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네게서 맛있는 냄새가 나 (28/182)

28화 네게서 맛있는 냄새가 나2022.03.08.

요한이 내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어 당겼다. 나도 모르게 그의 아래에 자리하게 되었다. 올려다본 그림자 진 얼굴은 평소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평소의 그가 신사였다면, 지금 그는 마치 짐승 같았다. 그래서인지 포식자를 앞에 둔 사냥감이 된 것 같았다.

16551810207839.jpg‘무서워.’

초점 잃은 붉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광기만이 가득했다. 요한이 갑자기 내 목덜미를 바라보더니 내 목을 세게 깨물었다.

16551810207844.jpg“네게서 맛있는 냄새가 나.”

아픔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 번졌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달려드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16551810207839.jpg‘이게 흑마법의 폭주구나.’

거친 움직임 외에도 심상치 않은 흑마력의 파동이 나를 공격할 듯 위협했다.

16551810207839.jpg“……아파.”

불쑥 튀어나온 말에 요한이 잠시 멈칫했다. 그때 본의 아니게 검게 물든 그의 손을 마주 잡게 되었다.

16551810207844.jpg“크윽-!”

요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무래도 흑마력의 부작용으로 검게 변한 부분에 닿아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맞잡은 내 손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손가락 사이사이를 옭아매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16551810207839.jpg‘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걸까?’

흑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답답했다. 정말 요한의 말이 맞았다. 내가 남아봐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이대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16551810207839.jpg‘아니야. 그래도 내가 남겠다고 했잖아.’

그러기로 한 만큼 여기서 절망할 수는 없다. 급하게 나무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는 속으로도 말을 걸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16551810207839.jpg-나무님들! 긴급이에요! 폭주에 대해서 아시는 거 있나요?

원래 요한과 있을 때는 눈치챌까 봐 말을 걸지 않았지만 지금은 가릴 때가 아니었다.

16551810207839.jpg‘대답이 돌아오지 않잖아.’

원래 나무들은 언제나 내가 말을 걸면 바로 대답해 주었다. 마지막 요정인 나를 돕기 위해서였다.

16551810207839.jpg‘이건 내 말이 안 닿는 거야.’

나를 붙잡고 있는 요한의 흑마력이 더 거세어졌다. 그때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던 요한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16551810207844.jpg“지금 누구에게 말하는 거지?”

16551810207839.jpg“네, 네?”

16551810207844.jpg“지금 이상한 힘을 썼잖아. 아니, 넌 대체 누구…….”

붉은 눈동자가 흑마력에 뒤덮였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16551810207839.jpg‘이성을 잃어도 대화는 되는 건가?’

하지만 그런 말은 없었는데.

16551810207839.jpg‘폭주 때의 기억이 없었던 걸 수도 있겠구나.’

그때 나무들이 해주었던 조언이 떠올랐다.

16551810223473.jpg-이상한 행동 같아도 가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 보거라. 너는 요정이니까 본능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할 때가 있단다.

16551810207839.jpg-그게 무슨 말이에요?’

16551810223473.jpg-네 안의 묘한 충동이 생기는 거 말이다. 분명 그런 순간이 올 거다.

갑자기 나무의 조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요한의 얼굴이 위협적으로 다가온 찰나, 나는 급히 붙잡힌 손 하나를 풀어 그의 뺨에 대었다. 평소와 달리 친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더 친근하게 반말을 사용했다.

16551810207839.jpg“난 당신 부인이야. 당신이 아주 사랑하는 부인.”

16551810207844.jpg“……뭐?”

그의 목소리는 고통에 잠겨 갈라져 있었다.

16551810207844.jpg“그런 말도 안 되는…….”

16551810207839.jpg“요한.”

불신이 가득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슬픈 듯 목소리를 낮췄다.

16551810207839.jpg“기억 안 나?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폭주할 때도 당신 곁에 남아달라고 했잖아…….”

16551810207844.jpg“내가?”

16551810207839.jpg“역시 폭주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요한이 짙은 눈썹을 모았다. 하지만 제 뺨에 올려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괜찮은 듯 미소 지었다.

16551810207839.jpg“하지만 괜찮아. 내가 요한 당신을 사랑하니까.”

16551810207844.jpg“……나를?”

16551810207839.jpg“응. 그렇지 않으면 왜 이렇게 있겠어.”

그가 폭주 상태이기에 할 수 있는 거짓말.

