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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날 버리고 가 (42/182)


42화 날 버리고 가
202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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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몬드가 제 뒤통수를 감싸며 씩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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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갑자기 때리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것도 마법으로 나무를 움직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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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나무가 움직인 거겠지.”

요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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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 마물 숲에선 마법을 잘 사용하지 못한다는 거 알지 않나?”

지금 마물 숲 주변에는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마물 숲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도 마물이 사는 곳처럼 주변 날씨가 변덕스럽게 바뀌어서였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억울한 눈으로 요한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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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주군이 아니십니까? 갑자기 나무에게 맞을 수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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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 네 죄를 알았던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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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을 두고 그럴 리 있겠습니까!”

나는 그 나무에게 계속 말을 걸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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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이 안 들리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눈까지 속일 순 없었다.

갑자기 나무가 움직여서 레이몬드를 때린 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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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간혹 대화할 수 없는 나무들이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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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한테 경고를 보내는 것만 같았는데.’

그래서 대공저 나무들에게 바로 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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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나무님들? 마물 숲 나무들과는 아예 대화가 안 되는데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공저 나무들에게서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왠지 불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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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뭐지?’

마물 숲에 들어가기 전, 나무들에게 마물 숲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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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나무들은 우리랑 달라서 협조적이지 않긴 하다. 하지만 딱히 다를 건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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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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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그렇게 말해놓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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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 안 되잖아요!’

나무들의 정보는 본인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는 것이라, 가끔 이렇게 틀릴 때가 있었다.

왠지 모를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요한이 유심히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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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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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보다 안색이 안 좋아진 것 같아서.”

내 컨디션에 큰 차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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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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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다는 건, 몸이 안 좋다는 의미지?”

요즘 들어 요한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걱정했다. 하지만 이제 대답하는 요령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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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한, 이 마물 숲에선 마법을 잘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

바로 화제를 돌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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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러면 요한은 알아서 새 화제에 맞춰 대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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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물 숲은 날씨만큼이나 마력이 불안정하거든. 그래서 마법을 사용하는 데 제약이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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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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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도 사소한 오차가 생기면 마법에 실패해. 그리고 마법에 실패하면 반작용을 받지. 그래서 가급적, 이 마물 숲에선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려 해.”

그만큼 이상한 곳이라면 대공저 나무들과 연락이 안 닿을 만했다.

요한이 제 허리춤을 가리키며 입매를 느슨히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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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걱정 마. 부인은 확실히 지켜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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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 쓸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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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못하는 건 없어.”

정말 오만한 말이지만, 요한이라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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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상대가 마물이면 좀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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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찬가지야.”

요한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반대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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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마물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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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의 종류나 대략적인 특징은 알아.”

마물은 신의 질서에 어긋난 존재들이다.

혼돈에서 비롯된 마물은 세상을 망치는 위험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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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요한의 흑마법도 혼돈에 가까운 힘이랬던가.’

요한처럼 일반 마법도 사용하면서 흑마법도 사용하는 건 무척 신기한 일이다.

요한은 내 빠른 대답에 꽤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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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의 귀족들도 잘 모르는데. 부인은 참 똑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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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책만 읽고 살아서 그래. 대신 남들이 다 아는 건 잘 몰라.”

괜히 쑥스러워져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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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뭔가를 안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

하지만 그래도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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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라도 인정받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인정욕구가 꽤 많았던 모양이다.

다정하고 안온한 대화, 가끔씩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미소, 포근한 스킨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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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기만이라면…….’

최대한 이 기만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톡, 투둑-

하늘에서 조금씩 가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느새 하늘은 캄캄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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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마차로 이동하기 힘들어질 텐데.’

그때 선두에 있던 일행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묘한 불안감이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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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주군! 큰일 났습니다!”

말을 탄 정찰병이 달려와 요한의 앞에 도착했다. 정찰병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요한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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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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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갑자기 크롤린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무려 한 무리가 이곳을 향해 모여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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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롤린이 무리를 지어서 오고 있다고?”

요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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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롤린이 아니라 다른 마물로 착각한 건 아닌가? 크롤린은 무리 생활을 하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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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크롤린이 맞습니다. 따로 떨어져서 오긴 했지만, 한 무리라도 된 양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마물 숲을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한층 어두워졌다.

크롤린은 나도 알 정도로 굉장히 위험한 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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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데다 날붙이도 잘 안 들어서 처리하기 어려워.’

생김새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모두 마력이 전혀 안 통한다고 해서 재앙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물이다.

대신 목표로 노린 먹잇감만 사냥한 뒤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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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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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30분 뒤면 도착할 겁니다.”

눈매를 좁힌 요한이 병사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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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물 떼가 튀어나오는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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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크롤린 정도 되는 마물의 동향은 언제나 신경 쓰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요한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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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에 연락은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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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지만 크롤린 때문에 마물 숲에 이상이 생겼는지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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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 지금은 크롤린이 무리를 지어 몰려오는 위기 상황이다. 5명씩 조를 나눠 크롤린 무리를 피해 대공성으로 향한다.”

마법이 통하지 않은 크롤린은 상대하는 것보다 피해 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요한이 명을 내리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몇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졌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크롤린 떼.

