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가짜 초야 (2)2022.03.29.
헤텔 백작 부인의 다급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블란쳇 공작 부인. 이렇게 비가 쏟아질 때 나가시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저희 헤텔 백작성에서 머무르다 가시는 건 어떨까요?”
“맞습니다! 헤텔 백작성에는 재미난 구경거리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잠시 들러서 구경해 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헤텔 백작까지 끼어들어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려 요한을 보자, 요한은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내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겠지?’
나는 이제 와 태도를 싹 바꾼 헤텔 백작 부인의 표정을 살폈다.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리베르탄에서 데일 때로 데인 나는 어떻게 하면 상대가 가장 피곤하고 짜증 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잘못했다간 사교계에 나에 대한 악명이 퍼질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난 더 내려갈 평판이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나에게 함부로 굴지 못하게 확실하게 해주는 편이 좋았다.
“공작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공작님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닌걸요.”
미소를 지으며 순진하게 대답했다.
“저는 공작님께서 원하시면 이대로 다른 곳으로 가도 좋아요.”
나마저도 돌아갈 의사를 내비치자, 헤텔 백작가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하지만 요한과 나 사이의 대화에 무례하게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러면 역시 다른 곳을 찾을까?”
“하지만…….”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으니, 일행들을 위해서 헤텔 백작성에 머무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내 말 한마디마다 헤텔 백작가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고민할 게 뭐가 있어. 부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그러면…….”
헤텔 백작가 사람들이 일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헤텔 백작 부인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헤텔 백작 부인, 블란쳇 공작가에서 헤텔 백작가에 하루 신세 져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블란쳇 공작가에서 머물러주신다면 이 헤텔 백작가에 큰 영광일 겁니다.”
“역시 제 오해였나 봐요.”
“무, 무슨 오해를……?”
“헤텔 백작 부인께서 저를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헤텔 백작 부인의 미소가 어긋났다. 백작 부인은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어설프게 대답했다.
“불편하게 생각하다니요! 제가 왜 공작 부인을 불편하게 생각하겠어요.”
“역시 그렇죠? 방금 전 제게는 인사를 해주지 않으셔서 혼자 오해했네요.”
내 웃음기 섞인 말에 헤텔 백작 부인은 애써 수습하기 시작했다.
“여독이 쌓이셨으니 그럴 만도 하죠. 저도 가끔 피곤하면 괜한 오해를 하곤 한답니다.”
“한창 비까지 내리니 얼마나 피곤하셨겠습니까. 어서 안에 들어가서 편히 쉬시지요.”
서서히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풀려갔다. 내가 순진한 목소리로 되묻기 전까지.
“다행이에요. 부인인 저를 앞에 두고, 성인인 따님께 제 남편을 방으로 안내하라고 해서 오해했지 뭐예요. 그것도 제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신사의 방이라고 따로 말씀하시면서요.”
“…….”
“수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헤텔 백작 부인은 괜히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헤텔 백작은 차마 끼어들지 못했고, 같이 거론된 백작의 딸들은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 끝에 헤텔 백작이 백작 부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마른침을 삼키던 헤텔 백작 부인이 입매를 파르르 떨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손님을 대접한 지 오래되어 저도 모르게 예법을 어겼나 봅니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괜찮아요. 오해인데요, 뭘.”
그때 헤텔 백작성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짙은 남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남자였다. 뱀을 연상시킬 정도로 눈매가 길쭉했다.
‘느낌이 좀 무서운 사람이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헤텔 백작 부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오르테카 재상님! 안에서 쉬고 계시지…….”
오르테카 재상. 리베르탄에서 이름을 들어본 이였다. 오르테카 후작가의 가주이자, 제국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존재 중 하나였다.
‘저런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재상이 왜 이 헤텔 성에 머무르고 있는지 무척 의문스러웠다. 오르테카 재상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대답했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이 들려 나와봤습니다. 이제 보니 블란쳇 공작 부부가 와 있었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잠시 오해가 있었는데 다 풀렸습니다. 그렇지요, 블란쳇 공작 부인?”
