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이제 남편이 나서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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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이제 남편이 나서볼게
2022.04.15.
갑작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헤텔 백작 부인이 딸을 말렸다.
“잠깐만. 로테. 오블린테를 하는 건-”
가문의 이름을 건 맹세, 오블린테.
이건 단순히 내기 조건으로 명예가 걸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황실의 이름까지 엮여서 이루어지는 맹세니까!’
내기에 패배한다면 가문의 명예가 완전히 몰락하는 건 물론, 맹세에 따라 승리한 자는 상대에게 세 가지를 요구할 수 있었다.
‘가문의 작위까지 요구할 순 없지만…….’
그 외엔 전부 가능하다. 영주성, 장원,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잘못되면 10만 골드 이상을 배상해야 하는데.’
심지어 이 자리에는 황실의 재상인 오르테카 재상이 중재자로 있는 상황이다. 잘못될 경우 말을 바꿀 수도 없다.
‘차라리 블란쳇 공작 부인의 말도 맞을 수 있으니 나중으로 시간을 끌면…….’
헤텔 백작 부인이 망설이던 순간, 에스텔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헤텔 백작 부인.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오블린테는 신중히 결정해야 하는 일이에요.”
“저도 헤텔 백작 부인의 마음을 이해해요. 사실 전 지금도 둘 다 진실일 경우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에스텔은 두 손을 모으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진실은 밝혀져야 하잖아요. 그러니 오블린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백작 부인께서도 그렇지 않아요?”
헤텔 백작 부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헤텔 백작이 호기롭게 외쳤다.
“부인, 못할 게 무엇 있나? 좋소! 헤텔 백작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소!”
남편의 돌발행동에 당황했던 헤텔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데 공작 부인께서 오블란테를 걸 수는 있나요? 블란쳇 공작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할 텐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때 요한이 에스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른히 대답했다.
“에스텔의 오블란테는 내가 보증하지. 설령 블란쳇 공작가가 몰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요한은 한쪽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대신 내가 나선 이상 일말의 자비도 없을 거다.”
목소리에 담긴 형형한 살의에 헤텔 백작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헤텔 백작 부인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좋아요! 재상님. 빨리 검증해 주세요. 누구의 말이 진짜인지.”
“알겠습니다. 두 가문의 동의가 이루어진 듯하니 저도 신중히 검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르테카 재상은 문서를 모아 봉투에 넣은 뒤 계약 마도구인 반지를 발동했다.
반지에서 나온 빛무리가 봉투 위를 감쌌다. 반지의 푸른 보석이 투명해졌다.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정적.
모두가 오르테카 재상의 반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르테카 재상이 감았던 눈을 떴다.
보석의 색이 뚜렷해졌다.
붉은색.
조작되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말없이 헤텔 백작 부인을 향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블란쳇 공작에게 뻔히 보이는 사기를…….’
헤텔 백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도 안 돼! 이, 이건 뭔가 잘못됐어!”
헤텔 백작 부인은 차갑게 식은 손을 덜덜 떨었다.
‘재상의 마도구는 황실의 보물이라 이런 사기에 걸리지 않…….’
그 순간, 헤텔 백작 부인이 에스텔과 눈이 마주쳤다.
요한의 옆에서 안도한 듯 가녀리게 기대어 서 있는 에스텔.
“너였구나! 너였어. 네가…….”
“헤텔 백작 부인.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건-”
헤텔 백작 부인의 말은 주변의 핀잔에 이어지지 못했다.
에스텔은 헤텔 백작 부인에게만 보이도록 생긋 웃어주었다.
‘맞아요, 나예요.’
헤텔 백작 부인은 망연자실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스텔은 슬프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요한의 어깨에 기댔다.
‘하지만 백작 부인, 아무도 당신의 말을 믿어주지는 않을 거예요.’
계약서와 보증서를 들고 고발한 것도 헤텔 백작 부인 본인이고, 모든 증거도 헤텔 백작 부인의 것이었다.
한마디로 본인이 다 저지른 일이란 거다.
