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넌 진짜 내 아내야2022.03.18.
나는 리안드로를 보고서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 남자가 갑자기 왜 나를 구하러 온 거지?’
떠오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리안드로 펠시스, 원작의 남자주인공, 그리고…….
‘내 전 약혼자.’
정확히는 리안드로의 약혼자는 리베르탄 공작가의 친딸 예스텔라였다. 나보다 반짝이는 금발, 호수같이 맑고 파란 눈. 꽃밭에서 꽃을 선물하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태양처럼 빛나고 사랑스러운 소녀. 사람들은 예스텔라를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천사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천사가 불치병으로 죽지 않았다면, 이 약혼은 유지되었으리라.
‘특히 리안드로의 첫사랑은 예스텔라니까.’
리안드로는 어릴 적 정원에서 화환을 쓴 채 웃는 사랑스러운 소녀를 보고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 천사 같은 소녀를 첫사랑으로 품고, 소녀를 지켜줄 남자가 되기 위해서 타국에서 10년간 검술을 수련하며 기사가 되었다. 이후 타국에서 돌아온 리안드로는 리베르탄 공작저에서 한 소녀를 발견하게 된다. 언뜻 보기엔 예스텔라와 비슷해 보이는 반짝이는 연분홍색 백금발의 아름다운 소녀. 자신의 첫사랑과 너무도 닮은 소녀. 하지만 리안드로는 10년의 세월을 체감하며 그 소녀를 예스텔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 감정이 변치 않는 것을 보며 사랑의 무게를 실감하지만.
‘그건 나였지.’
착각에 빠졌던 리안드로는 소녀의 정체를 알게 되고, 큰 배신감을 느낀다. 안타깝게 죽어버린 첫사랑에 대한 충격과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 가짜에 대한 분노로 리안드로는 약혼을 파기해 버린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야.’
리베르탄 공작가가 그를 속인 것은 맞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나는 리안드로가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리안드로가 파혼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원작에서처럼 보호받지 못하고 계속 학대당해야 했으므로. 만약 리안드로가 나를 그렇게 버리지만 않았다면, 나는 무사했을지도 모른다. 중립파에 가까운 펠시스 후작가에겐 그 정도 능력이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나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던 것도 그래.’
태양처럼 빛나고 있던 예스텔라와 달리 달처럼 저물고 있던 불쌍해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했다. 차마 제 첫사랑과 비슷한 여자가 또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고.
[‘걱정 마십시오. 레이디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레이디가 그 지옥 속에 남아 있게 하지 않겠습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기사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시나요?’
‘죄송합니다. 제 마음은 모두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레이디 같은 악녀를 구하는 것도, 천사 같은 그녀를 위한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작의 도망을 떠올려볼수록 기분이 미묘했다. 리안드로를 따라가도 나는 도망에 실패한다. 거기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또 예스텔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설령 내가 언젠가 버려질 가짜라고 해도, 블란쳇 공작가에서 나는 예스텔라의 대신이 아니었다. 다시 그녀의 대역으로 돌아갈 자신은 없었다.
“레이디.”
리안드로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아래에서 안전하게 받아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주십시오.”
리안드로의 푸른 눈동자에선 묘한 열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모르게 테라스 난관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
“그런데 저, 기사님은 누구세요?”
그러자 리안드로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저희가 전에 만난 적 있었나요?”
웃기지만 이게 맞는 답이었다.
‘내가 리안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원작의 기억을 깨닫게 되어서니까.’
그전까지 나는 전 약혼자라는 존재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전까지 리안드로와 나는 만난 적도 없었다.
‘지금 요한도 있으니까…….’
원천 차단하는 게 좋았다.
“죄송하지만 제 기억 속에 없는 분이신데요.”
“저는.”
리안드로의 푸른 눈동자가 추억으로 물들었다. 그가 떨리는 입술로 고해성사하듯 경건하게 말했다.
“레이디에게 속죄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거절했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으니, 굳이 이렇게 와서 말씀하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안녕히 가세요.”
요한이 괜한 오해하지 않겠지.
‘리안드로에게도 사정은 있겠지만.’
리안드로는 이미 예스텔라를 그리워하며, 나를 보지도 않고 버렸다. 나는 천사인 예스텔라와 달리 착하지 못해서 내 고생에 일조한 사람까지 감싸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리안드로는 알아서 잘 살 테니까.
“레이디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지만.”
그러자 리안드로의 얼굴에 묘한 절박함이 서렸다.
“저는 과거 레이디의 약혼자였던 리안드로 펠시스입니다. 그래서 저는 레이디께서 고통받는 걸 두고 보지 못하겠습니다.”
“…….”
“레이디를 되찾아오려 합니다.”
선이 굵은 얼굴과, 몸에 딱 맞춰 떨어지는 갑옷이 리안드로의 금욕적인 느낌을 더욱 부각시켰다. 늑대를 닮은 차가운 얼굴에선 알 수 없는 슬픔과 애절함이 깊이 묻어났다.
