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부인. 입가에 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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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부인. 입가에 피가……
2022.04.19.
요한이 지켜보라는 듯 페뉼라 남작이 있는 곳을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나는 놀라서 요한의 소매를 붙잡았다.
“뭘 할 생각인데?”
“그야, 내 방식대로 처리하는 걸 보여줄 생각이지.”
붉은 눈동자가 소매를 붙잡은 내 손에 스치듯 닿았다가 다시 얼굴을 향했다.
“저 리베르탄 문서, 부인이 넣어둔 거잖아.”
“…….”
“그 방법도 좋았지만, 너무 물러.”
내가 그 문서를 넣어 뒀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 거야?’
만찬장은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주변의 어지러운 소문 때문일까.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세상에 나와 요한, 두 사람만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요한이 날카로운 눈매를 접으며 야릇하게 웃었다.
“경고를 해도 알아먹지 못한 머저리들은 제대로 밟아줘야 해.”
요한이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래야 제 주제를 파악하고 알아서 기니까 .”
***
헤텔 백작 부인은 충격에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놈이 왜 살아 있지?’
처음 헤텔 백작 부인은 페뉼라 남작이 불안했다.
사기에 성공한다 해도, 페뉼라 남작이 배신한다고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증거를 알아본다는 핑계로 감옥에 가둔 뒤 기사를 보내 페뉼라 남작을 죽여버렸다.
분명 페뉼라 남작은 죽었다.
남편인 헤텔 백작이 제대로 확인했다고 했다.
놀란 것은 그녀의 남편인 헤텔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페, 페뉼라 남작? 분명 내가 시체를 확인했는데…….”
당황한 나머지 그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주변의 귀족들이 더욱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보! 그러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헤텔 백작 부인이 급하게 헤텔 백작의 말을 수습했다.
“과거에 친분이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났다지만, 이제는 처지가 다른데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페뉼라 남작은 공식적으로 황실에 수배된 죄인.
반역죄 를 저지른 리베르탄 공작가에 협조한 극악무도한 죄인이다.
당연히 페뉼라 남작을 헤텔 백작성에 거두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문제가 되었다.
“아, 그, 그렇지.”
“헤텔 백작? 그리고…… 헤텔 백작 부인?”
그때 오르테카 재상에게 매달리던 페뉼라 남작이 눈을 희번뜩 떴다.
“당신들 여기 있었군! 감히 날 이용하다가 죽이려 해?”
“무, 무슨 말인지-”
“내가 당신들한테 블란쳇 공작 부인을 모함할 수 있는 증거를 다 줬잖아!”
만찬장에 있는 모두가 헤텔 백작 부인을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헤텔 백작 부인이 빠르게 부정했다.
“지, 지금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
“내가 지금 잘못 봤다고?”
페뉼라 남작은 헤텔 백작 부인의 부정에 더 크게 자극받았다.
“내가 당신한테 계약 마법을 조작할 수 있는 증거까지 다 줬잖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날 죽이려 해놓고 뻔뻔스럽게 발뺌하다니!”
이미 상황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
“세상에. 그러면 방금 전 눈물지으면서 했던 이야기가 다 거짓말이었다는 거죠?”
“어쩜 저렇게 뻔뻔하고 천박할 수가.”
“괜한 일에 휘말린 블란쳇 공작 부인이 안타까워요.”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은폐할 방법 이 보이지 않았다.
‘오르테카 재상이 막을 수 있는 선은 이미 끝났어.’
이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건, 안타깝게도 블란쳇 공작밖에 없었다.
“블란쳇 공작님. 저희 헤텔 백작가가 블란쳇 공작님께 너무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압니다.”
헤텔 백작 부인은 오르테카 재상을 지나쳐 요한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요한은 입꼬리만 올린 채 헤텔 백작 부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렵한 턱끝이 오만하게 까딱였다.
무심한 반응에 헤텔 백작 부인은 긴장했지만, 침착하게 사죄의 말을 마저 이어갔다.
“오브린테까지 걸었던 이상 달라질 게 없는 상황인 것도 잘 압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 백작가의 명맥만 유지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요한이 에스텔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헤텔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지금 내게 용서를 비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어째서지?”
하지만 요한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헤텔 백작 부인이 예상 과 달랐다 .
‘다시 사죄하길 바라는 건가?’
헤텔 백작 부인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저희가 블란쳇 공작가에 큰 죄를 저질러 블란쳇 공작가의 명예를-”
“아니.”
요한이 헤텔 백작 부인의 말을 중간에 딱 잘랐다.
“그게 아니지.”