헤텔 백작 부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맞아요. 다 해결되었어요.”
그래서 나도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헤텔 백작 부인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테카 재상의 눈이 가늘어졌다.
“해결을 했다니 다행이군요. 정말 해결된 건지 모르겠지만.”
오르테카 재상은 입매를 비틀어 웃은 뒤 저택 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뒤늦게 헤텔 백작의 딸 하나가 급하게 재상의 뒤를 따랐다. 헤텔 백작가에 왜 재상이 있었는지,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헤텔 백작가는 블란쳇 공작가뿐만 아니라, 재상 쪽에도 연을 대려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재상의 반응을 보면.
‘어느 쪽이든 줄을 대기 어렵겠어요.’
*** 헤텔 백작 부인이 씩씩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 입양아가 웃으면서 나한테 하는 거 봤니? 제대로 된 공작 부인도 아닌 게, 지금 제 주제도 모르고!”
“그런데 어머니, 정말 정식 공작 부인이 아닌 게 맞을까요?”
백작가의 장녀 로테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블란쳇 공작님의 반응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아서요.”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렴.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처형 일자가 잡혔단다. 그 입양아를 진짜 부인으로 여겼으면, 리베르탄 공작가를 멸문시키지도 않았겠지. 안 그러니?”
“그렇네요. 그러면 공작님은 왜 저희한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셨을까요?”
헤텔 백작가는 에스텔을 무시하면, 블란쳇 공작이 즐거워할 줄 알았다. 그가 가지고 놀다가 버리기 위해 에스텔을 들였다는 소문이 가득했으니까.
“그거야 알 수 없지. 어쩌면 우리가 너무 갑작스럽게 행동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헤텔 백작 부인이 제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하필 오르테카 재상님 앞에서도 너무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어.’
세가 기울어가는 헤텔 백작가에 이렇게 거물이 동시에 방문하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래서 헤텔 백작 부인은 제 두 딸을 두 거물에게 붙여 좋은 인연을 만들어보려 했다.
‘오르테카 재상 쪽도 대단하지만…….’
블란쳇 공작가는 이름난 부자였다. 기울어진 헤텔 백작가에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역시 블란쳇 공작가도 포기할 수 없어.’
“로테, 플로라. 너무 걱정 마렴.”
헤텔 백작 부인은 인근에서 소문난 미녀인 제 두 딸을 보았다. 그 입양아가 아무리 예뻐도 혈통까지 증명된 제 딸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지난 일이 아니라 앞으로란다.”
“그, 그러면……?”
“엄마가 네게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마. 그러니 너무 걱정 말고, 블란쳇 공작님과 오르테카 후작님께는 최대한 정숙하고 예쁜 모습만 보여주렴.”
로테와 플로라는 엄마의 자신만만한 말에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여름철 장마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내일 그칠 줄 알았던 비가 계속 쏟아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있다면.’
첫 만남에 문제가 있었던 것치곤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굳이 불편한 것을 꼽자면 역시, 오르테카 재상이었다.
‘재상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함께한 만찬장에서 그 부분에 대해 물어보자, 오르테카 후작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제 영지로 시찰을 가던 차였습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신세를 지게 되었지요.’
하지만 어쩐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겠지.’
나는 가벼운 드레스 차림으로 헤텔 백작가에서 준비했다는 악단을 구경하러 움직였다. 오르테카 재상과 블란쳇 공작 부부를 위해 힘깨나 썼는지 상당히 유명한 악단이었다. 악단이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헤텔 백작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음악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멍하니 정원 쪽을 바라보았다. 비가 한풀 꺾여서인지 정원사들이 우비를 입고 정원을 정돈하고 있었다. 그때 정원사 무리 중 어쩐지 익숙한 남자 하나가 보였다.
‘저 사람은…… 페뉼라 남작?’
요한의 기억 속 간수장이었던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무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뇌물을 받고 어린 요한을 고문하는 데 일조한 사람 아닌가.