“무슨 약혼자요? 저를 되찾으신다고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리안드로에게 물었다.
“제가 예전에 약혼했다는 것은 알지만, 이미 파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데 저를 되찾으신다고요?”
“저도 레이디와 오래전 파혼한 것을 압니다. 하지만 오래 후회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레이디를 구할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왜요? 저는 남편이 있는 몸이에요.”
“남편.”
푸른 눈동자에 불이 붙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그가 이를 갈며 물었다.
“그딴 놈을 남편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아차. 대충 보내려다가 역린을 자극해 버렸다.
‘나는 요한과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아니었지.’
요한이 부인이라고 부르고, 블란쳇 공작저에서 나를 공작 부인 대접해 주고 있긴 해도 난 가짜 부인에 불과했다. 원작에서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내 이름이 적힌 혼인 계약서를 줬지만, 요한은 제출하기는커녕 자기 이름을 적지도 않았으니까.
“레이디! 레이디께선 지금 그 악마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그대로 찢어버렸다고 했던가.
‘근데 내가 지금 이걸 알고 있는 걸 알면 큰일 나는 거잖아!’
황태자의 입을 막아버렸던 이유가 뭐겠는가. 최대한 내가 가짜 부인이라는 걸 모른 척하려고 아니었던가.
“미안하지만 지금 제가 기사님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네요. 설령 내 남편이 악마라 해도 기사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지금 사교계에서 사람들이 레이디를 두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면 절대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 겁니다. 다들 레이디를…….”
“제가 그걸 알아야 할까요?”
참담해 보이는 리안드로를 살짝 노려보며 대답했다.
“제가 보기엔 딱히 알 필요 없는 일 같은데요.”
“왜 저를 밀어내십니까?”
뭐?
“생각해 보면 방금 전 만남부터 그랬습니다. 저는…… 레이디를 구하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쉽게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과 행운이 따라서 겨우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리안드로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찌하여 레이디께선 저를 매몰차게 대하시는 겁니까? 유일한 당신의 편을…….”
“기사님. 지금 착각하고 계세요.”
내 차분한 말에 리안드로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이미 파혼한 사이인 데다 저흰 서로 만난 적도 없잖아요.”
“그건…….”
리안드로의 표정이 조금씩 흐려졌다. 확실히 남자주인공이라는 위치를 부여받을 정도로 근사한 얼굴이었다. 비에 젖은 듯한 반짝이는 은발과 물처럼 파란 눈동자. 마치 비 오는 날을 연상시킬 정도로 묘한 애수에 젖은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비를 맞고 처량하게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대형견 같기도 했다.
‘하지만 꺼림칙해서 싫어.’
나도 요한과 대하는 태도가 좀 다르다는 걸 알지만, 별로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요. 고생해서 오신 건 안타깝지만, 그건 기사님께서 착각하신 몫이니 어쩔 수 없어요. 돌아가시는 길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자연스럽게 마무리를 지어가던 찰나.
“안 됩니다.”
갑자기 리안드로가 허리춤에 달린 검집을 붙잡았다. 슬픔에 젖어 있던 시선에는 묘한 집착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그 악마에게 레이디가 고통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설령 제게 자격이 없더라도.”
스릉- 시퍼런 검날이 햇빛 아래서 빛났다.
‘결국 요한을 부르게 되겠네.’
흑막과 남주의 싸움이라. 난장판이 될 게 뻔히 보여서 벌써 머리가 아팠다.
“그동안 레이디를 놓쳤으니 이제부터 속죄하겠습니다.”
“듣자 하니까.”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누군가 뒤에서 나를 확 끌어안았다.
“부인이 참아주고 있어서 가만있었더니, 한도 끝도 없이 개소리를 지껄이네.”
짙은 머스크우드 향이 불안하던 나를 안정시켰다. 요한이 내 정수리에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왜 시간 아깝게 저딴 걸 상대하고 있어. 진작 나를 부르지.”
“공작님께서 피곤하실까 봐.”
“역시 나를 걱정했구나. 하지만 저딴 놈이 있을 땐 나를 당장 불렀어야지.”
힐끔 올려다본 요한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제 앞의 상대를 찢어발길 것처럼 살벌했다.
“혹시 부인이 딴 놈한테 마음이 있는 걸까, 저놈을 찢어 죽이면 부인의 마음이 아플까 걱정했는데.”
어쩐지 전보다 더 흑마력이 강해진 것 같았다.
‘설마 부작용을 앓고 나면, 힘이 더 강해지는 건가?’
리안드로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었다.
“네놈…….”
“그래도 부인이 저놈에게 마음이 없는 것 같아서 안심했어.”
크고 작은 흰 마법 술식이 선명하게 공간을 수놓았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났다. 흰빛의 술식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요한 블란쳇 공작!”
리안드로는 푸른 기운이 서린 검을 꽉 쥔 채 소리쳤다.
