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나한테 불가능한 건 없어2022.03.01.
다행히 베티가 챙겨준 손수건이 있었다. 아마 볼썽사납게 옷에 피를 묻히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에리히의 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날 싫어하는 사람한테, 싫어할 이유를 더 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내 상황을 모르는 에리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앞에서 누군가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
“그게 증오스러운 당신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에리히의 눈빛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니 죽고 싶다면, 다른 데 가서 하십시오.”
나는 목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리히는 언제 갈까.’
제발 그냥 가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에리히는 내 침묵을 곡해한 모양이다.
“이제 말하기도 싫다는 겁니까? 그런데 왜 안색이…….”
에리히의 마지막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내 안색?’
거울이 없어서 내 얼굴이 어떤지 모르겠네. 에리히는 나를 걱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황한 눈으로 날 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랑 대화하겠다고 생각한 제 잘못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잘됐다. 더 참기 힘들었는데.’
에리히가 사라지자마자 나는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다. 피가 왈칵 쏟아졌다.
‘저번보다 색이 검어졌네.’
내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나보다 더 안타까워했다.
-아이고. 얼마나 지독한지 색이 아주 새카맣네.
-어떤 나쁜 놈이 우리 아가한테 이런 저주를 걸었을까.
“괜찮아요. 아프지는 않아요.”
-그거야 낫는 중이니 그렇지. 너무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
-그래, 이놈 말이 맞다. 지금은 네 요정의 힘이 막아주고 있지만, 저주가 더 강해지면 네 몸이 완전히 무너지게 될 수도 있어.
“말씀대로 조심할게요.”
대체 어떤 사람이 아픈 걸 좋아할까. 나도 아픈 건 싫다.
“언제쯤 다 나을 수 있을까요?”
-네 안에 있는 저주가 너무 깊어서, 우리도 모르겠구나.
나는 피로 물든 손수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내가 뭐 그렇게 미워서 저주까지 걸었을까.’
솔직히 이 정도로 날 미워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더 편했다. 그들이 몰락해도 동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일단 요정의 힘을 더 키울 방법부터 생각하자.’
***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베티가 나를 반겼다.
“마님. 주인님께서 마님을 찾으셨어요.”
“공작님이?”
“아무래도 마님을 위해서 준비하신 게 있는 모양이에요.”
베티는 다른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쥐고 있던 손수건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 베티. 이건…….”
“마님.”
베티의 목소리에 묘한 슬픔이 어렸다.
‘뭐라고 변명하지?’
이렇게 눈앞에 물증이 있는데 아프지 않다고 할 수도 없었다. 잘못하다간 자유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면 정말 곤란한데.’
단순히 내 운신의 자유를 떠나, 그대로 저택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될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지금도 저택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인데.
‘안 되겠다.’
나는 입가에 검지를 대고 베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베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내 손에서 손수건을 가져간 베티가 울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고마워.”
“그리고 주인님께서는 이쪽 방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베티가 안내해 준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는 검은 연미복 차림의 요한이 팔짱을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생긴 사람은 화려한 보석과 장식을 해도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날렵하고 퇴폐한 얼굴에 고귀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왔어?”
그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른하게 고갯짓했다. 황금색 견장이 수놓아진 제복은 근육으로 꽉 잡힌 그의 몸을 강조해 주었다. 그래서 안 그래도 넓었던 어깨와 큰 덩치가 더 강조되어 보였다. 특히 벌어진 셔츠 사이로 남자다운 목울대와 거친 목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확실히 해로운 남자야.’
마치 화려한 연회에 갈 것 같은 차림새였다.
“공작님. 어디 연회라도 가는 건가요?”
“응.”
요한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 가고 싶어 했던 곳.”
“제가 가고 싶어 했던 장소요……?”
내가 딱히 요한한테 어디에 가고 싶다는 소리를 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부인이 하고 싶어 했던 걸 이뤄주러 간다고 하면 되려나?”
수수께끼 같은 말에 더 혼란스러웠다. 평소 언행을 떠올려 봤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자 요한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가실까요, 내 공주님?”
그의 큰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당장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 줄 것만 같은 큰 손. 나는 요한의 손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공주님은 또 뭔가요?”
“내 부인은 내가 모시고 살아야 하는 공주님이잖아. 불편해?”
“아니요. 싫은 건 아니에요.”
솔직히 공주님이라고 부르니 좀 이상했다. 나는 평범한 흰 원피스 차림이다. 굳이 따지면 공주님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 근사하기 때문일까.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내가 별 볼 일 없어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공주님이 된 것만 같았다. 천천히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요한은 자연스럽게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아무것도 없던 방이 거대한 연회장으로 바뀌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있어도 될 정도로 거대한 연회 홀. 천장에는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있었고, 벽에는 화려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보석처럼 조명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때 춤추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잖아.”
요한이 귓가에 대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부인과 단둘이 춤출 방법을 생각해 봤지.”
