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벗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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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벗고 있다고?
2022.04.05.
로테는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에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오르테카 재상을 보며 말했다.
“모두 저희가 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계셨나 봐요, 재상님.”
난처하게 서로의 눈치를 보던 귀부인들이 과하게 로테와 재상을 반겼다.
“두 사람 그렇게 서 있으니 정말 잘 어울리네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부부인 줄 알았을 거예요!”
“어머,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군요. 두 사람 정말 아무 사이 아닌 거 맞나요?”
로테는 부끄러운 척 ‘다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정말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요’ 하면서 오르테카 재상의 눈치를 살폈다.
‘재상은 로테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네.’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받아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러던 중 오르테카 재상과 눈을 마주쳤다. 분명 처음 봤을 땐 보라색 눈동자였는데.
‘이제 보니 진한 녹색이었네.’
보라색으로 착각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의 색깔이었다.
오르테카 재상은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리며 내게 고갯짓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인사한 뒤 티 파티에 집중했다.
그사이 헤텔 백작 부인은 로테를 앞에 두고 새로운 차를 가져와 자랑하기 시작했다.
“저희 헤텔 백작가에서 어렵게 구한 차입니다. 제 남편이 사업차 들른 베이스턴 왕국에서 구해 온 실레온 차입니다.”
베이스턴 왕국은 제국과도 교역하지 않는 폐쇄적인 왕국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베이스턴 왕국에서 유명한 차 같은 종류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로테, 손님들께 실레온 차를 따라드리겠니?”
“네. 어머니.”
로테는 주전자에 차를 우린 뒤 조신하게 일어나 내 앞에 차를 따라주었다. 화려한 태양 무늬에, 손잡이에는 황금 장미가 음각된 화려한 찻잔이었다.
로테가 상냥한 낯으로 물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한번 맛봐주시겠어요?”
나는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로테는 헤텔 백작가 최고의 미녀였다. 어머니인 헤텔 백작 부인은 언제나 그녀가 최고의 신사에게 시집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로테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기회가 올 거야.’
고귀한 자태를 가진 블란쳇 공작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저 남자야.’
황족보다 더 지배자 같은 오만함이 흐르는 남자. 잘생겼지만 어딘가 남자다운 매력이 부족한 오르테카 재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솔직히 그 옆에 있는 부인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가짜인걸.’
얼굴이 자신보다 예쁘긴 해도 매력은 자신이 더 있었다. 로테는 그들이 정식으로 혼인신고했다는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느꼈다.
물론 블란쳇 공작은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수줍음을 가장해 몰래 만남을 청해도, 능숙하고도 냉정한 예법으로 거절했다.
‘헤텔 양의 에스코트를 할 생각은 없는데.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서.’
‘부인분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흐음.’
날렵한 턱을 나른하게 쓸어내리던 블란쳇 공작이 로테를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왜 헤텔 양이 내 아내와 대화하지? 나를 두고서.’
‘예? 그, 그거야…… 같은 여자로서 좀 더 편하게 얘기를 할 수 있으니까.’
‘웃기는 소리. 내 부부 생활에 대해서 헤텔 양이 걱정할 일은 없어. 이미 충분히 봤겠지만.’
로테의 머릿속에 얇은 슬립만 입은 채 그의 방을 두드렸던 날의 밤이 떠올랐다.
솔직히 부인과 함께 있는 걸 보고 잠시 주저하긴 했다. 하지만 문틈으로 언뜻 보이는 남자의 몸이 너무 관능적이었다.
야수처럼 부푼 블란쳇 공작의 몸. 말초 신경이 자극되는 느낌에 로테는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부인과 함께 있어도 상관없었다. 제 육감적인 몸매를 보게 된다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하지만 두 사람은 문소리 같은 건 들리지도 않는 듯 서로에 빠져 있었다.
그때 부인을 보던 섬뜩한 붉은 눈동자가 로테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로테는 기절할 듯 소름이 돋아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쳤다.
어째서인지 이유도 알지 못하고 도망쳤다. 그것은 인간의 살기가 아니었다. 인간 이상의, 괴물이나 줄 법한 아득한 공포였다.
‘경고는 이게 마지막이다. 집안 사정은 알겠지만, 주제넘게 구는 건 거기까지야.’
로테는 예법도 잊고 창백하게 질린 채 도망쳤다.
‘저 남자는 안 돼. 너무……. 무서워.’
로테는 동생 플로라가 노리던 오르테카 재상을 고르기로 했다. 블란쳇 공작을 옆에 두고 있어서 시선이 가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재상만 한 남자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블란쳇 공작 부인에 대한 앙심이 사라지진 않았다.