16551810207844.jpg“확실히 고통이 덜하기는 한데.”

16551810207839.jpg“그래.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서 그렇대. 서로 사랑하는 사이면 폭주를 막아줄 수도 있대.”

솔직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6551810207839.jpg‘하지만 요한의 상태가 나아지고 있어.’

방금 전까지 폭발할 것처럼 위험하던 흑마력도 조금 잠잠해진 것 같았다. 대화가 통할 정도로 상태도 멀쩡해졌고.

16551810207839.jpg‘이대로 있다 보면 폭주가 끝나고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멍하니 내 얼굴을 보고 있던 요한이 다시 나를 확 끌어당겨 제 품에 가뒀다.

16551810207844.jpg“그래서 그런가.”

16551810207839.jpg“응?”

16551810207844.jpg“너를 보고 있으니 계속 심장이 뛰어.”

그건 마력이 폭주해서인 것 같은데.

16551810207844.jpg“계속 갈증이 나. 너 때문에 갈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

내 목덜미에 쉬지 않고 잘게 키스하던 요한이 희미한 웃음소리를 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스킨십에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16551810207839.jpg‘이건 이거대로 위험한데.’

평소의 능수능란한 요한도 위험했지만,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하는 요한도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가 붉게 달아오른 눈가로 나를 바라보았다.

16551810207844.jpg“왜 너와 붙어 있을수록 더 참을 수가 없지?”

16551810207839.jpg“그건 또 무슨…….”

16551810207844.jpg“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며? 그러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탐욕스럽게 내 허리 근처를 쓸어내리던 그가 요사스럽게 웃었다.

16551810207844.jpg“널 잡아먹어야겠어.”

요한을 말릴 새도 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무언가가 들어온 것 같다고 느낀 순간, 눈앞이 갑자기 하얗게 물들었다.

16551810268895.jpg

  ***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깜빡였다.

16551810207839.jpg‘요한과 입을 맞췄던 것 같은데…….’

갑자기 주변이 하얗게 번지며 이상한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16551810207839.jpg‘도대체 무슨 일이지? 폭주 상태에서는 이런 일도 벌어지나?’

으스스하고 찬 바람이 온몸을 할퀴듯 스쳐 지나갔다. 나는 소름이 돋는 팔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감옥 안인 것 같았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보러 갔을 때 본 감옥과 구조가 유사했다. 걸음을 옮겨 주변을 둘러보는데 반대편에서 간수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16551810207839.jpg‘이걸 어쩌면 좋지?’

숨을 곳이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간수들은 정면에서 나를 보고도 나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16551810268913.jpg“이햐. 그놈 아직도 멀쩡히 버티고 있네? 오늘도 기절할 때까지 빌지도 않고 자존심 세우고 있었다면서. 독하기는 진짜 독해.”

그 얘기를 듣자마자 이상하게 심장이 크게 뛰었다.

16551810268913.jpg“그놈도 독하고 리베르탄도 독하고. 어쩜 그런 놈들끼리 있는지 모르겠어. 그 어린애 앞에서 가족들을 고문한 것도 모자라 불에 태워 죽이고. 그래도 후계자는 멀쩡히 살려둬야 한다니까 밤에는 티 안 나게 고문하고, 낮에는 탄광 노예로 굴리잖아.”

16551810268913.jpg“지금까지는 버티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버티려나.”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간수들은 자기들끼리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16551810268913.jpg“솔직히 노예 출신이었어도 이 상황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식사가 좋은 것도 아니잖아.”

16551810268913.jpg“난 한 달도 못 가서 죽을 거라고 본다. 리베르탄 공작가가 보통 지독해야지. 독기로 버틴다지만, 그게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야?”

아무래도 그들은 요한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6551810207839.jpg‘요한이 리베르탄에게 고문당하고 있을 때인가?’

특히 간수들이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보통 상황은 아니었다.

16551810207839.jpg‘혹시 여기가 요한의 과거 꿈 같은 건가?’

일단 나는 간수들이 왔던 방향으로 쭉 가보았다. 그러자 쇠사슬에 꽁꽁 묶인 남자애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 기절한 듯 벽에 기대어 있는 남자애. 어린 요한이다.

16551810207839.jpg‘내가 요한의 과거 꿈속으로 들어온 건가 봐.’

갖은 고문에 험한 취급을 받았어도, 빼어난 외모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6551810207839.jpg‘하지만…….’

