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2022.03.15.
성큼성큼 다가오는 에리히의 표정이 아주 살벌했다.
‘위기다!’
솔직히 베티만 있을 때는 겁나지 않았다. 베티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어도, 내가 비밀로 하고 싶어 하면 억지로 캐내진 않았으니까. 아마 내 부탁대로 이행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에리히는 달라.’
내가 방문을 못 열게 하면 할수록 더 의심스럽다며 문을 열 남자다.
‘요한이라면 에리히한테도 폭주한다는 걸 숨겼을 텐데.’
쓰러진 요한의 모습을 들키게 되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내 앞에 도착한 에리히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이 블란쳇 공작가에서 뭘 꾸미고 있는 겁니까?”
“에리히 블로뉴!”
나를 보며 울먹거리던 베티가 버럭 화냈다. 이렇게 무서운 베티의 표정은 처음 보았다.
“지금 마님께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지금은 저와 마님이 대화하는 중이니 끼어들지 마세요.”
“아니. 내가 네 말만 듣고 비킬 수 없다. 이 저택의 보안과 관련된 문제니까.”
베티의 말을 무시한 에리히가 방문을 열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그를 막으려고 팔을 뻗은 순간이었다.
“왜 피가…….”
에리히가 내 팔을 붙잡았다. 내 손을 본 에리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앗. 이럴 수가.’
분명 막 일어났을 때는 멀쩡했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는 꿈에서 났던 상처가 생겨났다.
‘언제 생겼지?’
워낙 정신이 없어서 생긴 줄도 몰랐다. 손바닥에는 긁힌 자국도 모자라 피가 묻어 있었다.
‘아프지 않아서 몰랐어.’
나는 서둘러 손을 숨겼다.
‘뭐라고 변명한담.’
베티도, 에리히도 불편할 정도로 고요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뚝뚝. 채 닦지 못한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원래도 촉촉했던 베티의 눈동자는 더 슬픔에 잠겼고, 에리히는.
‘반응이 왜 저렇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최근 에리히는 에스텔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주인님께서 그 여자를 진짜 블란쳇 공작 부인으로 만드셨다.’
요한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에스텔과 혼인 신고를 했다. 심지어 황제의 인준에, 신전의 인장까지도 받아왔다. 아무리 블란쳇 공작이라 해도 정식 부인을 함부로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요한은 여러 합리적인 이유를 댔지만, 에리히는 그게 다 변명처럼 느껴졌다. 그때쯤 에스텔과 마주쳤다. 그녀는 높은 나무 위에 떨어질 것처럼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블로뉴 남작님.’
그 가냘픈 팔로 어떻게 그 높은 나무 위까지 올라갔는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 에리히는 에스텔에게 화가 났다. 그 여자가 죽어봐야 좋기만 한 일이었을 텐데.
‘신경 쓰지 마세요.'
에스텔의 대답은 당연했다. 애초부터 안주인 대접도, 아니,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존중도 하지 않고 무시하고 비웃었던 것은 에리히 자신이었다. 상대에게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헤집은 것 역시도.
‘어차피 절 싫어하시잖아요. 알아서 내려갈 테니,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차피 떨어지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예요.’
이미 죽기 위해 많이 노력해 본 사람처럼 체념 섞인 목소리.
‘그러면 제가 죽으면 좋은 일 아닌가요?’
‘제가 실수로 죽게 되면, 즐거워하실 거잖아요.’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에리히는 에스텔이 블로뉴 남작가를 입에 담은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절망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사람처럼 창백하던 에스텔의 안색.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생각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죽고 싶다면, 다른 데 가서 하십시오.’
에스텔 리베르탄. 그녀는 블로뉴 남작가를 쓰다가 버린 가문의 입양아일 뿐인데. 곧 없애버릴 주인님의 복수 도구인데.
‘당신은 가짜에 불과해.’
그런데 왜 당신이 죽는다는 게 무섭지? 에리히는 밀려드는 충동을 부정하며 횡설수설하다 에스텔의 곁에서 도망쳤다.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랑 대화를 하겠다고 생각한 제 잘못입니다.’