“이 이상 레이디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하는 행동만 보면 저쪽은 정의고, 이쪽은 악이었다. 원작을 보면 맞는 말이긴 했다.
‘정의로운 리안드로, 악한 요한.’
그런데 이 순간, 내 어깨를 감싼 요한의 팔을 나도 모르게 꽉 붙잡았다.
“죽여줄까, 저거.”
그러더니 요한이 곱게 눈웃음쳤다.
“아니. 혀부터 도려내야겠다.”
“저놈은 악마입니다. 레이디. 제발 떨어지십시오! 저놈은 당신의 집에!”
쉬익-! 붉은 마법진들에서 수많은 칼날이 튀어나와 빠른 속도로 리안드로의 입가를 향해 쇄도했다.
“널 노린 저 주제넘은 입을 찢어버릴까?”
그 순간 깨달았다.
‘입을 막으려는 거구나.’
그의 몸짓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요한의 맥박이 빨리 뛰고, 무언가 불안한 눈빛으로 내 상태를 수시로 확인했다. 억세게 끌어안은 손은 애정에 굶주린 짐승처럼 절박하게 붙들고 있었지만 어딘가 수세에 몰려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런. 빗나갔네.”
핏물처럼 붉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차라리 머리째로 찢어버려 주지.”
날아들던 칼날들은 이제 더욱 날카롭게 리안드로의 머리를 가를 듯이 움직였다. 유독 입과 머리에 공격이 집중되어 있었다. 아마 그 이유는, 내가 진실을 알기를 바라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
‘원작은.’
요한은 에스텔이 진실을 알아차리지 않도록 조절했지만, 들켜도 상관없어했다. 하지만 이젠 진심으로 내가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왜?’
마법진이 파괴되고 검날이 번뜩이는 공간 속에서, 나는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요한. 넌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야?’
꼭 미움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레이디 에스텔!”
“듣지 마. 부인.”
뼈대가 굵은 그의 큰 손이 두 귀를 꼭 덮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도록. 하지만 리안드로는 세계관에서 가장 강한 기사였다. 그는 칼날들을 피하고 튕겨내던 검을 내던져 나를 노렸다. 정확히는 내 귀를 가린 요한의 손을 향해. 내가 막 쇄도하는 칼날을 발견한 순간, 요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지에 놓였다. 더 큰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손을 떼어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까. 리안드로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가르듯 울려 퍼졌다.
“저건 레이디의 남편도 무엇도 아닙니다! 저자가 정말 레이디의 남편이라고 생각합니까?”
고결한 기사 리안드로가 무릎을 꿇듯 쓰러졌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도 마법을 튕겨내느라 타격을 받았는지 입가 부근에서 피가 흘렀다.
“저자는 레이디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신전의 인준은 받지도 않았을 겁니다.”
신전의 인준. 그건 꽤 중요했다.
‘황제가 승인한 결혼은 이혼할 수 있지만, 신전의 인준을 받은 결혼은 이혼하기 어려우니까.’
신의 이름을 건 결혼이란 그런 의미였다. 심지어 요한은 리베르탄과 친밀했던 신전을 무척 혐오했다. 그런 그가 신전의 인준을 받았을 리가.
‘큰일 났다. 이제 어쩌지?’
새로운 전략을 고민했다. 요한이 뭐라고 변명하면 순진하게 믿는 척하면 어떨까?
‘왜 요한의 표정이…….’
하지만 요한은 그 상태로 얼어붙어 있었다. 여유롭게 자신의 죄악을 포장하며 넘길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뭘 두려워하는 거야.
“저와 같이 갑시다.”
기사가 손을 내밀었다.
“에스텔.”
기사는 그동안 제대로 입에 담지도 않았던 ‘가짜’의 이름을 담았다. 나도 모르게 요한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
“누가 그래.”
요한이 입꼬리를 올려 대답했다. 태연해 보이지만 무너지기 직전의 탑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멸문에 대해선 할 말 없지만, 에스텔 블란쳇이 내 부인인 건 확실해.”
요한이 서류 하나를 꺼냈다. 내 이름이 적힌 결혼계약서. 원작의 요한은 단번에 웃으며 찢어버렸던 그것. 결혼계약서 아래에는 금빛 인장이 박혀 있었다. 황제의 문장에 신전의 문장까지 찍혀 있었다.
“에스텔, 넌 내 진짜 아내야”
내 귀에 달콤하게 속삭인 요한이 입을 맞추었다.
“내 아내를 넘기라고? 정말 주제넘은 소리야.”
요한이 살기를 담아 리안드로를 노려보았다.
“그딴 소리를 했으니 죽을 각오도 충분히 했겠지? 안 그래도 불구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지.”
이 난장판 속에서 나는 멍하니 결혼계약서를 바라보았다.
‘진짜 부인.’
난 가짜인데. 내 인생은 온통 가짜였는데. 뭔가…… 달라진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