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미래에 네 부인이 될 사람2022.03.11.
어린 요한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요한. 조금만 기다려줘. 금방 올게.”
어쩐지 어린 그를 혼자 버려두고 가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복잡했다. 나는 감옥 바깥으로 빠져나가 간수들이 향했던 곳으로 달려갔다.
‘언제 이 꿈이 끝날지 몰라.’
왠지 시간제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물거리고 있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깨어나고 말 것이라고.
“-다들 내가 하는 거 봤지? 우리 간수들은 이렇게 따로 돈을 챙겨놔야 한다고. 다음에 또 리베르탄에서 찾아올 수 있으니 잘 봐둬. 돈도 챙기고, 혹시 모르니까 받아뒀다는 기록까지도 해둬야 한다. 이래야 뒤탈이 없어.”
유독 시끄러운 방이 있었다.
‘찾았다! 간수장 방!’
방금까지 지나쳤던 간수들의 휴게실보다 훨씬 넓은 데다 잘 꾸민 티가 났다. 중앙에 있는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은 한 남자를 중심으로, 간수들이 술을 마시며 그에게 아부하고 있었다.
“역시 간수장님께서는 다르십니다. 귀족분인데도 저희 간수들을 잘 챙겨주시고, 이리 귀한 조언까지도 해주지 않으십니까? 간수장님 아니었으면 저희가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험. 내가 비록 페뉼라 남작가에서 태어났어도 황실 인사가 된 사람 아닌가. 다른 귀족들과는 확실히 다르지.”
꽤 오랫동안 술을 마셨는지 방에 들어가기만 했는데도 술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근무시간에 이렇게 나태하게 놀아줘서 고마워요.’
물론 간수들이 나를 보지는 못하겠지만, 방금 전 어린 요한처럼 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는 있으니 말이다. 나는 간수들이 정신없이 술을 마시는 동안, 간수들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들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차마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열쇠를 다 가져가야 하나?’
열쇠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어떤 열쇠가 요한을 묶어놓은 열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내 눈에 다른 열쇠들과 조금 다른 간수장의 열쇠 뭉치가 보였다.
‘방금 전 간수장이 리베르탄 얘기를 하고 있었지?’
요한은 반역죄를 저지른 가문의 후계자인 만큼 엄격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아무 간수나 그 열쇠를 갖고 있을 리 없었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간수들 사이를 헤치고 간수장 옆에 섰다. 그리고 간수장 옆구리에 있는 열쇠 뭉치를 슬쩍 잡아챘다.
‘성공했다!’
다행히 열쇠 뭉치를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물리력이 생긴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열쇠 뭉치를 들고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어, 방금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습니까?”
내 바로 옆에 있던 간수가 술 취한 듯 딸꾹거리며 물었다.
“누구 이상한 소리 못 들었나? 뭔가 소리가 들렸는데…….”
몸이 바짝 긴장했다. 최대한 조심했어도 소리가 나는 걸 막지는 못했다. 그러자 간수장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나.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게!”
나는 진심으로 간수장에게 감사했다. 비록 리베르탄에게 뇌물 받아서 어린애를 학대하는 데 일조하기는 했지만.
‘아주 썩어빠진 인간이라 정말 고마워.’
간수들은 더 요란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간수장의 열쇠 뭉치를 들고 슬금슬금 나올 수 있었다.
“요한. 내가 왔어.”
어린 요한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시 잠들어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열쇠 뭉치에서 열쇠를 잘그락거리며 요한의 다리 족쇄에 넣었다. 운 좋게도 한 번에 맞는 열쇠를 찾았다!
“내가 바로 풀어줄게.”
철컹! 공중에 매달려 있던 요한의 팔이 풀려났다. 특별 감옥에는 요한만 있어서 소리가 더 요란하게 느껴졌다.
‘으으. 이 소리를 듣고 간수들이 눈치채면 안 되는데.’
그때 어린 요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꿈인가.”
어린 요한은 편해진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딴 웃기지도 않는 꿈이라니.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하긴. 나라고 해도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면 믿지 못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흑막은 다른 건지 조금 있다가 바로 현실임을 자각했다. 어린 요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꿈이 아니라고?’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요한이 상황을 파악할 동안 그를 가둔 철창문도 풀어주려 했다.
“왜 안 열리지?”
철컹철컹. 열리지 않는 철문이 공허한 소리를 냈다. 열쇠 뭉치에 있는 열쇠를 모두 집어넣어 봤지만 감방의 자물쇠는 열리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서 가져올까.’
하지만 나오기 전 간수들의 열쇠를 살핀 결과 요한의 감방 열쇠만 골라서 나올 방법은 없었다. 당황해서 손이 떨렸다.
“……역시.”
어린 요한은 굳게 잠겨 있는 철문을 보며 이를 아득 깨물었다.
“무슨 이딴 장난질이 있지. 이제 리베르탄에서는 희망 고문이라도 하는 건가.”
그 목소리에는 잠시나마 헛된 꿈을 꿨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도 담겨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눈물이 나올 것처럼 울컥했다.
“아니야. 열 수 있어. 내가 열 거야.”
“지금 무슨 소리가…….”
요한이 내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나는 감방 밖으로 나가 자물쇠를 부술 돌을 주워오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깡! 돌을 들어 자물쇠를 내려쳤다. 괜히 특별 감옥 자물쇠가 아닌지 무척 단단했다. 내려칠 때마다 충격파로 인해 손과 팔이 아려왔다. 돌을 쥔 손이 까지고, 실수로 돌을 놓쳐 상처가 나도 쉬지 않고 자물쇠를 내려쳤다. 고작 이런 돌로는 안 될지 몰라. 하지만 그래도.