에스텔 때문에 블란쳇 공작과 오르테카 백작에게 헤텔 백작가가 망신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망신주고, 오르테카 재상에게 자신의 매력을 더 보여주기로 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한번 맛봐주시겠어요?”
블란쳇 공작 부인, 에스텔은 우아하게 차를 들었다.
‘차를 드는 건 완벽하네.’
연보라색 드레스에 적당한 치장을 한 그녀는 이 티파티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하지만 고작 평민 출신 입양아다.
‘하지만 차를 드는 것만으로는 안 되지.’
사교계에 데뷔한 귀족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예법 테스트. 데뷔도 못 한 평민 입양아가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찻잔을 제대로 볼 수 없게 주의를 분산시키기도 했으니까.’
로테가 침을 꿀꺽 삼키며 에스텔의 시음을 바라보았다. 우아하게 차를 내려놓은 에스텔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앙트레인(향이 훌륭하네요).”
황실의 상징인 화려한 태양 무늬 찻잔, 특히 황금 장미 손잡이 찻잔에 차를 대접받을 땐 황실 예법을 따르는 게 오래된 관습이었다. 황실의 역사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요즘은 거의 하지 않아서 다들 모르던 것인데…….’
심지어 에스텔은 고대어로 칭찬한 것뿐만 아니라 완벽한 문장으로 차를 평했다.
“벨 누이아데 히와 이시아텐(하지만 차에 쓴맛이 나네요. 조절하는 게 좋겠어요).”
완벽한 발음, 완벽한 예법. 제국 레이디의 모범이 될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이 그 모습에 놀라자 에스텔이 의문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텐루아(문제라도 있나요)?”
무구함이 묻어나는 남색 눈동자. 로테는 불쑥 화가 치밀었다.
‘아니야, 뭔가…… 달랐는데.’
당황하던 로테가 다시 에스텔이 한 말을 되새겼다. 예상과 달리 고대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놀랐지만, 그녀가 배웠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중간에 단어 하나를 빠뜨렸어!’
고대어는 문법이 워낙 변칙적인지라, 로테는 사교계에서 통용되는 문장 을 그대로 외우곤 했다. 그리고 에스텔이 쓴 고대어엔 훌륭한 숙녀가 붙여야 하는 단어가 빠져 있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생각하던 문장과 조금 달라서요.”
“뭐가 다른 게 있나요?”
“네. 아마 티 파티가 처음이시라 긴장해서 헷갈리신 모양이에요. 벨 누이아데 히와 이시아텐 로아, 라고 하시는 게 맞답니다.”
로테는 상냥한 숙녀답게 우아하게 블란쳇 공작 부인의 실수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오르테카 재상을 보며 싱긋 웃었다.
“사교계의 많은 분이 고대어까지는 연습하더라도, 실제로 자주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보니 헷갈리시곤 해요. 재상님게서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
“물론 스스로 배움에 더 정진하실 필요가 있긴 하겠지요.”
주변의 귀부인들이 로테의 훌륭함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역시 로테 양은 대단하네요. 보통은 그렇게 고대어를 완벽히 익히지 않는데.”
“틀린 부분을 친절히 가르쳐 주시고, 대신 사과한 태도도 아주 아름답네요. 역시 사교계의 모범이 되는 숙녀예요.”
“과찬이세요.”
로테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흥, 어디서 나대래. 이제 감정 조절 못 하고 흥분하려나.’
하지만 에스텔은 로테가 예상하던 어떤 모습도 아니었다. 에스텔은 차분히 차를 내려놓은 채 우아하게 로테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히려 그녀는 안쓰럽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도대체 왜?’
로테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할 무렵, 오르테카 재상이 입을 열었다.
“로테 양.”
오르테카 재상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 순간, 로테는 바닥이 갈라져 떨어지는 듯한 불길함을 느꼈다.
***
나는 로테를 보며 혀를 찼다.
오르테카 후작의 눈에는 희미한 경멸이 올라왔다.
“교육에 정진하셔야 할 쪽은 로테 양입니다. 본인이 얼마나 경거망동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로테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제. 제 고대어가 틀렸다고요?”
“숙녀 고대어 교본에서 모든 문장 끝에 로아를 달아서 다들 착각하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로아를 붙이지 않는 게 맞습니다. 여러 명이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 그러면…….”
로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걱정 말아요, 충분히 어려울 만했어요.”
솔직히 갑자기 차 예절을 지적받아서 당황하기는 했다. 왜냐하면 이 찻잔에 마실 때 고대어를 사용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아무것도 안 했으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돋보이려고 애쓰다 실패한 사례였다. 로테를 차가운 눈으로 보던 오르테카 재상을 나를 바라보았다.