보는 순간 마음이 크게 아플 정도로 어린 요한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두 팔은 벽에 고정되어 묶여 있고, 발에는 노예처럼 사슬을 차고 있다. 도망치는 것을 막으려는지 거대한 추도 달려 있었다.

16551810207839.jpg‘어떻게 이래.’

내가 반역죄나 법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럴지는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에게 어떻게 이런 짓을.

16551810207839.jpg‘공작가의 후계라서 몸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고 했잖아.’

맨발에 상처들이 보였다. 잔뜩 해진 옷 사이로도 자잘한 상처가 보였다.

16551810207839.jpg‘설마 사지를 멀쩡히 살려두기만 하면 됐다는 건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요한의 과거는 내 생각보다 훨씬 참혹했다. 원작에서 본 것만으로는 이 아픔을 다 담을 수도 없었다. 잠시간 충격에 빠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16551810207839.jpg‘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야말로 요한이 여기서 살아남아 버틴 것 자체가 대단했다.

16551810207839.jpg‘이러면 더 원망하기도 힘들잖아.’

어린애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리베르탄에서 내가 겪었던 학대도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요한은 나보다 더 힘들었을 거다.

16551810207839.jpg“미안해.”

당장 어린애가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16551810207839.jpg‘아무래도 이건 요한의 과거 꿈이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없겠지.’

나는 속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기절한 어린 요한에게 다가갔다. 감옥의 철창이 있었지만, 꿈이라서인지 통과할 수 있었다. 요한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의 상처를 쭉 살피다 잔뜩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주었다.

16551810207839.jpg“많이 아팠겠다.”

비록 내 손은 통과되어 그의 앞머리를 쓸어줄 수도 없었다.

16551810207839.jpg“지금 너무 많이 힘들지?”

나는 기절한 그의 앞에 대고 들리지도 않을 이야기를 했다. 그때 갑자기 어린 요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16551810268913.jpg“으윽…….”

고통이 몰려오는지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였다. 소매를 당겨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려고 노력했다.

16551810268913.jpg“……뭐야…….”

어린 요한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1810268913.jpg“아무도 없는데…….”

꿈이라서 내 목소리가 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직감적으로 뭘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무의미한 행동이라도 상관없다. 하고 싶으니까.

16551810207839.jpg“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겠지만, 이렇게 얘기해 봤자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할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어린 요한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16551810207839.jpg“지금 너무 힘들지? 버티기 힘들고,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을 거야.”

이상하지만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16551810207839.jpg“하지만 그래도, 힘을 내. 너는 할 수 있어. 지금을 견디면, 반드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어. 지금 대단해 보이는 리베르탄 공작가도 무너뜨리고 네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을 거야.”

물론 그로 인해 내가 죽게 되지만. 지금 내 말은 우습게도 진심이었다.

16551810207839.jpg“그리고 이 감옥에서 나가면, 너를 도와줄 사람이 있어. 너를 아껴주고 네 편을 들어주고, 네게 충성해 줄 사람도 있어. 그러니 힘들겠지만 참고 버텨줘.”

그러자 여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던 요한의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그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16551810207839.jpg“울면 안 돼, 요한. 왜 갑자기 눈물이 나오는 거야.”

16551810207839.jpg“아…… 역시 내 목소리는 안 들리는구나.”

물리력도 통하지 않는 마당에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나는 실망을 감추며 두 손으로 다정하게 그의 야윈 뺨을 감쌌다.

16551810207839.jpg“너에게 내 온기가 닿으면 참 좋을 텐데.”

리베르탄에선 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 혼자라는 생각에 버틸 구석이 없어서였다.

16551810207839.jpg“물론 요한 너는 대단하고 근사한 사람이라 내 온기 같은 건 필요 없겠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그의 뺨을 쓸어주던 나는 천천히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이전에 요한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내 이마에 입 맞춰주었던 것처럼. 그러자 요한이 몸을 움찔하며 물었다.

16551810268913.jpg“거기 누가 있는 거야? 왜 이마에 온기가…….”

어린 요한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놀란 얼굴로 어린 요한을 꼭 끌어안았다.

16551810207839.jpg“혹시 내 목소리가 들리니? 아니면 내 온기가 너에게 닿고 있니?”

어쩌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요한을 끌어안고 있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1810324684.jpg

16551810324688.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