고저 없이 흘러나온 우아한 목소리.
“네가 지금 빌어야 할 건 그게 아냐.”
“그렇다면무엇을…….”
“빌어야 할 대상이 잘못됐잖아. 이런 것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하나?”
헤텔 백작 부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요한에게는 잘만 숙여졌던 고개가 이상하게, 에스텔을 향해서는 잘 숙여지지 않았다.
헤텔 백작 부인이 자존심에 몸을 부르르 떠는 사이, 불안했던 헤텔 백작이 나섰다.
“여보, 뭐 하고 있어. 빨리 사죄드려야지.”
헤텔 백작 부인은 숨도 멈추고 우아하게 앉아 있는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분명 블라쳇 공작의 앞에서는 쉽게 숙여진 고개다.
‘저 여자한테 또 고개를 조아리라고?’
저 여자는 하찮은 평민인데.
땅을 짚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저히 숙여지지 않았다.
***
나는 요한이 보여주는 상황을 계속 주시했다 .
‘이게 요한이 짜둔 상황인가?’
잘못을 발뺌하는 헤텔 백작가, 그들을 향해 분노하는 페뉼라 남작.
그 광경을 보고 당황하는 만찬장의 귀족들과 상황을 파악하고 눈살을 찌푸린 오르테카 재상.
모든 게 요한의 의도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한 편의 인형극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어쩌면 이것이 요한이 세상을 보는 시선인 것 같았다.
‘그러면 나도 저 사람들처럼 인형으로 보일까?’
방금까지만 해도 요한에게 뻔뻔스럽게 사죄하던 헤텔 백작 부인이 나를 보고 머뭇거렸다.
그녀가 마지 못해 고개를 숙이자, 요한이 노골적으로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헤텔 백작가는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가 보군.”
헤텔 백작이 하얗게 질려 되물었다.
“예?”
“아니면 백작가의 죄가 감히 이 정도 사죄로 될 거라 여겼던가.”
요한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흘러나와 헤텔 백작 부부를 압박했다.
헤텔 백작 부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조금 전의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죄송합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 제가 욕심에 눈이 멀어 공작 부인을 음해하고 말았습니다. 이 죄를 어찌 갚아야 할지…….”
“흐음.”
“헤텔 백작가의 모두가 공작 부인께 고개를 숙여도 갚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을 알지만…….”
헤텔 백작 부인은 머리를 박고 사죄하는 와중에도 연신 요한의 눈치를 살폈다.
요한은 한쪽 입매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게 전부인가?”
“그, 그러면 어떤 식으로 사죄해야…….”
“개처럼 빌어.”
비틀어진 그의 입매에서 피식-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목숨만은 붙이게 해달라고 구걸해.”
“…….”
“그래야 자비든 뭐든 베풀 마음이 생기지 않겠나?”
헤텔 백작 부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굳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요한이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짧은 찰나, 요한이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잘 봐, 이제부터가 부인을 위해 준비한 클라이맥스니까.”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요한이 저렇게 말할수록 더 무서운 일이 벌어졌는데.’
요한은 엎드린 헤텔 백작 부부의 앞에 섰다.
상황을 방관하던 오르테카 재상이 요한에게 물었다.
“블란쳇 공작,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가르침을 주려 하지.”
요한은 오르테카 재상을 무시하고 헤텔 백작의 손등을 구두로 짓밟았다.
“아아악! 브, 블란쳇 공작님!”
“이게 내 아내를 모함하려 했던 손인가.”
구둣발이 손등을 거칠게 으스러 밟았다.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제, 제발 살려…….”
“이런 일을 벌일 땐 , 처분될 각오도 했어야지.”
헤텔 백작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백작 부인은 제 남편의 모습을 보고 더욱 창백해졌다.
“고작 이 정돈가.”
요한은 더러운 걸 밟았다는 듯 가볍게 발을 털어내며 헤텔 백작 부인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넌 그 천박한 혀로 내 아내를 모욕했었지.”
“사, 살려…….”
“그때부터 그 주제도 모르는 혀를 뽑아버리려 했는데.”
헤텔 백작 부인은 제 구원줄인 마냥 오르테카 재상에게 소리쳤다.
“오, 오르테카 재상님. 블란쳇 공작님을 말려주십시오! 정식 재판도 아니고 이렇게 귀족을 대할 수는 없는…….”
“오블린테를 거시지 않았습니까?”
오르테카 재상이 냉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블란쳇 공작이 행하는 이 모든 행동이 헤텔 백작가에 가져갈 대가인 모양인가 보지요. 그렇기에 저는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백작 부인 본인이 맹세하신 오블린테이니 그대로 책임지시면 됩니다.”
