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울면서 빌어봐 (43/182)


43화 울면서 빌어봐
202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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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비가 마물 숲을 잔뜩 적셨다.

어두컴컴한 숲, 시커멓게 물든 하늘, 쏟아져 내리는 비와 낮게 그르렁거리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크롤린들.

손을 잡은 채 희미하게 미소 짓는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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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난 괜찮아.”

에스텔은 금방이라도 저 거대한 것들에 짓눌려 사라질 것 같았다.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다. 요한이 버리고 가버린다면, 에스텔은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당장 크롤린들이 달려들지 않는 것도 요한을 경계해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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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우면서.’

무심코 자신을 잡으려던 손은 떨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채자마자 재빨리 태연한 척했지만 요한을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붙잡으려는 건가 했다. 하지만 에스텔은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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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에스텔이 요한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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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이러다 도망치고 가려고 해도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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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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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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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버리고 가는 일은 없어.”

요한의 눈치를 보던 크롤린 한 마리가 그에게 뛰어들었다.

서걱- 요한이 검으로 크롤린을 찍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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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 숲만 아니었어도.’

마물 숲의 기류가 흑마력을 방해했다. 해서 검술로 적들을 무찌르는 수밖에 없었다.

크롤린 여러 마리가 동시에 뛰어들었다.

요한은 이를 꽉 깨물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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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죽이는 건 힘들어.’

그렇다면 당장 에스텔을 공격하기 어려운 부상 정도를 입히는 거다.

검으로 달려드는 한 마리의 다리를 자르고, 또 다른 하나는 발로 짓밟았다.

곧이어 뒤를 노리는 놈 하나는 손으로 바닥에 처박은 뒤 검을 꽂아 죽였다.

하지만 아무리 효율적으로 싸워도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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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둘이 가는 게 아니었어.’

제 실책을 뼈저리게 실감 났다.

요한이 에스텔과 단둘이 왔던 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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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 숲에서 둘이서 빨리 빠져나가서 마법으로 이동할 생각이었지.’

기존 크롤린의 행동을 생각한다면 크게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크롤린은 애초에 무리 지어 다니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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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롤린들의 목표가 에스텔이었어.’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뿔뿔이 흩어진 기사들을 도로 데려올 수도 없었다.

남은 크롤린은 열.

뒤에서 다가오는 마물이 느껴졌지만, 당장 없애야 하는 건 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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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나무 아래로 피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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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에스텔은 요한이 지키기 쉽도록 지시에 따랐다.

에스텔은 주변에 돌을 주워 들었다. 나름 돌로 공격하려고 하는 듯하지만 큰 전력이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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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크롤린이 에스텔을 노릴 거야.’

그 전에 처리해야 한다.

이번에 요한은 먼저 크롤린에게 달려들어 목에 검을 꽂으려 했다.

카앙-

그때 크롤린이 기괴한 입을 벌려 요한의 검을 까득 물면서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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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와악!”

다른 크롤린이 요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요한은 검을 놓고 버티던 크롤린이 주춤하게 한 뒤, 손으로 다른 크롤린의 턱 아래를 꿰뚫어 죽였다.

그러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다들 몇 번이고 쑤셔주어야 했다.

지겨운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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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둘.”

두 마리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동시에 달려들 준비를 했다.

뜯길 뻔한 팔뚝의 한쪽 소매가 너덜거리고, 다친 팔뚝에서 피가 흘렀다. 힘을 무리하게 써서인지 손아귀가 저릿했다.

하지만 지치기는커녕 자꾸 머리가 뜨거워졌다.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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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혼자서 가.’

에스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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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면 도망칠 수 있지?’

요한이 에스텔을 버리고 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가 피로 물든 검을 고쳐잡으며 오만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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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크롤린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제법 성가시긴 했지만, 처리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마지막 놈을 상대할 땐 무리하게 힘을 써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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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 끝났어.’

여기로 달려오는 크롤린의 기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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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틈에 마물 숲에서 빠져나가야 해.’

요한이 이마를 찌푸리며 가슴팍을 꽉 붙잡았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무리하게 힘을 끌어내 내상을 입은 것 같다.

그렇게 요한이 숨을 돌리고, 나무 뒤에서 웅크린 채 그를 기다릴 에스텔을 보려고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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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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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거야?”