여기서 차이가 있다면, 에스텔이 그대로 당해주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게 누가 그런 나쁜 짓을 하라고 했나요. 멍청하게.’
물론 에스텔은 헤텔 백작 부인이 자신을 건드린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블란쳇 공작 부인은 대단한 위치다. 하지만 에스텔은 너무 우습고 만만했던 것이다.
‘그게 다 소문 때문이지.’
에스텔은 속으로 그녀를 부르던 호칭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주제도 모르고 리베르탄에 입양된 멍청이.’
‘예쁘기만 한 악녀.’
‘더러운 가짜.’
다들 멍청하고 예쁜 가짜도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가짜라도 인간인 이상 생각이란 걸 하고 산답니다.’
그래도 일이 쉽게 풀리게 돼서 다행이다.
이제 이성을 잃은 헤텔 백작 부인이 알아서 지뢰를 밟아줄 테니까.
***
헤텔 백작 부인이 현실을 부정하며 횡설수설 목소리를 높였다.
“재상님. 저희는 억울합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헤텔 백작가의 마도구! 저희 집안의 마도구로도 다시 한번 해봐야 해요.”
나는 가만히 그런 헤텔 백작 부인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마도구를 가지고 와도 마찬가지일걸?’
왜냐하면.
‘그 문서는 내가 조작해 뒀거든.’
솔직히 베티가 없었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했을 거다.
하지만 흑막의 부하답게 베티는 매우 유능했다.
‘저는 다른 가문에 섞여 들어가 정보를 빼돌리고 조작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어디든 쉽게 잠입하고, 원하는 물건을 빼돌릴 수 있습니다.’
헤텔 백작 부부가 집무실에 숨겨둔 봉투를 가져온 베티에게 박수를 쳐줬다.
베티는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하인들이 정신없이 다른 곳에 돌아다니고 있어서 별로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똑같은 문서를 비슷하게 바꿔치기해놓는 건 제 특기고요. 아무튼 마님, 이 봉투 이대로 바로 없애버릴까요?’
솔직히 그렇게 하면 일은 쉬워진다.
하지만 그동안 나를 계속 괴롭히려 한 것도 모자라 이런 짓까지 벌인 헤텔 백작가를 가만둘 수 없었다.
‘베티, 이 봉투에 있는 계약 마법은 지금 완성되어 있는 게 맞지?’
‘조작되지 않은 진짜라 나오는군요. 마님, 이게 진짜가 맞습니까?’
‘리베르탄에서 강제로 보증서를 썼던 적은 있지만, 헤텔 백작가는 아니었어.’
‘그러면 이건…….’
‘그래. 계약 마법에 오류를 일으켜서 이렇게 조작해 놓은 것 같아.’
‘보통 계약 마법은 오류가 나면 모두 조작이라 뜨는데, 정말 신기하군요.’
실제로 그렇기에 귀족들은 중요한 마법 계약서를 보물처럼 모셔두곤 했다.
‘하지만 해결법은 간단해. 일부러 그 위에 다른 조작을 가해서 계약 마법에 오류를 내버려 두면 되지.’
물론 베티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마님. 헤텔 백작 부부가 만찬 전에 알아보지 않을까요? 만찬장에 나오기 전에도 검사를 또 해볼 거예요.’
확실히 헤텔 백작 부부가 만찬 전 검사했을 때, 문서가 가짜라고 뜨면 곤란했다.
‘그러면 지금 그대로 돌려놨다가 헤텔 백작 부부가 만찬장에 나온 뒤 망가뜨린 계약서를 가져다 놓는 건?’
‘중요한 물건이니 본인들이 가지고 만찬장에 가지고 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어.’
헤텔 백작 부부의 성격상 절대 그럴 리 없었다.
헤텔 백작은 유약했고, 헤텔 백작 부인은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대단했다.
사람들이 다 모인 만찬장에서 공론화시키려고 했으니, 처음부터 문서를 가져와 따질 일은 없다.
그건 귀족적이지 않으니까.
‘그런데 솔직히 이건 베티 네가 중간에 잘못해서 걸릴 수도 있어. 티 안 나게 조작을 해야 하기도 하고. 할 수 있겠니?’