헤텔 백작 부인이 절망했다.
요한은 나를 돌아보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부인, 눈알과 혀 중에 뭐부터 뽑아줄까?”
모르는 척하고 있던 나는 흠칫 놀랐다.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다.
“내가 그걸 골라야 돼?”
“기왕이면 부인 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
나는 어느 쪽도 고르기 싫은데.
‘요한은 진짜 해버릴 남자라서 무섭단 말이지.’
나라고 날 매장하려던 헤텔 백작 부인이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신체가 훼손되길 바라진 않았다.
“고르기 어려우면, 둘 다 해줄게.”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 흥미가 감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매우 기대되는 모양이다.
“음, 그러면 나는.”
“그래, 부인은?”
“에취.”
나는 일부러 기침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아픈 척하면서 도망가자!’
다행히 자주 아픈 덕분에 실감 나는 연기가 가능했다. 힘든 것처럼 숨소리를 떨자, 요한의 표정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지금 어디 아픈 거 맞지?”
“아니야. 난 괜찮아.”
아닌 척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쉬고 싶다고 들어갈 수도 없고.”
“왜 그럴 수 없어.”
“그거야 요한이 하려는 일을 내가 방해할 수는 없잖아.”
‘잘 속였나?’
그런 생각을 하며, 요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부인…….”
뜻밖에도 요한은 내 생각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장 의사한테 가자.”
“지, 지금? 오르테카 재상님도 계시고 상황도 다…….”
“그딴 건 하나도 안 중요해.”
요한이 턱을 꽉 깨문 채 나를 안아 들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부인뿐이야.”
요한은 모든 상황을 외면하고 나를 안고 만찬장를 나갔다.
“블란쳇 공작?”
오르테카 재상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요한을 불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
물론 요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만찬장에서 벗어나 의사를 향해 달렸다.
빠져나오는 동안 당황스러워하는 귀족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장담컨대, 나보다 더 놀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어쨌거나 내 목적은 성공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헤텔 백작 부인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어차피 페뉼라 남작이 있는 이상 헤텔 백작과 백작 부인은 수도로 이송될 거야.’
심지어 오르테카 후작이 리베르탄 문서도 가지고 있다. 빠져나갈 구멍은 절대 없을 거다.
‘그 정도로 충분해.’
솔직히 상대가 한 일 이상으로 잔인하게 벌을 받았으면, 마음이 좀 불편했을 거 같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의사인 헨리 씨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헨리 씨는 다급해 보이는 요한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내 부인이 갑자기 무척 어지럽다는군.”
요한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상태가 심각하다. 급히 치료를 봐야 할 것 같다.”
헨리 씨는 내 얼굴을 보고 갸웃했다. 내 안색은 멀쩡하니까.
“지금은 괜찮으신 것…….”
“뭐라고?”
“아주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십니다. 당장 진료를 보겠습니다.”
헨리 씨가 나를 앉혀놓고 진찰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요한은 살벌한 시선으로 헨리 씨를 노려보았다.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증상은 다 얘기해.”
“예, 예, 예.”
“나중에 알리지 않은 증상이 있다면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요한의 으르렁거리는 위협에 내가 괜히 다 긴장되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갑자기 다 나았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때였다.
-아가야. 우리가 무슨 소식을 알아왔는지 아니?
-아가가 들으면 기뻐서 소리를 지를 만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단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나무들이 말을 걸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나무들에게 대답했다.
-저 지금은 상황이 급해서 그런데, 나중에 대답할게요.
-그렇게 나중에 말하면 의미가 없다니까! 꼭 지금 들어야 해!
-지금은 안 된다니까요.
-알았다. 그러면 본론만 말하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요정의 흔적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곳에 있는 나무들과 접촉하며 네 저주를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단다.
-아무튼 네가 안 된다니 다른 건 나중에 얘기하고, 급한 것만 얘기하마.
-우리 나무들의 기도로 네 요정의 힘이 더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더라. 그래서 모두 다른 나무들을 협박해서 기도를 하고 왔다.
요한이 내 얼굴을 쓸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금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거 아니야? 넌 지금 환자를 두고-”
“그런 거 아니야.”
그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뭐지?’
입에서 비릿한 향이 느껴졌다.
‘설마 요정의 힘이 회복되었다는 게…….’
어쩐지 나를 바라보는 요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렸다.
요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지금 입가에 피가…….”
나는 급하게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소매에서 검은 피가 묻어났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