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름으로 불러봐
(37/182)
37화 이름으로 불러봐
(37/182)
37화 이름으로 불러봐
2022.04.08.
나는 요한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고, 공작님?”
“……아.”
요한이 막 정신을 차린 것처럼 나직한 소리를 냈다. 그의 입매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부인. 옷 갈아입고 있었어?”
“마, 맞아요. 그러니까…….”
“그런데 저건 뭐야.”
요한은 눈짓으로 베티의 손에 들린 슬립을 가리켰다. 베티가 빠르게 슬립을 제 뒤로 감추었지만, 이미 수습하기는 늦은 상태였다.
‘진짜 미쳤어!’
나도 모르게 급히 앞에 있던 이불을 확 뒤집어썼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요한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
티 파티가 끝나고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방 안으로 돌아가니 베티가 비분강개하면서 달려왔다.
“마님. 전 너무 화가 나요.”
내 앞에서 베티가 화난다는 표현을 쓴 적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네. 그 미친, 아니, 정신 나간 헤텔 백작 영애가 밤에 주인님과 마님을 찾아왔다면서요!”
“베티 너도 들었니? 어떻게?”
“저야 당연히 이 주변 하인들을 꼬셔서……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그러자 베티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 저지르네요. 뭐 이런 집안이 다 있어요?”
“어차피 내일 떠나면 더 안 볼 사람들인걸.”
비가 멈추고, 진흙탕이 됐던 땅도 말랐다. 이제 이 피곤한 헤텔 백작성에서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상보다 너무 오래 머물렀어.’
그래도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국 중앙 은행 금고 열쇠를 얻었지.’
솔직히 비자금이 필요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돈이 생겼다. 문서를 보건대 금액도 상당한 것 같았다.
“그거야 그렇지만…… 흠, 그래도 용서가 안 돼요. 잠시 여기 와보세요.”
베티가 나를 끌고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주었다. 나는 있는지도 몰랐던 물건이었다.
은은한 색이 감도는 반투명한 슬립들이었다.
“이건……. 슬립?”
“제가 혹시 몰라서 챙겼어요. 그런데 마님, 그때 그 미친 여자가 이거보다 더 얇은 슬립을 입고 왔다는 거 아세요?”
살이 다 보일 것 같은 얇은 슬립이었다. 그런데 이거보다 더 얇은 걸 입고 왔다니.
“그건 거의 옷을 안 입은 거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더 화가 나는 거예요.”
베티가 내 손에 들고 있던 얇은 슬립을 쥐여주었다.
“그런데 마님, 오늘 밤 이 슬립을 입고 주인님을 기다려보시는 건 어때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왜 얘기가 그쪽으로 가는 거야?”
“그거야 저는 주인님과 마님의 사이가 가까워지길 바라는 착한 하녀니까요.”
“난 흉터가 있어서…….”
흉터를 들키면 안 되는 이유는 단순히 흉터가 보기 끔찍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내 처지를 설명하는 모든 것이었다.
리베르탄에서 사랑받지 않던 딸, 그의 복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가짜.
‘그렇게 되면 요한에게 난 쓸모가 없어지겠지.’
그러면 요한과 내가 부부인 척하게 될 이유가 사라진다.
베티가 애써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불 끄고 기다리고 계시면 되죠! 그리고 마님이 너무 예뻐서 주인님께서는 흉터 같은 건 보지도 못하실걸요.”
“베티…….”
“죄송해요. 제가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말했네요. 이건 제가 가져갈게요.”
베티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베티를 붙잡았다.
“그, 그러면 한 번만 입어볼게. 하지만 정말 입어보기만 하고 난 다시 드레스를 입을 거야.”
“네! 좋아요!”
그리고 난 정말 베티와 얘기한 대로 한 번 갈아입어 본 뒤, 다시 드레스를 입으려 했다. 내 재촉에 베티는 빨리 슬립을 가지고 사라지려 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
벌컥-
드레스를 입고있던 순간, 갑자기 요한이 들어왔다는 거다. 옆에는 슬립을 든 베티가 보였다.
***
난 또 무작정 숨어버리고 고민에 빠졌다.
‘진짜 어떻게 해!’
심장이 무리하게 쿵쾅거렸다. 꽁꽁 덮은 이불이 내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계속 붙잡았다.
들려오던 발소리가 멎었다.
‘설마 지금 내 앞에 요한이 있나?’
요한이 앞에 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더 화끈 달아올랐다.