그때였다. 공중에 떠서 달려드는 크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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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가 더 있었어?’

에스텔의 머리 바로 위에 있었다.

머리로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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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요한은 땅을 박차고 걸음을 달렸다.

무리하게 흑마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통제되지 않은 흑마력이 마구 날뛰었다.

상관없었다.

요한은 무작정 크롤린을 향해 휘둘렀다.

쿠왕…… 으드득!

크롤린이 요한의 손에 꿰뚫려 나무에 박혔다.

땅에 크롤린의 피와 나무 잔재, 흙먼지가 튀며 지진 같은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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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상처가-”

에스텔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간 남색 눈동자가 놀란 듯 크게 떠졌다.

크롤린의 뜨거운 피가 다친 팔뚝을 타고 흘러내려 요한의 얼굴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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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버릴 것 같아?”

요한이 에스텔을 향해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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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실 부인 말이 다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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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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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버리고 가면 모든 게 쉬워지겠지.”

조금만 운이 나빴더라면 에스텔은 크롤린에게 뜯어먹혀 죽었으리라. 그런 상상만 해도 광기가 요동쳐 견딜 수 없었다.

피 묻은 엄지로 에스텔의 뺨을 문질렀다.

크롤린의 피가 여자에게 묻었다. 흰 것이 검게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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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죽는 게 소원이라는데 죽게 둬줄까?”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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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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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고마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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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까지 날 지키려고 애써준 거로 충분해.”

웃긴 건, 에스텔의 저 말이 진심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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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가 버리지 않길 바라고 있잖아.’

에스텔이 아무리 철저하게 연기해도 찰나에 스치는 감정마저 연기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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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주제에 왜 버려달라 해?’

크롤린 떼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보다 더 많은 수의 크롤린이다.

검조차 쓸 수 없는 상황에선, 더 상대하기 힘들 거다.

냉철한 이성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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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복수 용도로 쓰다 버릴 여자 아니었어?’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피치 플라티나 블론드빛 머리, 길고 흰 우아한 속눈썹과 토끼처럼 유순하게 내려간 눈망울, 오밀조밀 달콤하게 생긴 설탕 인형 같은 여자.

머리카락 한 올마저 사랑스러운 구석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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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리베르탄.’

잠시나마 잊었던 리베르탄을 향한 증오심이 뇌리에 가득 차올랐다.

리베르탄은 단순히 요한의 가족만 죽인 게 아니었다. 그때 그들은 가족과 함께 요한도 죽였다.

그 순간부터 요한에겐 복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은 과거의 의젓하고 다정한 블란쳇 공자를 모두 없애고, 차갑고 잔혹한 복수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완전히 부정하고 불살랐다.

요한이 천천히 손으로 여자의 뺨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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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오늘따라 듣기 싫은 말만 하네. 평소처럼 예쁘게 굴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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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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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부인도 알잖아. 내가 바라는 말이 어떤 건지.”

아직 리베르탄을 향한 증오심이 사라진 건 아니다.

에스텔이 증오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요한은 에스텔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기도 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

당장 옆에서 자기한테 웃어주는 그 미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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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내가 널 죽게 둬?”

에스텔의 미소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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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건 너무 바보 같은 행동이야. 나 때문에 요한까지 죽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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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살려달라고 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의미 없다는 듯 구는 에스텔.

요한은 그런 에스텔 때문에 다시 머리끝까지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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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왜 자꾸 죽겠다는 소리만 지껄여?”

요한이 에스텔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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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렇게 멍청한 사람 아니잖아!”

이상하게 눈물을 글썽거리는 에스텔의 얼굴 위로 가족들이 겹쳐졌다.

원망 따윈 하나도 없이 힘든 와중에도 웃으려 애쓰던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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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고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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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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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목숨 대하듯 말하지 말고, 살고 싶어 하라고!”

그 순간, 에스텔의 희미한 미소가 완전히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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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어 하라고?”

그녀가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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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뭐가 달라져?”

 

***

그 순간 화내고 있던 요한이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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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의 목숨 대하듯, 쉽게 내 목숨을 포기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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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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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나는 내 어깨를 쥔 요한의 손을 탁 털며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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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자꾸 쉽게 죽으려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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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쉬워 보였어?”

울음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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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게 쉬웠을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 그게 쉬울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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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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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았어.”

