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네 죽음마저도 내 거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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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네 죽음마저도 내 거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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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네 죽음마저도 내 거여야 해
2022.04.22.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설마 여기서 더 피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아주 다행스럽게도 더는 피를 토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해결할 수 있을…….’
요한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없을 것 같네.’
난 억울한 마음에 나무들에게 말했다.
-왜 하필 지금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갑자기 왜 애가 갑자기 화를 내고 있어.
-그래, 저주가 약해지면 너에겐 좋은 일 아니냐.
-요한이 바로 앞에 있는 상황이었다고요. 지금 저 이상한 오해를 사게 생겼어요.
그러자 나무들은 스리슬쩍 발을 뺐다.
-아니. 우리는……. 널 낫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래. 일단 급한 거 같으니 우리는 이만 가마.
-그, 설명은 알아서 잘하고. 우리는 아가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요한은 진찰실 의자에 앉은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 무릎을 조금 굽혔다.
붉은 눈동자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아픈 척을 하긴 했지만…….’
갑자기 저주가 약해져서 피를 토할 줄은 몰랐는데!
“……계속 참고 있었던 건가.”
“응?”
“헤텔 공작 부부에게 휘둘릴 때부터 아팠던 거야?”
요한이 손수건을 꺼내 내 입가를 세심하게 닦아주었다.
요한은 왜 갑자기 내가 피를 토한 건지 묻지 않았다.
“미안해. 계속 보고 있었는데도 전혀 알지 못해서.”
……아프지 않았으니까, 모를 수밖에.
“나도 내 상태가 이런 줄 몰랐는데, 요한이 어떻게 알아차렸겠어. 자책하지 마.”
“이건 자책이 아니야.”
“응?”
“내 무능에 대한 반성이지.”
요한이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이를 아득 깨물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준비한 걸 보여준답시고, 가장 중요한 걸 놓쳤어.”
“…….”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요한의 눈매가 고통을 견디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왜 자꾸 아픈 표정을 지어?’
나는 멍하니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에게 중요해?’
꿈틀, 외면하던 질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너는 나한테 복수하기 위해서 부인으로 두고 있으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에스텔.’
어차피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들만 따졌다.
진짜 ‘에스텔’이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도 생각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난 가짜가 되었다.
요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리베르탄의 입양아’인 나를 복수 대상으로 삼은 남자니까.
‘더 생각하면 너만 더 힘들어져.’
요한은 정말 대단했다.
이제 누구에게 기대하는 건 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왜 요한에게만큼은.
‘내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해줘.’
구두 속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물었다.
“요한은 언제부터 헤텔 백작가에 대해 알고 있었어?”
“꽤 오래전부터.”
요한이 의외로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언젠가 이용할 가치가 있을지 모르니까.”
“그러면 그 문서를 보냈다고 확신한 이유도 있어?”
“흐음. 내가 부인이라고 알게 된 이유는, 헤텔 백작가에 대해서 모두 파악해 두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딱 하나, 리베르탄의 문서만큼은 내가 모르던 것이었단 말이지.”
딱 하나, 유일한 변수.
“그러니 당연히 그 문서의 출처가 부인일 수밖에 없었어. 내가 파악하지 못한 변수는 부인밖에 없으니까. 물론, 어떻게 가지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원래 그렇게 모든 귀족가를 다 파악해둬?”
“그러면 좋겠지만, 당연히 그럴 순 없지. 이번에 헤텔 백작가를 파악해 둔 이유는 간단해.”
“…….”
“헤텔 백작가의 몰락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나는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블란쳇 공작가의 몰락도 정해져 있었는데.’
물론 거기에는 내 몰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은 쓸모가 있어서 살려뒀지만, 쓸모가 없어질 때가 되어서 버렸어.”
요한은 감히 나를 음해하려 한 헤텔 백작가의 최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헤텔 백작가의 이름은 지워지고, 재산은 몽땅 내 앞으로 회수되며, 헤텔 백작 부부는 죄만큼 감옥에 살 것이며, 그 딸들은 돈 한 푼 없이 평민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오히려 불안해졌다. 그들의 미래가, 곧 내 미래인 것만 같아서.
‘역시 요한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어.’
복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흑막.
쓸모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도구로 사용해 버리는 냉혈한.
‘그리고 나도…… 복수 대상이 아니면 가치를 잃어버리겠지.’
하지만 동시에 지금 이 행동은 나를 위해서였다.
‘백작가가 쓸모를 잃었다는 것도, 결국 나를 해하려 해서일 거고.’
지금도 나를 아껴주고 있다.
내게 순순히 모든 사정을 얘기해 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정말 모르겠어.’
언젠가 이용가치가 떨어진 나를 잔인하게 죽이고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온전히 나를 위해서 제 패를 이용해 대신 복수해 준 고마움.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그때 요한이 흐트러진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부인이 나한테 뭔가를 많이 숨기고 있다는 걸 잘 알아.”
발뺌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다.
“……요한한테 말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 건 아니야.”
“그래, 부인도 부인의 사정이 있겠지.”
“하, 하지만!”
흑막의 경계를 푸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박을 하기로 했다.
“요한이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는 건 솔직하게 다 대답할게.”
요한의 날카로운 눈이 나를 탐색하듯 가늘어졌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몸도 안 좋은 부인을 몰아붙일 순 없지.”
이게 넘어간다고?
‘리베르탄의 문서에 변명을 쥐어짜느라 머리가 아팠는데……’
잘 되긴 했는데, 왜 더 꼬여버린 기분이 드는 걸까! 나도 이젠 잘 모르겠다.
“숨기고 싶다면 숨겨, 계속 감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도 돼.”
