쉬울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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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나은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심지어 그땐 보호 마법도 있었다.

보호 마법이 없는 지금, 요한이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잘 가지 않았다.

요한이 픽 웃으면서 내 어깨에 제 겉옷을 걸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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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더 걱정돼. 너덜너덜하지만 그래도 안 입는 것보단 나을 거야.”

옷소매 한쪽이 사라지고 마물의 피로 뒤덮인 요한의 외투. 하지만 그래도 요한의 온기가 느껴져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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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같이 돌아가면 되겠다.”

요한이 그 상태로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장대비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검은 불, 황폐하게 무너진 숲, 갈라진 땅, 불에 타 마물이 내지르는 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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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멸망하기 직전 같아.’

오로지 요한과 내 주변만이 멀쩡했다.

요한은 그런 소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무관심하게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한 기사 무리가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모두 블란쳇 공작가의 깃발을 내건 이들이었다.

***

크롤린 마물 떼가 전부가 아니었다.

블란쳇 공작령 곳곳에서 갑작스레 마물과 관련된 사건들이 터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블란쳇 공작성 자체는 무사했다. 많은 일을 겪었던 가문답게 대비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요한이 크롤린 마물 떼를 한 번에 정리해 버렸기 때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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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크롤린의 목표가 나인 거 같지?’

설명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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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요정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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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이 마물과 관련되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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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요정이 신의 핏줄이라면, 마물은 신과 반대되는 혼돈의 존재지. 어쩌면 그래서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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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태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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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도 그게 참 이상하구나. 아무리 마물 숲이라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나무들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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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 숲 나무들은 우리와도 대화가 안 되는 나무들이란다. 오염된 땅에 너무 물들어서 여름의 축복을 잃어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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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축복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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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가 너를 낫게 하기 위해 기도했다는 것. 그것도 우리에게 있던 여름의 축복을 나눠준 거란다.

여름의 축복.

신이 나무에게 주었다는 태초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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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에게 그런 귀한 축복을 주셔도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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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걸 다 걱정하는구나. 나눠서 사용해서 별일도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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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게다가 이 여름의 축복은 원래 요정이 나무에게 준 선물이었단다. 너를 위해서 써서 우리 오히려 참 기쁘단다.

나무와 요정은 가까운 존재였던 것 같은데, 나무에게서 요정에 대한 정보를 듣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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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으면서, 왜 자세히 아는 분이 없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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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우리도 잘 모르겠구나. 우리가 나무라서 잊어버리고만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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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누군가를 계속 기다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를 만나는 순간까지 그게 누구인지 몰랐단다. 그리고 널 보는 순간 깨달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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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속 너를 기다려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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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잠시 고민에 잠겨 있는데, 요한이 나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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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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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여기.”

나는 아픈 요한에게 수프를 다시 떠먹여 주었다. 요한은 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내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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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맹수를 길들인 것 같은 기분이네.’

내가 요한을 보살피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공작성은 아주 발칵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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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주인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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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의사를 데려와! 주인님께서-’

블란쳇의 유일한 주인인 요한의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내 눈으로 보이던 상처 외에도 내상이 심각했다. 하지만 요한은 단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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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부터 진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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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지만 주인님의 상처가 더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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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명령이 들리지 않나?’

요한이 최선을 다해 지킨 덕분에 나는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의 명령에 의사는 내가 비를 오래 맞아 병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진찰하고서야 요한을 치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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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아무리 주인님이셔도 최소 이삼 일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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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주인님께서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의사로서의 소견이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들 요한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요한이 무서운 주인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때 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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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한을 보살펴도 될까요? 들어보니 큰 기술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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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께서 말입니까? 그러신다면야 저희는 무척 감사하지요.’

다행히 요한 역시 내 간호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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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에스텔이 간호해 주면 좋지. 오붓하게 시간도 보낼 수 있고.’

그렇게 나는 요한의 식사 시중과 침실 시중까지 보게 되었다.

물론 내가 따로 힘들게 준비하거나 할 일은 없었다. 공작성에서 미리 다 준비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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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블란쳇 공작성 사람들도 좀 의외야.’

난 블란쳇 공작가 사람들이 날 안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요한과 붙어 있기는 해도, 미움받는 감정 같은 건 잘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날 미워하는 감정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환대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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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요한이 수를 쓴 걸까?’

그것참 다재다능한 흑막이다. 어느 정도 죽을 다 먹인 내가 요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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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아픈 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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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부위가 좀 불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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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그런가? 지금 봐줄게.”

나는 요한의 상처 부위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때 요한이 확 나를 끌어안아 침대 옆에 놓았다. 내 목덜미에 높은 콧대를 문지른 그가 ‘좋다’ 하고 나른한 숨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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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옆에 없어서 불편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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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어차피 바로 앞에서 먹여주고 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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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고 있는 거랑은 다르거든.”

요한은 상반신에 두른 붕대 위에 옷을 입지 않은 채였다. 붕대가 사그락거리며 그의 몸이 선명히 느껴졌다.

내가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자, 요한이 피식 웃으며 ‘어딜’ 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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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자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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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제 저녁이잖아.”

몸을 파고드는 단단한 근육, 귀에서 달싹거리는 그의 입술, 쌉싸래하면서 묵직한 요한의 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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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대로 자버릴까?”