빗소리가 더욱 커진다. 숲 너머에서 쿵쿵거리는 땅 울림이 들려왔다.

의미 모를 눈빛이 담긴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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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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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나에 대해 뭘 알아?”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불안하고, 무섭고, 답답하고. 막막하기도 했다.

나조차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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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쩌다가 그렇게 포기하게 되었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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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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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그랬는지 짐작도 못 하고 있으면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더 터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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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주제에 뭐, 살고 싶어 하라고?”

분노로 잠겼던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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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쉽게 버리지.’

아예 쉽게 버리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나는 아예 희망을 버렸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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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죽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요한은 자꾸 나를 소중히 하고, 아끼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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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자꾸 내가 내 마음을 지킬 수 없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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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도-”

나는 요한의 앞섬을 쥐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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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죽고 싶지 않아! 나도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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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살고 싶다고 해.”

떨어지는 비와 내 눈물이 섞여 흘러내렸다.

요한이 제 앞섬을 쥔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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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그렇게 부탁해. 살고 싶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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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진짜 날 살려줄 거야?”

나는 맞잡은 요한의 손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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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울면서 빌기라도 하면 살려주기라도 할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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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빌어.”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슬프면서도 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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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고. 어떻게든 살아 있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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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까지 날 살리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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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비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넘겨준 요한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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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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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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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지, 네 죽음마저도 내 거여야 한다고.”

요한이 날 끌어안았다. 남자의 뜨거운 포옹이 거칠게 나를 감쌌다. 차가운 빗속에서도 그의 체온이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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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서 멋대로 죽지 마. 차라리 내 손에 죽거나 죽여달라고 해.”

누구보다 날 증오하는 남자가 날 살리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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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그때까지 넌 못 죽어.”

아주 절박하게.

우지끈- 숲의 나무들이 부서지면서, 그토록 기사들이 두려워하던 크롤린 떼의 모습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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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래서…….’

방금 전 한 마리를 보고 있을 때도 무시무시했는데, 여러 마리가 떼로 뭉쳐 있으니 압박감이 더 대단했다.

나무들한테 어떻게 도와달라고 했어도 별 방법이 없었을 거 같다.

나는 아연한 얼굴로 요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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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우리 둘 다 살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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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버리지 않고도 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그 순간 마주친 요한의 붉은 눈동자 위로 반짝이는 고리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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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평생 불가능하다던 일을 다 성공해 왔어.”

요한의 눈동자 속 고리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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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불가능은 없어.”

곧이어 고리들은 서로 부딪치며 부서지는 별처럼 파편이 되어 잔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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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리들은…….’

요한의 제약이자 보호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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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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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목숨마저도 내던지는 건데.’

흑마법을 오래 쓰면 영혼까지 오염된다. 흑마법에서 흘러나오는 부정한 기운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보호 마법의 고리들은 흑마법사의 영혼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깨지면 요한은 흑마법을 통제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마침내 마법 고리들이 전부 소멸했다.

파편들이 일그러지며, 요한의 몸에서 갈무리하지 못한 흑마력들이 처절하게 새어 나왔다.

원작에서, 요한이 지니고 있던 고리가 하나 부서지는 장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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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의 막바지.’

에스텔을 살리기 위해 리안드로가 처절하게 반항하던 상황이었다.

그때 리안드로는 억지로 보호 마법을 하나 깨뜨렸고, 통제하지 못한 흑마력 때문에 요한은 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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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네가 날 걱정했다면, 그건 오판이야. 난 그렇게 약하지 않거든.”

요한이 나직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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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잘 봐.”

휘몰아치는 검은 마력들이 내 머리카락마저 뒤흔들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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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편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네 오판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요한이 일으킨 검은 마력들이 빠르게 숲의 바닥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돌과 나무들이 갈라져 크롤린 떼를 몰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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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무리 크롤린이 대단한 마물이어도 날아다니는 능력까진 없었다.

검은 마력들이 숲을 아예 부서뜨리고 뒤엎었다.

화려하고도 참혹한 재앙.

이제야 나는 다들 왜 그를 상대할 수 없는 악마처럼 보는지 이해했다. 이걸 인간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멍하니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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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빌어볼 마음이 들어?”

요한이 나른히 눈웃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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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빌면 내가 다 들어줄게.”

평소와 같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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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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