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가짜 초야 (1)2022.03.25.
공작령으로 떠나기 전까지 정말 바빴다. 내가 내정을 돌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사람들 몰래 해야 할 일도 있지.’
-아무래도 저번 폭주가 가라앉은 건 네 요정의 힘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네 몸에 남은 상처만 봐도 그래.
“그러면 제 요정의 힘이 신성력처럼 흑마력의 폭주도 막을 수 있는 건가요? ”
-비슷한 효과를 보였지만, 신성력과 요정의 힘은 다르다. 아무래도 아가가 요정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잘 모르나 보구나.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가한테 말해줄 게 있다. 한번 맞춰보겠느냐?
은근한 자랑이 섞인 나무들의 목소리에 내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혹시 요정에 대한 얘기인가요? 근처 나무들은 나무님들보다 아는 게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큼큼. 하지만 우리가 누구냐.
-우리 아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맨날 자고 있는 구름나무들에게 난리 쳐서 새로운 정보를 얻어왔단다! 그놈들 짜증을 듣느라 얼마나 고생했던지…….
“구름나무요? 그런 나무들도 있어요?”
나무들과 꽤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나무들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부족했다.
-그런 놈들이 있다. 하루 종일 잠만 자면서 고대 시대부터 살아왔다는 자부심만 강한 놈들. 세상에 지들만 특별한 줄 알아.
-정작 그 특별하다는 우리 요정 아가랑 대화도 안 해본 것들이!
“나무님들도 저 오기 전에는 맨날 잠만 주무셨다면서…….”
-뭬야?
“구름나무가 얼마나 특별한 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 가장 특별한 나무가 있다면 바로 나무님들이에요.”
나는 꼬장꼬장한 나무들이 삐지지 않게 나무 기둥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기둥이 부르르 떨리며 감동받은 듯 가지로 춤을 췄다.
-역시 우리 요정 아가에겐 우리밖에 없지. 앞으로도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에게 이야기하거라. 뭐든 도와주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안 그래도 바쁜 앤데 빨리 본론부터 얘기하쇼!
-어쨌든 구름나무 놈들이 말하길, 요정은 신의 피를 이은 존재라더구나.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이거다. 요정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어.
-흑마력이 신의 힘과 관련되어 있다는 얘기는 전에 해주었지? 그래서 그때 우리랑 연락이 안 되었다고도 해주었고.
나무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지만 나는 신이라는 얘기에 충격을 받아 멍해졌다.
‘신의 피? 내가 그런 대단한 존재와 관련되어 있단 말이야?’
신은 정말 상상치 못한 존재였다. 나무들이 가지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릴 때까지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빡거렸다.
“그런데 왜 요정은 저밖에 없는 건가요? 그리고 저는 왜 고아원에 있던 걸까요?”
그렇게 특별한 존재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도 사라진 게 무척 이상했다.
-거기까지는 구름나무 놈들도 잘 모르더구나. 하여튼 한참 자랑질하더니 중요한 건 아무것도 몰랐어. 요정의 힘도 요정마다 달라서 직접 만나기 전까진 알 수 없다고 하질 않나.
-사실 우리는 네가 말해준 원작 얘기도 네 요정의 힘과 관련된 게 아닐까 싶다.
“확실히 요정의 힘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긴 해요. 아직 저주를 해결하느라 제 힘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도 안 되고, 쓸 수도 없다지만요.”
요즘 나는 틈나는 대로 나무들의 언어를 연습하면서, 나한테 벌어진 이상한 일들을 되새겨보았다. 혹시 요정의 힘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앞으로도 계속 여러 나무에게 연락하면서 알아보마. 흑마력과 관련된 일만 아니면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한테 연락할 수 있는 거 알지? 우리가 계속 아가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물론 알죠. 저 때문에 잠도 안 주무신다고 했잖아요.”
원래 나무들은 일정 시간 동안 잠을 자야 했다. 그런데 나무들은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최대한 잠을 줄여가며 내 목소리를 기다린다고 한다.
‘가족이란 게 이런 걸까?’
나무들은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나는 까칠까칠한 나무 기둥에 뽀뽀했다.
“항상 고마워요. 나무님들이 있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거예요.”
어쩐지 갈색의 나무껍질이 바들바들 떨리며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근처의 나무들이 나뭇잎을 우수수 떨어뜨리며 노성을 질렀다.
-왜 정보는 같이 알아봤는데 저놈만!
-이건 억울하다! 아무리 저놈이 아가 네가 처음 대화한 존재라도 노력은 우리 전부가 하고 있는데!
결국 나는 다른 나무들에게도 뽀뽀를 해주어야 했다.