그가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귓가를 간질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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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랑 있다 보면 맨날 휘둘려.’

솔직히 남한테 잘 휘둘리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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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그러면 이대로 자자.”

나는 요한을 향해 돌아누워 눈을 마주쳤다.

한 베개를 베고, 숨소리도 들리는 가까운 거리. 서로의 눈을 보고 누워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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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요한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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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잠이 안 오네. 네 이야기를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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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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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상관없어. 편한 대로.”

리베르탄에서 있었던 일은 숨길 게 많아서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딱 하나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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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줘도 재밌는 얘기는 없는데.”

라비안느 고아원.

귀족인 요한이 내 평민 시절 이야길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요한이 나를 잡아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나를 품에 안은 채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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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해줘. 너에 대해 알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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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에서는 수십 명이 함께 지냈어. 워낙 고아들이 많았으니까. 정신없는 곳이었지.”

어느 시대나 그렇듯 세상에는 버려진 아이들로 넘쳐났다.

나 역시 그런 애였다.

부모를 알 수 없는 어린아이. 버림받은 어린애.

내가 어쩌다가 그 고아원에 있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원장이나 선생님들까지도.

너무 많은 애가 버려지고 도망가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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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아원에서 가장 약하고 작은 애였어. 원장 선생님은 한 입 덜겠답시고 날 버리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작아서인지 멍청해서인지 보내려던 것도 까먹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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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멍청해서였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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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어. 화가 날 때마다 애들한테 화풀이해서 한 번은 진짜 맞아서 죽을 뻔…….”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 살기가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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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말해봐. 그 원장이란 새끼들이 어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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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난 일이야. 더 신경 쓰이지도 않고.”

내가 천사라서 원장을 감싸는 건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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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 오래 지난 일인걸.’

게다가 리베르탄에서 지냈던 때를 생각하면, 고아원에 있었을 때는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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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고아원에서 작은 애는 타깃이 돼. 거기 있던 남자애나 여자애 중에서도 날 괴롭힌 애들이 많고.”

생각해 보면, 참 여기저기서 미움을 많이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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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뼈대마저도 우아한 긴 손가락이 내 뺨을 차분히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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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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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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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괴롭혔다는 새끼들. 하나하나 다 찾아서 복수해 줄게.”

그가 고요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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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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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부인을 괴롭혔다는 못난 새끼들한테, 화가 난 거지.”

어떻게 괴롭힘당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고아원은 너무 척박했고, 어린애들끼리도 서로 물어뜯으면서 버텨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복수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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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괜찮아. 지금 내 옆에 요한이 있잖아.”

요한은 내 천진한 말에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느릿하게 나를 제 품 속에 꽉 끌어당겼다. 요한의 온몸이 나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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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네 곁에 내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한숨같이 나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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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면 내가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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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을까?”

아마 그때 리베르탄에 입양되지 않고, 요한을 만났다면.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만나지 않았겠지.

네가 내게 복수하겠다고 배신하는 일도, 내가 너를 무서워하는 일도 없었겠지.

좋은 생각을 할수록 그러지 못한 현실이 떠올라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어차피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원수인 리베르탄의 입양아가 되었고, 그는 바닥부터 기어올라 리베르탄의 복수귀로 자랐다.

두 손을 꼭 모으며,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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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우리는 이렇게 부부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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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내가 어떻게든 널 찾아내서 결혼했을 테니까.”

하지만 요한은 내게 절대 진실을 말해주지 않고, 나 역시 그에게 비밀을 밝히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허상을 보고 있다.

이 포근한 온기와 애정이 전부 언젠가 사라져 버릴 가짜에 불과하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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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고 빌어!’

그때 너는 진짜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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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울면서 빌면 내가 다 들어줄게.’

나는 가짜야.

그래서 진짜를 가져본 적 없어.

하지만 진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그런 표정으로 내게 그렇게 말해줄 것 같았어.

요한이 내 미소를 보고 볼에 뽀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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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무슨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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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요한이 얘기해 준 또 다른 우리.”

그토록 많이 배신당했는데도, 요한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도망칠 방법을 완전히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러니 요한을 믿으면서 언제든 대비해 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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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요한이 나를 찾아주면, 기쁠 것 같아서.”

난 요한의 단단한 품속에 파고들어, 그의 온기가 주는 위로에만 집중했다.

***

에스텔은 그 상태로 잠들었다.

요한은 쌔근쌔근 자는 에스텔의 등을 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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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네.’

정말 토끼처럼 사랑스러운 여자다.

경계심을 세우다가도 금세 눈을 크게 뜨며 쫄래쫄래 그를 쫓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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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띤 요한의 머릿속에 리베르탄의 전통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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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 마법에 대해서 처음 듣는 모양새였지.’

마법의 문외한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법한 반응이다. 하지만 리베르탄이라면 모르기 어려운 분야기도 했다.

리베르탄에는 대대로 내려져 오는 수호 마법이 있었다.

요한은 손에 미약하게 마력을 담았다. 마법을 써서는 안 되지만, 이 정도 마력을 다루는 건 괜찮았다.

조심스럽게 잠든 에스텔의 옷깃을 들춘 요한이 에스텔의 쇄골 아래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리베르탄의 자손들이 수호 마법을 새기는 위치다.

그런데 에스텔에게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그 아래쪽으로, 칼자국 같은 흐린 흉터가 설핏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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