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우리 사이에 이혼 같은 건 없어.2022.03.22.
“말도 안 돼. 이건, 뭔가 잘못됐어.”
리안드로의 눈빛이 흔들렸다.
“신전의 직인이 맞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 분명 조작을 하거나…….”
그 순간 리안드로가 멈칫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의 시선에 황금빛이 도는 신전의 문양이 들어왔다. 신전의 정식 문양에서 도는 금빛 신성력까지 조작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저 악마가 진심으로 레이디와 결혼할 리는 없습니다. 레이디. 저런 수작질에 넘어가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저건 모두 가짜…….”
그렇게 몰입하던 그는 나를 보고 굳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요한의 품에 안겨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리안드로의 푸른 눈이 다시금 충격에 빠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강직해 보이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저러지?’
아무래도 내가 그를 믿고 따라주지 않은 것에 크게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리안드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레이디 에스텔.”
하지만 난 그게 좀 우스웠다. 여태까지 날 만난 적도 없고,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날 그저 예스텔라의 그림자로만 봤으면서.’
다들 하나같이 자기 멋대로였다.
‘하지만 요한은.’
요한이 내 손에 결혼 계약서를 쥐여주었다. 내가 결혼 계약서를 만지작거리자 요한이 물었다.
“부인. 결혼 계약서가 신기해?”
요한은 조금 전 충격받은 모습에서 벗어나 여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가 사르르 달콤하게 눈웃음치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보고 싶으면 계속 봐도 돼.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진짜 부부니까.”
“그렇네요. 솔직히 신전의 인장까지 있을 줄 몰랐어요.”
앞에서 리안드로가 나를 향해 무어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요한에게 말했다.
“신전의 인장까지 받으면 이혼하기 어렵잖아요.”
“이혼?”
요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랑 이혼하려고?”
붉은 눈동자가 사나운 맹수처럼 번뜩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우리 사이에 이혼 같은 건 없어.”
단호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다정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저놈 때문은 아니지?”
“아니에요! 보통 귀족들도 신전의 인정까지는 받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좀 놀랐던 거예요.”
“우리처럼 서로를 아끼는 부부가 잘 없는 것뿐이야.”
요한이 결혼 계약서를 쥔 내 두 손을 감쌌다.
“하지만 부인, 앞으론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오해해서 미쳐버리면 어떻게 해.”
“…….”
넌 이미 미쳐 있잖아! 속으로 요한을 타박하는 와중에도 두근거리는 심장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원작을 바꿨어.’
원작에서 요한은 나를 위협하기 위해 여러 ‘사건’을 준비해 두었다. 예를 들어, 안톤이나 페트리샤처럼 나를 괴롭히거나 힘들게 할 사건들 말이다.
‘하지만 거의 없어졌지.’
내가 겪은 건 한두 가지뿐, 이제 그런 위협이나 괴롭힘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난 블란쳇 공작 부인의 일을 할 수 있었고, 신전의 인정을 받은 정식 블란쳇 공작 부인이었다.
‘요한의 복수가 끝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콰앙! 요란한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요한의 품에 안겼다. 리안드로가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검을 휘두르며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에스텔!”
“이제 상관도 없는 남의 부인 이름은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요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불청객 주제에.”
리안드로의 주변에 붉은색 마법 술식이 빠르게 떠올랐다. 마법 술식 위로 날카로운 붉은 화살들이 나타나 리안드로를 공격했다.
“이딴 마법으로 나를-!”
“마음대로 생각해.”
리안드로의 발아래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그림자들이 리안드로의 사지를 옭아맸다. 리안드로는 옭아매는 그림자를 단번에 부수고 검기를 날렸다. 물론 그의 공격은 방패처럼 움직이는 마법 술식에 가로막혔다. 보기만 해도 질릴 것 같은 엄청난 접전이었다.
‘남주와 흑막의 싸움은 다르구나.’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잘못 끼었다간 단번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쥐새끼처럼 잘 피해 다니네.”