‘이런 걸 보면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나무들의 목소리가 대체로 노년에서 중년의 남자 목소리라서 더 그랬다. 나와 관련되면 언제나 극성맞아지는 나무들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며 웃게 되었다. 베티가 새로 생긴 내 집무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마님! 이번 공작령 시찰에 대해서 여쭤보신 것 다 준비해 두었어요.”
“고마워.”
이번 공작령 시찰은 꽤 중요했다.
‘블란쳇 공작가 가신들의 반감을 덜 사야, 사교계에 진출하기가 편해.’
지금 나는 공작가의 내정 때문에 블란쳇 공작가의 재산을 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자금을 빼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니 사교계에 나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을 늘려야 해.’
그래야 도망칠 때를 대비해 가짜 신분을 만들고, 도망칠 길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흑막인 요한의 눈을 속여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우선 조금 덜 미움받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블란쳇 공작가에 대한 정보를 훑어보는 사이, 베티가 막 깨달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이번 공작령 시찰과 관련해서 주인님께서 마님의 건강을 각별히 신경 쓰라고 지시하셨어요.”
“공작님께서?”
“그리고 이건 제가 몰래 알아본 건데…….”
베티는 내 귓가에 대고 비장하게 속삭였다. 어차피 둘밖에 없어서 그럴 필요 없을 텐데.
“주인님께서 가신들한테 마님께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마님께서 신경 쓸 일이 최대한 줄어들게요.”
“세상에. 그렇게까지?”
“역시 주인님께서는 마님을 엄청나게 신경 쓰시는 게 분명해요. 부인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귀족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저 잘 알아왔죠?”
왠지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에스텔.’
요한은 아직 나한테 어떤 진실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아직 사랑한다는 말도 해준 적 없었다.
‘나도 베티처럼 있는 그대로 믿고 싶어.’
하지만 그러기에는 얽힌 것들이 너무 많았다.
“참, 요리사가 떠나시기 전 마님이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한다네요. 오늘 저녁도 기대하세요.”
베티의 말을 듣다 보면 이 공작저의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난 내가 사랑받기 어려운 존재라는 걸 잘 알았다.
‘마님께서 마음이 아프시다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행동하는 거겠죠? 아무리 애라지만 참 정이 안 가는 아가씨예요. 분에 넘치게 사랑받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태생도 불분명한 고아가 어련하겠니? 우리 스텔라 아가씨는 먹는 모습만 봐도 기분 좋고 사랑스러웠는데. 어쩌다 저런 게 들어와서…….’
‘지금 우리 얘기 다 듣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거 맞죠?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러울까.’
가뜩이나 미운 리베르탄일 텐데, 그런 나에게 베티는 너무 고마운 존재였다.
‘설령 베티가 미래의 배신자라 해도.’
지금 내가 고생하지 않고, 나쁜 소리를 안 듣는 건 베티의 노력 때문이 분명했으니까. 지금도 나를 위해 거짓말해 주는 거고. 나는 베티의 두 손을 붙잡으며 생긋 웃었다.
“베티. 나를 위해 힘내줘서 고마워. 베티가 없었다면 난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그러자 베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에요. 마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감사하실 필요가 없어요.”
베티가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고해성사했다.
“결국 마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못 했는걸요. 페트리샤 님을 제대로 막지도, 오빠를 설득하지도 못했어요.”
“난 베티가 나를 위해준다는 마음이 고마운 거야. 그렇게 해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
감성이 풍부한 베티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난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너무 고마워. 그리고 언제든 나 때문에 네가 힘들다면, 포기하거나 쉬어도 돼. 알았지?”
베티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마님.”
“응?”
“마님한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제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눈물을 흘리는 베티의 표정이 무척 살벌했다. 당장 누구 하나 족칠 것 같았다. 베티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사 그게 주인님이라고 해도…….”
*** 영지를 시찰하는 날이 다가왔다. 전날 잠을 설쳐서인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내 상태를 눈치챈 요한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부인. 몸이 안 좋아? 다른 날로 미룰까?”
“아니요. 좀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이동에는 기사단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다. 하루를 미루면 피해가 커진다. 내 거절에 요한은 심각하게 내 이마를 쓸었다.
“부인이 너무 약해서 어디 데리고 가지도 못하겠어.”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닌데요?”
“내가 무서워서 못 데려갈 거 같다고. 내가.”
요한이 양손으로 내 두 뺨을 감쌌다.
“부인은 스스로의 건강에 대해서 너무 무지해. 스스로를 너무 함부로 생각한다고.”
심각한 얼굴로 내 두 볼을 늘리며 꼬집었다.