가만히 기다리던 요한은 이불을 뒤집어쓴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고, 공작님. 계속 그러고 계실 거예요? 저 이제 옷 다시 입어야 하는데요.”
“계속 이러고 있을 생각이라면?”
“그러면 제가 옷을 못 갈아입는데요?”
“내 앞에서 갈아입으면 되지. 부끄러울 게 뭐 있어. 응?”
이불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달콤한 요한의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상대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하지만 요한은 이불 속이 훤히 보이는지, 이불 속에서 내 손을 찾아 꼭 쥐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조건을 걸어야지. 내가 나가길 원하면, 부인이 해줄 수 있는 걸 말해봐.”
“제가 공작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많을 텐데. 부인이 정 생각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걸 말할게.”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뭘 요구하려는 걸까.
‘복수에 대한 것이려나?’
무리한 일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남의 성이지만 이불을 통째로 가지고 도망갈 각오를 하는 사이, 요한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부인이 날 이름으로 불렀으면 좋겠어.”
“……네?”
“기왕이면 반말을 써주면 더 좋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려울 것 없는 조건이지? 우린 초야도 보낸 사이잖아.”
“그, 그건 보낸 척만 한 거잖아요!”
“그래도 초야는 초야지. 있었던 게 없었던 일이 되진 않으니까.”
대화를 할수록 머리가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흑막은 말솜씨가 너무 좋다.
“그런데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는 거랑 반말을 하는 건 왜요?”
“모르겠네. 어쩐지 부인은 나한테 반말 쓰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지.”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내 속을 다 꿰뚫어 보는 듯했다. 불현듯 요한이 폭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내가 요한 앞에서 반말을 써서 이렇게 됐나?’
그러면 설마…….
‘폭주 때의 기억을 찾은 건 아니겠지?’
그때 내가 요한 앞에서 했던 거짓말들이 계속 떠올랐다.
‘나, 그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막 말했는데.’
그때 이불에 감싸인 내 몸 안쪽으로 그의 팔이 파고들었다. 뒤로 단단한 가슴팍이 나를 압박했다.
요한이 재촉했다.
“아니면 부인이 들어주기 어려운 이유라도 있나?”
“아니요!”
나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할게요.”
어차피 속으로는 계속 반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낄 건 없었다. 문제라면 요한이 이런 걸 요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건데.
‘정말 폭주 때 기억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요한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내 어깨 부근에 입을 쪽 맞췄다.
“그러면 당장 그렇게 불러줘야지. 아니면 나 계속 안 나갈 거야. 오늘 만찬 끝날 때까지.”
“요한.”
하지만 막상 또 입으로 말하니 조금 쑥스러웠다. 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요한.”
“응, 부인.”
“빨리 손 떼고 나가.”
“…….”
“내 말 안 들려?”
갑자기 요한이 조용해졌다.
‘너무 세게 말했나?’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불만이 섞여 튀어나온 것 같았다. 바짝 긴장한 순간, 요한은 낮게 큭큭 웃기 시작했다.
“아, 정말.”
다시 한번 나를 꼭 끌어안은 요한이 속삭였다.
“역시 부인은 반말이 어울릴 줄 알았어.”
“……이제 만족해?”
“충분히.”
어쩌다 흑막과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
요한이 떠난 뒤 나는 급히 새 드레스를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방에 있으면 민망했던 순간이 계속 떠오를 것 같았다.
“블란쳇 공작 부인. 이렇게 마주치는군요.”
오르테카 재상이었다.
“아, 그러게요. 산책 중이셨나요?”
“그렇습니다. 왠지 이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차가운 녹색 눈동자가 정원에 있는 나무들을 느긋하게 훑어내렸다.
“뭔가 제가 찾던 비밀이 있을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어떤 비밀을 찾고 계신데요?”
“그것은 비밀이기에 차마 설명드릴 수 없군요.”
나는 잠깐 고민했다.
‘설마 내가 나무들 사이에 다시 숨겨둔 걸 찾는 건 아니겠지?’
생각해 보니 그 안에는 열쇠 말고도 리베르탄에게 뇌물 받았던 다른 귀족들의 명단과 문서도 있었다. 리베르탄을 반역죄로 보내버린 황제라면, 충분히 찾을 만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간 미소를 지었다.
“충분히 이해해요. 그런데 전 오르테카 재상님께서 제게 그 비밀을 물어보실 줄 알았어요.”
“호오. 그건 어째서입니까?”