요한의 붉은 눈이 맹수처럼 날카롭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고작 쥐새끼지.”
“크윽!”
리안드로의 사지를 묶던 검은 그림자는 사슬이 되어 그를 꿇어 앉혔다.
“시간 낭비는 여기서 마치는 것으로 하고.”
그는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러자 마법 술식들이 유려하게 부딪치며, 다른 술식을 빚어내고 점점 거대해졌다.
“나중에 확실히 처리해 줄게.”
그 말과 동시에 리안드로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리안드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땅바닥에 검을 푹 꽂아 넣었다. 하지만 리안드로가 아무리 검에 힘을 주고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리안드로의 몸이 점점 뿌옇게 흐릿해졌다.
“블란쳇의 악마. 네놈이 이긴 줄 알겠지?”
리안드로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사납게 웃었다.
“하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는 법이다. 교묘한 수작으로 거짓을 덮으려 해도 거짓은 결국 거짓에 불과한 법!”
핏발이 선 리안드로의 두 눈이 원통하다는 듯 요한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날 선택하지 않더라도, 너 또한 선택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전히 나를 보물처럼 끌어안듯 쥐고 있던 요한이 일순 멈칫했다. 그리고 그때에 맞춰서 리안드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둘만 남았다. 전투의 흔적이 여실히 남은 정원은 난장판이었다.
“……공작님. 깨어나자마자 힘을 쓰셨는데 괜찮으세요?”
“전혀. 오히려 상태가 더 좋은걸.”
확실히 폭주 때 생겼던 검은 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주군!”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블란쳇 공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이 밀려들어 왔다. 리안드로의 힘 때문인지 다가오지 못했던 모양이다. 요한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커튼을 확 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닫아버렸다. 한순간 햇살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요한이 나를 보며 사근사근 웃었다.
“그러고 보니 부인, 저딴 놈이 갑자기 닥쳐서 물어보지 못했네. 날 돌보느라 힘들거나 아픈 일은 없었어?”
“신기할 정도로 공작님께서 걱정하셨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흐음.”
요한이 쓰린 표정으로 내 손목에 남겨진 붉은 자국을 보았다. 그리고 요한의 꿈속에서 생겼던 상처들까지. 이미 그의 손에 강하게 내 손이 잡혀서 손을 뺄 수도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아프진 않은데.’
거기다 손바닥 상처 같은 경우에는 꿈에서 났던 거라 그런지 고통은 없었다. 이제 거의 안 보이기도 하고.
“부인. 나랑 같이 블란쳇 공작령에 내려가지 않을래?”
“블란쳇 공작령에요?”
“슬슬 시찰하러 갈 때도 되었고, 이제 다들 새 공작 부인을 만날 필요가 있잖아.”
영지 시찰은 영지를 거느린 귀족들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였다. 안주인이 내정을 관리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원작에서 나는 진짜 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지 시찰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건 원작이 바뀌어 간단 의미기도 했지만, 다른 의미로 문제기도 했다.
‘원작의 지식을 활용하기 어려워질 텐데.’
그래서 마음속 깊이 걱정이 솟아났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블란쳇 공작 저택의 사람들과 달리 공작령 사람들은 더 날 것의 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요한이 그들 하나하나의 감정을 통제하진 못할 테니까.
‘무작정 리베르탄 출신인 나를 미워할 텐데.’
그때 요한이 긴장한 내 두 손을 큰 손으로 덮었다. 따듯한 온기가 밀려왔다.
“뭐가 걱정이야. 내가 있는데.”
그가 ‘도대체 부인이 뭘 걱정하는 걸까?’ 하고 감싸 쥔 내 손에 입술을 쪽쪽 맞추었다.
“많이 힘들면 다음에 갈까? 꼭 지금일 필요는 없어.”
“아니요. 지금 가요.”