베티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인력도 없는 백작가, 잠입해서 물건을 빼돌리고 나오는 건 절대 어렵지 않아요.’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
난 베티의 손에 빼돌려 두었던 페뉼라 남작의 문서를 건네주었다.
‘계약 마도구 근처, 바로 아래쪽에 비밀이 많은 것처럼 이것을 숨겨둬.’
그 뒤, 나는 헤텔 백작 부부가 더 신중히 계약서를 확인하지 못하게 연기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갑자기 당한 피해자처럼.
‘이제 얼마 안 남았네.’
헤텔 백작 부인이 오르테카 재상을 붙잡고 무죄를 주장했다.
“오르테카 재상님! 부디 저희 집안의 계약 마도구로 검증해 주세요. 저희 집안의 계약 마도구에서는 분명히 진짜라고 떴었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해도 블란쳇 공작 부인에게 누명을 씌운 사실은 사라지지 않을 텐데요?”
“그래도 저희가 고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습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결국 오르테카 재상은 그 요청에 따라 헤텔 백작가의 문서를 가지러 떠났다.
‘오르테카 재상이 알아서 내가 넣어둔 리베르탄의 문서를 발견하겠지.’
똑똑한 사람이니만큼 헤텔 백작 부부의 서류가 아니라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오르테카 재상은 당장 발견한 중요한 문서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헤텔 백작가의 집무실에 다녀왔습니다. 계약 마도구가 다소 깊숙한 곳에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렸군요.”
오르테카 재상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헤텔 백작 부부는 희망에 가득 찬 눈길로 오르테카 재상에게 물었다.
“그래서, 재상님. 어떻습니까? 저희 마도구에서는 진짜라고 뜨지요?”
“확실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는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오르테카 재상이 헤텔 백작 부부에게 문서를 넘겨주었다.
“버젓이 마도구에서 가짜라 뜨는 것도 모자라, 헤텔 백작가가 리베르탄에 뇌물을 주고 거래했다는 문서도 있을 줄이야. 심지어 제국에서 금지한 불법 물품들로 말입니다.”
‘이제 끝이네.’
그때 요한이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부인. 괜찮아?”
“어?”
“신경 많이 썼을 텐데.”
한창 헤텔 백작가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평소라면 먼저 움직였을 요한이 아무 말도 없이 계속 조용하기만 했다.
‘처음 가짜라는 게 밝혀졌을 때, 요한은 뭘 했지?’
요한은-
‘계속 나를 보고만 있었어.’
마치, 지금 나밖에 볼 게 없다는 것처럼.
순간 뒷골이 오싹해졌다.
요한이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나한테 다 얘기해줘. 부인이 뭘 생각하고, 뭘 계획하고 있는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 지금은 솔직하게 털어놓기 어려우려나.”
요한이 고민하는 듯 미려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면 지금부터 눈으로 직접 보여줄게.”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커졌다.
“아주 재밌을 거야.”
나는 홀린 듯 그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요한이 내 앞에 손가락 열 개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10.
‘초를 세는 건가?’
8.
숫자가 점점 줄어들수록 점점 더 긴장되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헤텔 백작 일가는 대성통곡하며 오르테카 재상에게 무릎을 꿇고 매달렸다. 만찬장에 모인 귀족들 역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웅성거렸다.
오로지 요한만이 느긋했다.
마침내 손가락이 다 접혔다.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쇼타임.”
쾅!
만찬장의 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바로 보인 건, 블란쳇 기사단장 레이몬드였다.
레이몬드가 만찬장 안으로 꼴이 엉망이 된 나이 든 남자를 던졌다.
바닥을 구르던 남자가 피가 흐르는 손으로 재상에게 매달렸다.
“사, 살려…….”
나는 나이 든 남자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페뉼라 남작?’
피로 얼룩진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페뉼라 남작이 확실했다.
‘요한은 페뉼라 남작이 여기 있다는 건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 요한이 놓친 게 아니었어?’
그때 요한이 내 턱을 잡아 눈을 맞춘 뒤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제 남편이 나서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