“그거야 굳이 저를 아르마티스 공주라 칭찬하셨으니까요.”
아르마티스 공주는 제국 신화에서 가장 빼어난 신붓감이다. 하지만 칭찬할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거든.’
그것도 남편의 비밀을 지켜주다가.
그래서 아르마티스 공주의 별명은, 고결한 비밀이기도 했다. 오르테카 재상이 빙긋 미소 지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칭찬한 것이라면 어찌하겠습니까?”
“농담을 파악하지 못한 제 가벼운 실수가 되겠지요. 그래서 재상님이 보시기에 제가 실수한 것 같으세요?”
“놀랍군요. 공작 부인께서 생각하신 대로가 맞습니다.”
오르테카 재상이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전 왠지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제가 찾던 비밀을 알고 계실 것 같거든요.”
“하지만 전 재상님께서 비밀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참 안타깝군요.”
요한과 달리 오르테카 후작과는 대화하는 게 꺼림칙했다. 오르테카 재상의 녹색 눈동자가 음산하게 빛났다.
“대신 제 이야기를 듣고 파악해 주셨으니, 다른 거라도 얘기해 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게 무엇인가요?”
“오늘 헤텔 백작 부인이 만찬에 아주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아주 지나칠 정도로요.”
오르테카 후작은 지팡이로 정원 바닥의 돌을 툭 쳤다. 그리고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특히 저녁 요리로 아주 진귀한 것을 준비했다더군요. 공작 부인께서도 저녁 메인디쉬를 많이 기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원 뒤쪽에서 재상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르테카 재상님! 혹시 여기에 계신가요?”
헤텔 백작가의 두 번째 딸인 것 같았다. 오르테카 재상은 지팡이를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가볍게 인사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뵙지요.”
***
오르테카 후작과 헤어진 나는 뜻밖의 정보에 고민에 잠겼다.
‘문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이냐인데…….’
너무 여러 가지가 예측되어서 행동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그때 마침 나를 찾으러 정원까지 온 베티가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마님! 이제 곧 만찬이라서 한 번 더 차림을 손봐도 괜찮을까요?”
이제 곧 우리와 오르테카 후작이 떠날 예정이어서인지, 헤텔 백작은 여러 손님을 초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블란쳇 공작 부인인 나도 차림에 공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 좋아.”
“오늘 만찬의 주인공도 마님이실 거예요. 마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귀부인이실 테니까요.”
베티가 의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베티. 내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그럼요. 물어보세요.”
“이전에 네가 블란쳇 공작가에서 하던 일이 뭐야?”
“예? 저야 하녀 일을 했죠.”
“그게 다가 아니잖아.”
“예……?”
뜻밖의 말에 베티가 순한 눈망울을 끔뻑였다. 나는 그런 베티를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하녀 일 말고, 네가 평소에 하던 일. 나를 감시하러 오기 전에 주로 하던 일을 얘기해 줄래?”
베티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
헤텔 백작은 초조하게 집무실을 돌아다녔다. 그 꼴을 못마땅하게 본 헤텔 백작 부인이 소리쳤다.
“여보, 곧 중요한 만찬인데 체통도 없이 왜 그러고 있어요!”
“하지만 부인.”
헤텔 백작이 긴장한 티를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정말 그 자식 말을 믿어도 될까? 부인도 알겠지만, 이번 일이 잘못되면 우린 정말 끝장…….”
“불안해할 게 뭐가 있어요.”
헤텔 백작 부인이 표독스럽게 남편을 다그쳤다.
“이미 상황은 다 끝났고, 급하게 검증 마도구도 구해서 확인했잖아요. 주어진 기회를 이용해야지요, 우리도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여보. 우리 로테와 플로라를 생각해요.”
헤텔 백작 부인은 화가 누그러진 듯 백작의 손을 감쌌다.
“지금 사교계에 망신당한 게 소문나서 우리 애들은 시집도 못 가게 생겼어요. 그렇게 둘 수 없잖아요.”
백작이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부인은 못마땅한 듯 일그러졌던 얼굴을 다시 풀었다.
솔직히 페뉼라 남작을 숨겨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쓸모가 생길 줄 몰랐다. 귀찮아지기 전에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내가 착하게 산 덕분에 이런 행운이 온 거겠지.’
만찬 시간이 되었다. 손님들이 한껏 꾸민 헤텔 백작가의 만찬장에 모였다. 그리고 만찬장 가장 중앙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의 블란쳇 공작 부인이 남편과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