하지만 겁난다고 피할 수는 없다. 앞으로 더욱 원작과 다르게 이야기가 진행될 테니까.
“사람들을 많이 만난 적 없어서 긴장했나 봐요. 제가 워낙 몸이 약해서 리베르탄 밖으로 나가지 못했거든요.”
잠시간 나를 바라보던 요한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가면 그동안 부인이 해보지 못한 것들을 다 경험할 수 있을 거야.”
일부러 리베르탄을 말했는데도 요한의 얼굴에선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슬퍼 보였다.
“절대 부인의 시간을 헛되게 쓰는 일 없어.”
“…….”
“물론 계속 나랑 같이 있을 거고.”
어쩐지 요한이 뭔가를 많이 준비해 놓은 거 같다.
‘왜 이렇게 무섭지?’
왠지 그가 했다는 준비가 정상적일 것 같지 않았다.
*** 어두운 신전 내부. 고위 신관이 아닌 이상 절대 출입하지 못하는 깊은 비밀 장소였다. 촛불 몇 개가 어둠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나이 든 신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블란쳇 공작이 신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무슨 속셈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치료 목적이라지만, 그자의 속셈을 어찌 짐작하겠습니까. 그곳에 누구를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신전은 블란쳇 공작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신조차 무시하는 죄인. 신관들은 암암리에 그 간악무도한 죄인을 처벌하고 싶었지만, 한창 세가 강대한 공작을 어떻게 처리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 그의 요청이다. 신관들은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유리구슬처럼 맑은 목소리가 천막 너머에서 들려왔다. 촛불이 일렁이며 정숙한 차림의 여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처럼 눈부신 금발, 깊은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 첫눈에 보기에도 무척 싱그러워 보이는 여자.
“예스텔라 님!”
예스텔라 리베르탄. 죽었다고 알려진,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이었다. 예스텔라가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불안해하는 신관들을 돌아보았다.
“제가 가겠어요.”
그 자리에 모인 고위 신관들이 예스텔라를 무척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말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스텔라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신전에서 감춘, 성녀였으니까.
“……성녀님. 그건 어렵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런 위험한 곳에 성녀님께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성녀는 신전에서 비밀리에 모셔온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나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반역죄로 가문이 멸문당하자, 성녀인 예스텔라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얼마나 더 주의를 기울였던가. 그런 부단한 노력 끝에 예스텔라는 성녀로서 안전하게 이곳에 지낼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요한 블란쳇 공작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어 가짜를 끌고 간 것이니까.
“그러니 더욱 제가 가야 해요.”
예스텔라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래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은 저이니까요.”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친딸은 예스텔라였다. 당시에는 죽었다고 알려져 있어 가짜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그녀는 살아 있었다. 누구보다 고귀한 모습으로. 어찌 되었든 고귀한 리베르탄의 피가 흐르는 진짜는 그녀였다. 그러니 마땅히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되어야 했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짜인 그녀뿐이다.
“블란쳇 공작은 신마저 무시하는 죄인입니다. 성녀님.”
“신전의 귀한 보물이신 성녀님을 그런 무서운 곳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신관들의 염려에 예스텔라는 도리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두 손을 꼭 모은 그 모습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무척이나 가녀렸다.
“아마 신께서 내리시는 시련일 거예요. 제가 진짜 아내가 되어 그를 바꿔보겠어요.”
요한 블란쳇 공작. 그가 이토록 무도한 것은 진짜인 예스텔라가 속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스텔라는 신전에서 공작의 아내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안타깝게도 진짜가 아닌 가짜이기에…….’
블란쳇 공작은 아직 사랑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을 진정으로 받아주고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진짜 피를 이은 그녀만이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스텔라가 가야만 했다. 진짜로서 속죄하기 위해. 의도하지는 않은 일이지만 블란쳇 공작이 자신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성녀인 나의 속죄만이 죄 많은 그를 구원할 수 있어.’
그의 아내 자리를 되찾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