이 위기 상황에서도, 요한은 흔들림 없이 기사들을 통제하고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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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구나.’

리베르탄이 그토록 질투하던 고결한 블란쳇 공작의 모습.

나는 홀린 듯이 카리스마 넘치는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요한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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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따로 부인과 이동하겠다.”

레이몬드를 비롯한 기사들이 절도 있게 심장에 손을 대고는 곧바로 움직였다.

***

그렇게 나는 요한과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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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둘만 있어도 괜찮겠어?”

요한은 내가 무리하는 게 싫다며 안고 있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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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적거리는 놈이 있는 것보단 혼자인 게 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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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블란쳇 공작가의 기사들은 정예병들이었다. 도움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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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모여 있으면 위험해. 차라리 따로 가는 게 나아. 그리고 내가 제일 강하니까 괜찮아.”

요한의 말에 불안하던 게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 알았다. 크롤린은 재앙이라 불릴 정도로 위험한 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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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나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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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도 다 무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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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다면.”

요한은 억지로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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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롤린 떼를 운 좋게 피했다면 다 무사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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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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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부인의 곁에는 바로 내가 있잖아.”

가파른 숲에서도 평지처럼 걷고 있던 요한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다정한 미소가 깃들어 있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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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 크롤린들이 위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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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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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아무래도 방향을 틀어야 할 것 같다.”

요한이 나를 안고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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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

요한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묘하게 여유도 없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나무들이 비명을 지르듯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비에, 거센 돌풍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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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느낌이 이상해.’

그의 품에 안겨 가는 와중에도 나는 닥쳐오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나는 요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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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뭔가가…….”

콰득…… 쿵!

그때 커다란 나무가 단번에 꺾여 쓰러졌다.

기괴한 형태의 마물이 나무를 부러뜨린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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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크롤린?’

눈앞의 크롤린은 여러 마리의 맹수가 혼합된 것 같은 형태였다.

사자의 얼굴, 전갈 같은 몸, 꼬리에는 뱀들이 혀를 내밀며 꿈틀거렸다.

크롤린은 빠르게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어두운 빗속에서도 크롤린의 날카로운 이가 섬뜩하게 빛났다.

요한은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크롤린을 갈라 버렸다. 마물의 검은 피가 바닥에 잔뜩 퍼졌다.

요한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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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기까지 왔나?”

나를 감싼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요한은 긴장하고 있다.

크르르…….

또 다른 크롤린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크롤린의 형형한 눈빛들이 번뜩였다.

요한을 경계하는지 천천히 다가오고 있지만, 아마 마음만 먹으면 금방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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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더 많은 크롤린이 보여.’

본능적인 공포가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아무리 요한이라도, 마법 없이 저 무시무시한 마물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다.

나는 천천히 요한의 품에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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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무서워하지 마.”

요한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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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다 처리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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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필요 없어.”

천천히 고개 젓자 그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선이 묘하게 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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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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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혼자서 가.”

요한이 입가에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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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서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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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너무 많아. 이러다간 둘 다 위험해.”

나는 고요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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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혼자라면 도망칠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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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요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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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도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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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 평소보다 너무 빠른데.”

쏟아지는 비가 내 몸을 적셨다. 나는 말없이 요한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어쩌면 요한은 나를 위해 끝까지 남아 싸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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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둘 다 살아남는단 보장도 없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요한은 복수를 완성하기도 전에 여기 마물 숲에서 죽게 된다.

이상하게 가슴이 무척 차분해졌다.

생각해 보면 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 해두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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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난 괜찮아.”

꼭 그렇게 나쁜 마지막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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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에게 배신당한 채 죽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먼저 그를 보내면, 내 죽음은 희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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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그런 농담은, 나라도 넘어가기 어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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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당장 성으로 갈 수 있는 거 맞구나.”

요한이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내려 마주 잡은 손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그를 붙잡은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재빨리 손을 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 몸은 아직 죽고 싶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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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떼쓴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닌걸.’

때로는 상황에 맞게 알아서 포기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다.

나도 살기 위해 노력한 만큼,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난 이 상황이 요한도, 나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걸 알았다.

그러니 마음 편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한의 반응은 나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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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널 버리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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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게 아니야.”

다행히 내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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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라도 살아남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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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요한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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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상황이 어떤 건지 잘 모르나 본데.”

요한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양어깨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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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죽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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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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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 떼한테 뜯어먹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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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괜찮다잖아.”

요한의 표정에 미세한 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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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 때문에 요한이 위험을 감수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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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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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그의 뺨에 내 손을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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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책하지도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평소에는 늘 서늘하다고 느꼈던 요한이 이상하게 무척 뜨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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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내가 죽는다고 해도 절대 당신을 원망하는 일은 없어.”

요한은 잠시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나를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가 많은 감정으로 물들었다. 나는 내 어깨에 올린 그의 손을 치우고, 뒷짐 진 채 한 걸음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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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으로 보게 될 요한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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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가.”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최대한 예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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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을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우리를 경계하는 듯 움직이지 않던 크롤린 무리 중 한 마리가 서서히 움직였다.

결국 요한의 날카로운 눈매가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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