애초에 에스텔과 대화를 하는 게 아니었다. 에스텔과 대화해 봐야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대화한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당장 정원에서 벗어났던 에리히는 에스텔이 걱정되어 그 나무를 찾았다.
‘이건 주인님의 복수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다.’
혹시나 못 내려오진 않을지 찾으러 갔지만, 에스텔은 이미 나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방금 전 대화했던 순간이 허상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에리히는 잠시간 나무 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도대체 그 여자는 뭐지?’
에스텔에게 비밀이 있는 건 안다. 에스텔이 갑자기 폭로했던 자수정 사건부터, 고아원에 이르기까지 의문스러운 사건들뿐이었으니까. 솔직히 에리히 자신이 에스텔을 혼란스럽게 느끼는 건 어느 정도 타당했다. 하지만 블란쳇 공작가의 대부분은 이런 일들을 몰랐다. 그런데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에스텔을 받아들이고, 진짜 마님으로 모시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과 같은 생각일 줄 알았던 페트리샤마저도! 저택으로 돌아간 에리히가 베티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발견했다.
‘그 손수건. 그 손수건은 무엇이냐?’
피 묻은 손수건.
‘별거 아니야. 저번에 첩자로 파견되었을 때 모으던 증거물 중 하난데, 지금 처분하려고.’
‘언제 모았던, 무슨 증거물인데.’
‘오빠가 몰라도 되는 일이야.’
에리히는 이상하게 그 손수건의 주인이 에스텔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겁니까?”
마침 에스텔이 베티와 수상하게 뭔가를 꾸미는 것을 발견했다. 솔직히 그는 수상한 현장을 잡았다고 확신했다.
“이 블란쳇 공작가에서 뭘 꾸미고 있는 겁니까?”
그래서 범인을 취조하는 것처럼 에스텔에게 따지고 억지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 여자의 실체를 밝힐 거다.’
옆에서 베티가 말려도 듣지 않았다. 문을 막으려는 에스텔의 행동은 그를 더 확신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목격하게 된 것은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왜 피가…….”
뭔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꼭 쥐고 있던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막 뱉은 것 같은 피였다. 자동으로 그때 베티가 쥐고 있던 손수건이 떠올랐다. 헛소문이라며 듣고 넘겼던 에스텔의 병에 대한 이야기도 생각났다.
‘마님께서 시한부라는 얘기 들으셨어요? 마님께서 리베르탄에서 지내셨다지만 그분은 친딸도 아닌 입양아시잖아요. 전 마님이 안쓰러워요.’
‘직접 보니 정말 친절하고 착한 분이시던데. 엄밀히 말했을 때 마님께 죄가 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래 살지도 못할 분인데…….’
설마 그 소문이, 진짜였단 말인가. 그동안 죽음에 초연했던 태도가 모두 설명되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바닥에 떨어진 피가 보였다. 저 너머의 침대에는 더 많은 피로 물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아픈 걸 참고 있었어.’
에스텔은 시한부라고, 아프다는 핑계로 동정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는 대신 아픈 걸 꾹 참고 태연하게 웃으며 리베르탄의 죄를 감내했다.
‘도대체 왜…….’
그녀는 에리히가 상상하던 악녀가 아니었다.
“전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아플 줄은…….”
베티가변명처럼 읊조리던 에리히를 거칠게 밀었다.
“이제 속이 시원해? 그렇게 마님이 숨기고 싶었던 걸, 억지로 캐내고 나니까 만족하냐고!”
에리히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경이 바닥을 뒹굴고,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하지만 에리히는 안경을 주울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나, 나는…….”
“블로뉴 남작님. 궁금하셨던 다 해결되셨나요?”
곤란한 듯 웃은 에스텔이 손을 숨기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갑자기 못 볼 꼴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이제 그러면 전 쉴게요. 베티. 그러면 부탁할게.”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 요한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다.
‘폭주가 끝났나.’
이번 흑마법 사용은 요한의 계산 밖이었다. 에스텔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마법 무도회장을 꾸미고, 거기서 습격을 당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녀를 지키기 위해 적을 모조리 없앤 것도 그랬다.
‘그런데 에스텔은?’
토끼처럼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과 달리 고집스럽게 그의 곁에 남겠다고 하던 에스텔. 억지로 내보내지도 못하고 바로 덮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부인?”