“제발…….”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돌을 내려쳤다. 그 순간. 카앙-! 내려치는 팔이 부러질 것 같다고 느낀 찰나. 자물쇠의 이음새가 툭 떨어졌다. 끼이익- 굳센 철문이 열렸다. 나는 풀썩 주저앉아 기쁨의 미소를 흘렸다. 이상하게도 어린 요한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왜인지 모르게 그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이게 무슨…… 대체 넌?”
너무 많이 움직인 탓인지 머리가 깨질 듯이 어지러웠다.
‘왜 이렇게 힘들지?’
손을 보자 돌을 내려치느라 상처가 난 손과 팔이 보였다. 세게 쥔 손바닥에서 피가 났다. 내 손발이 점점 투명해지기도 했다.
‘꿈이 끝나가는 거구나.’
원작에서는 요한이 죽음을 위장하고 도망갔다. 그러니 내가 이 꿈에서 이렇게 행동해 봐야 내 만족일 뿐이다. 그래도 밀려오는 뿌듯함은 어쩔 수 없었다. 어린 요한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성큼성큼 내게 걸어왔다.
“넌 뭐야? 대체 갑자기…….”
“다행이다.”
풀려나도 못 움직이지 않을까 했는데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다.
“이제 도망칠 수 있지?”
“…….”
“이거 가지고 큰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
“지금 상황이 아닌 것 같으면 숨겨두고 가지고 있다가, 탈출하는 데 사용해.”
자꾸 입이 말라 말이 멈추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린 요한의 손에 열쇠 뭉치를 쥐여주었다.
“내가 잘못한 거 아니지? 철창문을 괜히 부수었나. 당장 안 도망치면 걸려서 괜히 더 곤란해졌나…….”
어린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린 요한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란 거 아닐까?
“내가 방해가 됐다면 미안해. 도와주려고 한 건데, 잘못 행동한 걸지도 모르겠어.”
쓰러질 것처럼 피로한 와중에도 말갛게 웃었다.
“참, 이거 희망 고문 같은 거 아니야. 꿋꿋이 버텨온 너한테 온 기회 같은 거야. 그러니까 최대한 이용해.”
“…….”
“……여기서 도망치고 나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성장해서 널 괴롭힌 사람들한테 복수도 할 수 있어.”
“……왜.”
어린 요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왜 나를 도와주려 하는 거지?”
그러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한 걸까.
‘생각해 보면 폭주하는 요한의 옆에 남은 것도 그랬지.’
딱히 생존에 도움 되지 않을 행동을 해버린 이유.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꿈일지라도 나한테 복수하지 말아달라 말해봐야 하는데.
‘입에서 나오지 않아.’
복수는 요한을 숨 쉬게 한 원동력 그 자체였다.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을 텐데.’
차마 그걸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수 없었다.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너에 대해서 좀 알게 돼서.”
“…….”
“그래서 무시하고 내버려 둘 수 없었어.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어린 요한이 손을 뻗어 상처 난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제 내 손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해진 상태였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는 이를 꽉 깨물며 ‘알았어’ 하고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직 어린데도 이렇게 안겨 있으니 묘하게 어른인 그에게 안겨 있던 느낌이 떠올랐다. 어린 요한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네가 누군지 말해줘.”
“나는…….”
나를 안고 있는 온기가 점점 희미해졌다. 요한의 꿈이 끝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린 요한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미래에 요한 네 부인이 될 사람이야.”
*** 깜빡, 깜빡.
‘답답해.’
답답한 느낌이 든다 했더니 요한이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꿈에서도 이랬는데.’
현실에서도 이러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꿈은 꿈이었는지 거기서 입었던 상처는 사라져 있었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나 봐.’
그래도 뭔가를 해냈다는 기쁨 때문인지 마음이 공허하지는 않았다. 나는 요한의 너른 등을 쓸어주며 상태를 살폈다. 놀랍게도 요한의 몸에 있던 검은 자국들이 사라져 있었다.
‘폭주는 가라앉은 것 같은데.’
하지만 요한의 몸은 심각할 정도로 뜨거웠다. 폭주가 가라앉지 않은 걸까.
‘너무 열이 나는데. 식혀주는 게 좋겠어.’
잠깐 일어나려고 하자, 나를 붙잡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그의 목울대에서 흘러나왔다. 바짝 몸이 긴장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내 예상과 전혀 다른 소리였다.
“가면 안 돼…….”
어쩌면 그가 홀로 폭주를 감내한 것은 이래서일지도 모른다.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으니까.’
나는 담요를 수십 장 끌어안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러자 으르렁거림이 점차 멎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빠져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식은땀이 흥건한 요한의 이마를 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마님. 괜찮으세요?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요.”
밖에서 베티의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면, 베티가 요한의 아픈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요한에게 숨겨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요한의 품에서 빠져나와 문을 빼꼼 열었다. 나를 본 베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마, 마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아프신 거 맞죠? 아무래도 당장 의사를…….”
“아니. 난 괜찮아. 하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어떤 건가요?”
“아무도 몰래 차가운 물수건과 얼음주머니, 그리고 죽을 좀 가져와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널 부를 때까지 안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줘.”
“네?”
내 말을 들은 베티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이상한 부탁이긴 했다. 나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잠깐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그래.”
“…….”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무 핑계나 대도 좋아. 성격이 예민해서 들어가면 큰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해도 되고.”
눈시울을 붉히던 베티가 결국 울기 시작했다.
“마, 마님…… 왜 마님은 그렇게 혼자서 모든 것을.”
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때 불쑥 귀에 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겁니까?”
에리히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