머리를 다 정리해 준 요한이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대신 도망가지 마.”
“……?”
“어떤 비밀이 있어도 상관없으니, 영원히 내 곁에서 사라지지 마.”
요한은 나른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인의 죽음마저도 내 거여야 하니까.”
***
늦은 밤, 오르테카 재상이 불도 전부 끈 채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예, 폐하.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헤텔 백작가에서 리베르탄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황가의 약점은 있더냐?
“안타깝게도 헤텔 백작가에 있던 징조는 허황된 것이었습니다.”
연락 마도구 속 황제가 침음을 삼켰다.
“하지만 헛걸음은 아니었습니다. 리베르탄의 문서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게 없지 않았느냐!
“그리고 중요하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르테카 재상은 저녁 만찬에서 있었던 소란을 되새겼다.
갑자기 기침 소리를 내며 안색이 안 좋아지던 블란쳇 공작 부인. 그때 누구보다 놀란 듯 보였던 블란쳇 공작.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부인뿐이야.’
본래의 블란쳇 공작이라면 완전히 헤텔 백작가를 망가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헤텔 백작가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얻어낸 뒤 황가로부터 무언가를 또 요구했을 거다.
반역자를 잡아 온 공로라는 이유로.
하지만 블란쳇 공작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그 자리에서 요구할 수 있었을 텐데, 블란쳇 공작은 아내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 덕분에 헤텔 백작가의 일은 오르테카 재상이 황실의 이름을 빌려 해결한 것으로 되었다.
물론 오블란테를 걸었던 만큼, 헤텔 백작가의 재산이 전부 블란쳇 공작가로 몰수되기는 하겠지만, 잔혹한 블란쳇 공작답지 않은 처사였다.
-그게 무엇이냐?
그늘 속에서 오르테카 재상의 남색 머리카락은 검은색처럼 보였다.
“드디어 블란쳇 공작에게 약점이 생긴 모양입니다.”
오르테카 재상이 서늘한 녹색 눈동자를 번뜩였다.
***
헤텔 백작가는 오르테카 재상이 황실 기사단을 부르며 처리했다.
‘내가 중요 관련자라 남아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요한이 알아서 처리한 모양이다.
‘흑막이란 건 참 대단하다니까.’
블란쳇 공작령으로 가장 빨리 가는 길에는 마물 숲이 있었다. 워낙 가파른 길이라 원래는 돌아서 갈 계획이었다.
‘어제 내 피를 보고 더 급해진 거 같지만.’
“이제 마물 숲이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움직여라!”
마물 숲이라는 이야기에 나는 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며 바깥을 보았다.
다른 곳과 달리 나무들이 모두 검었고, 가지 역시 무시무시한 곡선으로 꼬여 있었다.
‘과연 마물이 나오는 곳은 다른 건가?’
확실히 보기만 해도 느낌이 안 좋은 숲이었다.
‘근처의 나무들에게 말을 걸어도 대화가 안 돼.’
그때 레이몬드가 곁으로 다가와 내게 말했다.
“마물 숲이라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님. 자주 오가는 길인 데다 매년 마물을 토벌하니까요.”
“아, 레이몬드 경.”
“혹시나 말씀드리는 거지만, 마님께서 마물을 마주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애초에 정찰병을 보내서 확인도 다 해놓았고요.”
나를 보며 실실 웃던 레이몬드가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마님, 왜 저를 레이몬드 경이라 부르십니까? 편하게 레이몬드라 부르십시오.”
“그래도 될까요?”
“이참에 주군에게 하는 것처럼 반말로 편하게 해주십시오. 전 마님과 친해지고 싶습니다. 안 됩니까?”
쾌남형의 레이몬드가 씩 입꼬리를 올리자, 시원스러운 느낌이 묻어났다.
“그건 아니지만…….”
“저놈은 안 돼.”
앞에서 일행을 정렬하고 온 요한이 어느새 나타나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딱 잘라 말했다.
“부인, 가급적 저놈은 조심해. 아주 안 될 놈이니까.”
“주군. 너무하십니다! 그런 앞담을 하시다니요.”
“네가 도박과 여자로 터뜨린 사고는 다 잊었나 보군?”
레이몬드는 바로 쭈그러들었다.
“……한번 놀 때 화끈하게 노는 것뿐입니다.”
“네놈이 그렇게 노는 건 상관없지만, 내 부인의 곁에서 이상한 수작질을 부리면.”
요한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로 네 인생이 끝날 거다.”
“그- 그래도 기사단장과 안주인인데…….”
“말 한 번만 더 섞어도 생을 마감시켜 주마.”
“주, 주군…….?”
“이미 한 번 했긴 했군.”
요한이 허리춤에 찬 검을 만지작거리자, 레이몬드가 사색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마, 마님! 주인님 좀 말려주십시오! 이게 말이 됩니까!”
“확실히 말 한 번 했다고 그러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아요. 레이몬드 경은 좋은 분이신 거 같고…….”
블란쳇 공작가에서 나를 적대하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사람이다.
‘그래 봐야 리베르탄에 원한이 있는 사람이긴 하겠지만.’
그런 내 말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곧장 밝아졌다.
“역시 천사 같은 마님께서는 악랄한 주군과 달리-”
“많이 그리울 거예요. 경과 대화했던 우리의 추억.”
“마, 마님?”
레이몬드가 당황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저, 저를 구해주시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주군. 그래도 제가 블란쳇 기사단장인데 용서를-”
막 레이몬드는 구불구불한 나무 아래를 지나치고 있었다.
퍼억-!
나무가 레이몬드의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말에서 떨어질 뻔했던 레이몬드가 억울해서 외쳤다.
“주군! 이건 아니지요!”
나는 놀란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