에스텔은 바로 그의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잠들어 있었다. 손에는 밤새 그를 간호했던 것인지 물수건이 쥐여져 있었다.
‘그녀가 살아 있어.’
그 사실이 무척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의아했다. 폭주의 전조를 느낀 순간부터 요한은 빠르게 통제 가능한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평소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움직였으리라.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무조건 제가 죽는 건 아니잖아요. 공작님만 허락한다면 저는 공작님 곁에 계속 있고 싶어요.’
하지만 에스텔의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늦추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요한은 평소처럼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는 은신처로 이동하지 못했고, 저택은 그의 힘 때문에 파멸했어야 했다.
‘하지만…….’
방부터 저택까지. 정말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멀쩡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때 에스텔이 천천히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분홍색 백금발이 찰랑거리며 향기가 났다. 그를 자극하는 향기였다.
“공작님?”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에스텔이 감격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온 세상에 요한 자신만 있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봐주는 심해처럼 깊은 남색 눈동자. 요한은 에스텔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에스텔은 늘 신기하다는 듯 그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봤지만, 진정으로 보석보다 아름다운 건 저 신비로운 남색 눈동자라고. 어떤 보석으로도 저 오묘한 빛을 다 담아낼 수는 없으리라고. 에스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긴 속눈썹을 가련하게 파르르 떨었다. 이런 수줍거나 연약한 모습을 볼 때면 요한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파괴하고픈 강렬한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 부서지는 모습마저도 아름다울 것 같아서. 아침의 찬란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에스텔은 햇빛에 감싸여 있었다. 그녀가 맑은 햇살처럼 눈부시게 웃었다.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몸은 좀 어때요?”
요한은 한 번도 햇살이 반짝인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의 인생에서 햇살은 그저 햇살일 뿐이었다. 그런데 햇살 가득한 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알 것만 같았다. 그 사이에서 미소 짓고 있는 그녀가 너무 반짝여서, 반짝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새롭게 정의되고 있었다. 불현듯 무방비하게 그녀가 내놓은 손목을 바라보았다.
‘저 자국은…….’
손목에 남겨져 있는 붉은 자국, 다친 듯한 손바닥과 손가락. 목에 있는 상처까지.
‘왜 아무런 일도 안 벌어졌다고 생각했지.’
어째서 바로 떠올리지 못한 걸까. 흑마법의 부작용을, 그 폭주를 아무런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일 아무런 피해도 없어 보였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감당했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제가 견뎌볼 테니까요.’
물론 이것만으로 폭주가 잠잠해진 걸 설명할 수는 없다. 에스텔이 어떻게 부작용을 감당했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아.”
요한은 홀린 듯한 얼굴로 에스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가…….”
마른침을 삼킨 그가 나른한 눈매를 아프게 일그러뜨렸다.
“왜 이렇게 반짝거려 보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망가져 버린 게 분명했다. 저 멍청할 정도로 바보 같은 여자 때문에. *** 흑마법의 부작용이 위험하긴 한가 보다.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아.”
평소의 차갑고 냉혹한 모습은 사라진 채 그가 멍한 눈빛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네가…… 왜 이렇게 반짝거려 보이지?”
나는 어색해서 괜히 볼을 긁적거리며 창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성이 안 돌아온 건가?’ 어쩐지 열이 오랫동안 안 떨어진다 했다. 요한이 일어난 김에 환기를 좀 시켜줘야겠다.
“잠시 창문을 좀 열어드릴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누가 들어올까 봐 창문도 제대로 못 열었는데. 그때 창밖에서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바로 아래에서 한 남자가 나를 애틋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짧게 자른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금욕적인 외모의 정석 미남. 요한이 나른한 흑표범을 떠올리는 남자라면, 이쪽은 고결한 기사라는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바람이 남자의 짧은 은발을 헝클었다. 남자가 무표정하게 나를 계속 주시했다.
‘저 남자는…….’
보는 순간 깨달았다.
‘리안드로 펠시스.’
원작의 남자 주인공, 리안드로가 나를 블란쳇 공작가에서 구하기 위해 도착했다.
“레이디. 구하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