‘내가 잘못 본 건가?’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데다, 제대로 본 게 아니라서 확실하진 않았다. 그래서 근처의 나무들에게 물어보았다. 헤텔성 나무들은 요정인 내가 말을 걸자 요란하게 환호하다가 대답해 주었다.
-희게 센 붉은 머리의 정원사? 저 정원사의 이름? 제이크였던가? 잘 모르겠네.
안타깝게도 나무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어서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언제 여기에 들어왔냐고? 언제였던가…… 실력도 없는 주제에 갑자기 정원사로 들어왔던 것만 기억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저놈, 그놈이잖아. 내 뿌리 밑에 이상한 걸 몰래 묻고 밤마다 확인하던 놈.
‘뿌리 밑에 이상한 걸 묻었다고?’
그것참 의문스러운 행동투성이였다. 나는 잠시 쉬러 나간다는 핑계로 정원에 나가 그 뿌리 밑으로 갔다. 나무가 친절히 뿌리를 움직여 상자를 밖에 꺼내주었다.
‘역시 그때 본 페뉼라 남작이 맞았어.’
상자 안에는 열쇠와 문서들이 있었다. 열쇠는 나도 잘 아는 수도의 가장 유명한 은행 금고 열쇠였고, 문서는 그동안 페뉼라 남작이 기록해 둔 귀족들의 명단이었다. 반역죄로 얽힌 리베르탄 공작가에 뇌물을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간수장을 통해 리베르탄 공작가에 줄을 대려고 했던 자들의 이름도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나무들에게 상자를 다른 곳에 숨겨 달라고 부탁하고 태연하게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와 막 드레스를 갈아입는데, 헤텔 백작성의 하녀 하나가 이상한 말을 건넸다.
“블란쳇 공작 부인, 헤텔 백작 부인께서 취침에 드시기 전에 잠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늦은 시간에?”
“예. 공작 부인의 마음을 풀어드리고 싶으신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화해를 청한다고?’
이상할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무척 찜찜했다. 하지만 내 찜찜함의 정체를 금세 풀렸다. 헤텔 백작 부인과 만날 시간이 되어 방을 나갈 때였다. 낮 동안 잘 보이지 않던 요한이 나타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부인. 귀족 중에는 딸자식을 팔아치우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 늦은 시간에 무작정 침실에 들여보내기도 하고.”
요한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몰라 눈을 깜빡였다. 요한은 나를 침대에 앉히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밤, 백작의 딸이 날 자기 침대로 부르더라. 얼굴을 보니, 내가 오지 않으면 본인이 직접 올 생각인 것 같더라고.”
“…….”
“물론 난 거절할 거야. 그런데 부인은 그걸로 충분해?”
속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나를 밤늦게 부르던 이유가 이거였어?’
아무리 요한이 거절할 거라지만, 요한의 방에 다른 여자가 들어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 아직 우리가 얼마나 사이좋은 부부인지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요한이 눈꼬리를 휘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제대로 한번 보여주는 게 가장 좋겠지.”
요한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인은 어때?”
창밖의 어둠이 더 짙어지며 초침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우리를 조용히 비추고 있는 촛불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걱정하지 마. 부인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상대를 속이는 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요한이 나에게만 들리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가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그러자 육감적이고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나는 이런 일이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상황이 나를 적극적이게 만들었다. 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를 데리러 온 하녀든, 헤텔 영애든 목적은 하나일 것이다.
“……아니요.”
결국 난 내 마음을 정했다.
“전 괜찮아요.”
어차피 끝까지 하는 게 아니라면 흉터가 들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저도, 공작님과 가까이 있는 게 싫지 않은걸요.”
요한은 가파르게 오르는 호흡을 억누르는 듯했다.
“싫지, 않다고?”
침대 이불보가 우리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반쯤 벗고 있는 요한과 몸을 밀착하고 있는 이 상황이, 내 기분을 무척 이상하게 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려 퍼졌다. 이제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에스텔.”
요한이 억누르는 듯 흉흉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으르렁거렸다.
“더 만지는 척해.”
그가 내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에 더 가까이 대었다. 근육이 잡힌 탄탄한 가슴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