그 순간, 평범한 내 흰 원피스가 은은한 빛과 함께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변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하늘색 드레스, 보석 리본과 꽃으로 장식해 반묶인 머리, 갑작스레 생겨난 장갑까지. 모든 게 신기했다. 가장 믿기지 않는 건 이 모든 게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거다.
“마법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나요?”
“보통은 안 되지.”
요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나한테 불가능한 건 없어.”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게 느껴지는 공간. 그는 이 마법 같은 곳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렇게 같이 손을 잡는 것이 황송하게 느껴질 정도로. 요한이 나와 코끝을 스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둘의 이마가 부딪쳤다. 어느샌가 근처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과 마주쳤다. 요한이 내 두 손을 꼭 잡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공주님, 한 곡 추실까요?”
“네. 좋아요.”
***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연회장의 화려한 빛들이 부서질 듯이 반짝거렸다.
‘꿈을 꾸는 것 같아.’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묘하게 요한의 몸과 마찰할 듯이 가까워졌다. 후덥지근한 열기,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들뜬 열기를 더 실감 나게 해주었다. 요한이 내 몸에 밀착해서 나를 이끌었다. 그의 단단한 근육이 제복 위로도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허리에 두른 손이 자꾸 이 상황을 예민하게 느끼게 했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연회의 음악.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요한의 체향.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심장 소리가 계속 느껴졌다. 눈앞의 요한은 너무 근사해서, 아름다운 환상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내 것이 아니지.’
결혼한 것처럼 굴지만, 실제로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사이.
‘이런 생각도 하면 안 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하기 위해서 냉정한 사실을 되새겼다. 내가 리베르탄에 입양된 그 순간부터 요한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은 결국, 언젠가 깨버릴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새어 나갔다.
“……이거, 꿈일까요.”
“꿈 아니야.”
요한이 꿀이 떨어지는 듯한 다정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게요. 현실 맞네요.”
그 눈빛에 이상하게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공작님은 이런 데서 춤 많이 춰봤어요?”
아마 요한이 아니었다면, 춤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나는 따라가지 못했을 거다. 그러자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거의 없어.”
“나를 자연스럽게 이끌어서 경험이 많은 줄 알았어요.”
“공작이 되기 전까진, 이렇게 귀족의 삶을 누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거든.”
요한의 입가에 묘하게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그 순간 요한이 겪어야만 했던 지옥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부모는 화형으로, 누이는 고문으로 잃어버린 어린 소년.
‘새삼 생각해 봐도 대단해.’
리베르탄 공작가는 고작 어린 소년 하나가 도망쳐 봐야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모든 것을 잃은 소년이 뭔가를 할 수 있으리라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요한은 해냈다. 죽음을 위장해서 리베르탄 공작가의 감시를 벗어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했다.
‘물론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
원작에서 요한이 복수를 준비한 과정이 전부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서늘하게 언급한 그 정보들만으로도 치열하고 가혹한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 완벽한 귀족적인 예법도, 복수를 위해 스스로 다듬은 것이겠지.
‘당신의 복수는 이뤄져서는 안 돼.’
그걸 생각하면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요한의 얼굴이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난 당신의 복수가 이뤄졌으면 해.’
그토록 고생했는데, 한 가지를 위해서 달려왔는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건 너무 슬프다. 하지만 그의 복수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내 가슴을 한없이 미어지게 했다. 내가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였다.
‘내가 이상해졌나 봐.’
요한이 이 무도회장 전체에 마법이라도 걸어놓은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물었다.
“힘들어 보이는데. 조금 쉬었다가 할까?”
“고마워요.”
바로 옆으로 움직이자마자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나타났다. 요한은 내가 앉자마자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는 정확히 어떤 곳이에요? 저택에 있는 곳인가요?”
“마법으로 이동했다고 생각하면 쉬워.”
“마법이란 참 대단하네요.”
내가 입은 옷마저 전부 마법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게. 쿵! 쿵! 조화롭게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가 멎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거친 마찰음이 모든 것을 덮었다. 반짝이던 빛들이 흔들렸다. 요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 새끼들이…….”
“이건 무슨…….”
요한이 웃는 낯으로 내게 말했다.
“멍청한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내 마법에 들어오려 한 모양이야.”
“그러면 바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걱정 마. 저딴 것들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왜인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에게서 심산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요정인 너는 남들보다 더 마력에 민감하다.
저번에 나무가 내게 말해줬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니 아가가 느끼는 기분이 진짜일 거다.
내 눈길이 요한의 손을 향했다. 검은 장갑을 낀 요한의 손에서 불길한 기운이 요동쳤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날 믿고 있으면 돼.”
요한이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흑마법이 금지된 이유는 일반 마법에 비해 효과가 큰 대신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부작용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데.’
흑마법의 부작용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신성력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나는 신성력이 없었다. 애초에 신성력과 어떤 관련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무작정 그의 손을 가져가서, 장갑을 벗겼다.
“역시…….”
그의 손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폭주의 징조다.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날카롭게 귀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