“블란쳇 공작 부인, 고대어에 상당히 정통하시군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아닙니다. 뛰어난 고대어 실력에 놀랐습니다. 고대어를 연구하는 학사도 이 정도로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로테는 분을 이기지 못해 얼굴이 새빨개졌다.
“마, 말도 안 돼요.”
“로테. 진정해라.”
딸을 따라 망신당하던 헤텔 백작 부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 역시 손에 식은땀이 가득 차 있었다.
“호호, 블란쳇 공작 부인의 지식 덕분에 부족함 많은 우리 로테가 깨달음을 많이 얻네요. 아직 보기보다 많이 어려서 배울 것이 참 많지요?”
“어머. 세상에. 제가 또 착각했군요.”
나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전 헤텔 백작 영애가 저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어요.”
“우리 로테가, 공작 부인보다 나이가 많긴 합니다. 그래도 그건 공작 부인께서 워낙 뛰어나셔서 그런 거지 우리 로테가 그리…….”
실수를 덮으려던 헤텔 백작 부인이 오르테카 재상의 얼굴을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로 헤텔 백작 부인을 응시하던 오르테카 후작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리베르탄 공작 부인은 대단합니다. 아르마티스 공주처럼 지혜롭고 배려심도 높군요. 로테 양의 실수를 감춰주려고 하신 것이지요?”
아르마티스 공주는 지혜에 아름다움까지 갖춘 제국 신화 속에서 가장 쳐주는 신붓감이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게 평가해 주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다.
“헤텔 백작 영애께서 품위를 지켜주실 것이라 믿었을 뿐이에요. 헤텔 백작 영애께서 스스로의 품위를 되찾으셨으니, 저는 다행이에요.”
“옳은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더 정진하는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시겠지요.”
오르테카 후작이 다 끝나기도 전, 하얗게 질린 로테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도망쳤다.
하지만 결혼적령기를 맞이한 숙녀가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헤텔 백작 부인은 더 곤경에 처했다.
“로, 로테! 죄송해요. 원래 저런 아이가 아닌데,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그래요. 이제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저런. 안타깝네요. 얼른 쾌차하길 빌어요.”
헤텔 백작 부인과 함께하던 귀부인들은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망신을 주려다 제대로 당한 게 헤텔 쪽이라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다.
‘딸 시집에 엄청 공을 들인 것 같은데.’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한 귀부인이 빈 찻잔을 뒤집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실레온 차는 대접받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옆에서 헤텔 백작 부인의 편을 가장 열성적으로 들던 귀부인이었다.
“생각해 보니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 같네요.”
“저도 급히 내일 있을 일이 떠올라서…….”
가만 보니 오늘 일이 묻히기는 무척 어려워 보였다.
‘딱 보니 내일이면 다 소문나겠네.’
그러면 좋은 가문에 시집 보내긴 더 어려울 거다. 원래도 평판을 엄청 열심히 관리하던 가문 같은데…….
나는 온화한 모습으로 헤텔 백작 부인에게 웃어주었다.
“그래도 전 실레온 차를 대접받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너무 걱정 말아요.”
사람이 꼭 결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여차하면 결혼 안 하면 되지. 나머지는 다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
요한은 헤텔 백작을 앞에 둔 채 우아하게 팔짱을 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블란쳇 공작님께서 반드시 들으셔야 할 좋은 정보가 있습니다.”
고개를 내저으며 주변을 힐끔거리던 헤텔 백작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무려 오르테카 재상님께서 찾으시던 정보입니다. 제 정보가 있다면, 오르테카 재상님을 밀어내고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는…….”
“들을 가치도 없군.”
요한이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딴 헛소리는 다른 곳에 가서나 해.”
“고, 공작님! 제 얘기를 듣지 않으시면 후회하실지도-”
저렇게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자들을 보면 우스움이 올라왔다. 가지고 놀 정도의 가치도 없는 이들이었다.
‘부인이 보고 싶어.’
이 성에 와서부터 유독 피곤한 모습을 보이던 에스텔.
‘얼른 블란쳇 공작령에 데려가서…….’
요한은 헤텔 백작을 멀리하고 에스텔을 찾아 방으로 움직였다.
방에서 베티가 나오고 있었다. 베티는 들어가려는 요한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주, 주인님?”
“왜 그렇게 놀라지?”
요한이 이상하다는 듯 문을 열자, 방 안에는 드레스를 막 벗으려던 에스텔이 보였다. 희고 투명한 목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요한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벗고 있다고?
요한이 돌아보자마자 베티가 들고 있던 슬립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