이렇게 얼굴이 뭉개지면 하나도 안 예쁜데. 요한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실실 웃음을 흘렸다.
“부인이 움직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는지 알아?”
“자모해써요…….”
“잘못했으면, 뭘로 벌을 받을 건데.”
요한의 눈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벌이라는 말에 어깨가 움찔했다. 장난스러운 투였지만, 상대가 요한인 이상 어떻게 될지 모른다.
“솔직히 벌은 좀…….”
“그거,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의 태도가 전혀 아닌데.”
“부인한테 벌을 주는 남편이 세상에 어딨어요. 너무해요.”
“여기.”
내 불만스러운 말에도 요한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꽁 박았다.
“블란쳇 공작령까지 가는데, 큰 문제야 없겠지만 그래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어.”
요한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나도 부인의 안전부터 생각하겠지만, 부인 스스로도 경각심을 가져야 해.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요한이 겨우 내 두 뺨에서 손을 뗐다. 볼에 손을 대니, 화끈거리는 게 살짝 부은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벌을 준 거 아닌가?’
그런 눈빛으로 보고 있자, 요한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래 봐야 귀엽게밖에 안 보이니까 포기해.”
“……사실 귀엽게 보이려고 한 거였어요.”
“그러면 아주 성공했네. 부인은 숨만 쉬어도 귀여워 보이잖아.”
폭주 이후로 요한의 태도가 확실히 변했다.
‘콕 짚어서 말할 수는 없는데…….’
그동안 요한은 다정하면서도, 감출 수 없는 오만함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조심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자꾸 장난을 쳐서 나도 모르게 편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어쩌면 흑막인 요한이 작전을 변경한 걸지도 몰랐다. 난 사라져 가는 경계심을 다시 끌어올렸다.
‘이러다 실수하면 큰일 나.’
곧이어 블란쳇 공작령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 공작령으로 가는 길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험난했다. 마법진을 이용해 단거리를 조금씩 이동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론 마법이 안 통하는 내 체질 때문에 더 그런 거 같지만.’
저녁쯤 마차 행렬이 멈추고, 기사단장 레이몬드가 마차 문을 열었다.
“주군. 아무래도 근처 성에서 머물다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비도 오는데, 산을 넘다가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에 멀쩡하던 하늘에서 비가 우수수 쏟아졌다.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헤텔 백작성이 있다. 미리 연락해 두었으니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거다.”
흑막의 준비성은 역시 남달랐다. 요한은 정말 모든 걸 대비해 놓는 거 같았다.
‘헤텔 백작가, 베티의 목록에 있었어.’
역사는 깊지만, 백작가임에도 자작 가문과 비슷할 정도로 세가 약한 가문. 그동안 쭉 중립파였다가 블란쳇 공작가와 연을 맺고 싶어 하는 가문이라고 했다.
‘최근 그런 귀족 가문이 정말 많댔지.’
헤텔 백작은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한걸음에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부인과 백작의 두 딸도 함께였다.
“안녕하십니까, 블란쳇 공작님. 조촐하지만, 저희 헤텔 백작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작님을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정말 영광입니다!”
블란쳇 공작가를 손님으로 맞이하여 기쁘다는 티가 흘러넘쳤다. 물론 그들에게 난 손님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요한만 보고 있었다.
‘귀족들이라 내 처지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네.’
헤텔 백작 부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제 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무척 당황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몸을 좀 녹이시는 게 좋겠어요. 로테, 공작님께서 편히 쉬실 수 있게 성을 안내해 주겠니? 제 딸이 많이 부족해도, 예쁘게 봐주세요.”
헤텔 백작의 딸 로테가 수줍은 얼굴로 요한에게 다가오려는 찰나였다.
“너무 부족한데.”
모두에게 들리도록 낮게 중얼거린 요한이 나를 확 끌어안았다. 단단한 품이 어중간하게 서 있던 나를 감쌌다.
“아무래도 헤텔 백작성에 온 건 내 실수였군. 이런 식인 줄 알았으면, 들르지도 않았을 텐데.”
“그, 그게 무슨…….”
“레이몬드. 급하게 근처의 다른 마을을 알아봐. 좀 어렵더라도 다른 곳에 머무르겠다.”
기쁨에 차 있던 헤텔 백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블란쳇 공작님. 저희가 무슨 실례라도…….”
하지만 요한은 헤텔 백작을 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 바라보았다.
“미안해. 부인. 몸이 안 좋을 텐데 내가 부족해서 다른 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물론 헤텔 백작의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헤텔 백작 부인은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하며, 드디어 내 눈치를 살폈다.
“블란쳇 공작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