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지독하게 집착할 거다2022.02.25.
초야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원작에서는 아예 없던 얘기였는데.’
물론 원작대로 되지 않는 게 내가 바라던 일인 건 맞다. 하지만 요한의 변화가 마냥 나에게 좋은 변화라고 장담할 순 없었다.
‘내가 뭘 실수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겠지?’
등줄기에 바짝 긴장이 섰다. 요한은 그런 나를 보며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걱정하지 마. 부인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입술에 닿았던 그의 손가락이 떨어지고,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게 언제가 될까.”
“…….”
“너무 오래 참긴 힘들 것 같은데.”
*** 최근 에스텔은 잠이 부쩍 많아졌다. 요한은 잠든 에스텔을 내려다보았다. 쌔근쌔근 소리를 내며 얌전히 누워 있는 모습은 영원한 잠에 빠진 공주님 같았다.
‘……피로감을 자주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하얗고 가는 목, 섬세한 쇄골 위로 그가 남긴 흔적이 보였다. 굳이 남길 필요 없었던 흔적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이번 가면무도회에 다녀오고, 그녀는 자각하지 못한 사이 또다시 아예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잠든 에스텔의 이마를 쓰다듬어 준 요한이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다녀올게.”
밖에서는 복귀한 에리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님. 라비안느 고아원에 대한 조사를 마쳤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현재 그 고아원은 비리가 걸려 완전히 폐쇄되었다고 합니다. 관련자들 역시 뿔뿔이 흩어진 바람에 조사하려면 시일이 걸릴 듯합니다. 다만 마음에 짚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폐쇄된 라비안느 고아원 바닥을 담은 그림이었다.
“고아원 바닥에서 오래된 마법진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알아보시겠습니까?”
“전혀 모르겠군.”
마법에도 정통한 요한이 종류조차 알아볼 수 없는 마법진. 고대부터 행해진 마법이란 의미였다.
‘마법이라면…….’
불현듯 연약한 에스텔이 떠올랐다. 평소에도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스러운 부인이 생각나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이유가 달랐다.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 체질.’
에스텔은 기본적으로 마법이 잘 들지 않았다. 요한이 에스텔을 지키기 위해 걸어놓았던 마법들이 대체로 튕기거나 오류를 냈다.
‘안톤 그 자식이 있을 때도.’
원래 정상적으로 마법이 작동했다면, 그놈의 몸은 타버려 재가 됐어야 했다. 하지만 단지 마법의 반작용만 일어났을 뿐이다.
‘마법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
요한은 에스텔의 희고 가는 발목에 루비 발찌를 걸어줬을 때를 떠올렸다. 고통을 자신에게 전이시키는 마법을 루비에 걸어두었다. 아픔에는 내성이 강한 그조차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다가, 마법 자체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에스텔의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지금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고, 수면 시간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위험과 고통에 익숙한 듯 보였던 것도 전부 몸이 아파서였을까. 보고서를 살피던 요한의 날카로운 눈이 에리히를 향했다.
“고대 마법과 관련되어 흔적을 찾아보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주인님의 명령대로 계속 이 고아원에 대해서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초야. 제국에서 부부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꼭 치러야 하는 일.
‘내가 계속 피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계속 피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아마 내 생일 근처가 마지막일 거야.’
원작에선, 내 생일을 기점으로 나를 향한 요한의 복수가 본격화되었다.
‘그 전에 도망갈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몰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무가 물었다.
-정말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구나.
“맞아요. 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혼자 있고 싶다는 이유로 숲으로 도망쳐 나왔다. 베티는 항상 내 곁에 붙어 있고 싶어 했지만, 슬그머니 일감을 추가하고 숲에 숨으면 바로 찾지 못했다.
‘물론 이 이상 가면 요한이 눈치채겠지만.’
그래도 숲에 있을 때 조금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무들은 처음으로 손녀를 만난 할아버지들처럼 나를 애지중지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특히 어떤 상황이든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아서 좋았다. 나에게 아무런 편견도 없이 그저 아껴주기만 하는 상대는 나무들이 처음이기도 했고.
-아직도 도망갈 생각이고?
“확실히 도망갈 방법이 있다면요. 지금 당장 요정의 힘을 쓸 수도 없다면서요.”
나무들이 말하길, 내 안에 있는 요정의 힘은 굉장히 강하다고 한다. 언제든 원하는 장소로 사라질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이렇게 저주에 걸린 상황에선 요정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어쩌다 그런 지독한 놈에게 엮여서는……
나무들이 혀를 차며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데.’
요한은 외모만 잘난 것은 아니었다.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공작가의 핏줄, 오랜 시간 귀족으로 지내지 못했으면서 귀족보다 우아한 움직임과 자세, 유려한 말솜씨까지. 솔직히 내가 아무리 예쁘다고 한들 어쨌거나 출신은 고아였다. 사람들은 다 내가 굉장히 운 좋은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나무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지 못마땅한 듯 요한의 흉을 보았다.
-안 그래도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물도 아니고 부인이라는 사람한테 그런 흔적을 남기다니.
-동물들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게다.
어떻게 봤는진 모르겠지만, 나무들은 유독 요한의 집착 어린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여튼 흑마법사들이란. 언제나 지독하지.
-그래. 도망갈 때 잘 도망쳐야 해.
-어설프게 했다가는 오히려 더 크게 혼이 날 수도 있어.
흑마법사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흑마법사들을 많이 봐오셨어요?”
-당연하지. 그놈들이 꼭꼭 숨어 있기야 하다만, 어디 우리들 눈까지 피할 수 있겠니.
-모습이야 저마다 다르다지만, 한 가지 특징이 있기는 했다.
“무슨 특징인데요?”
쉽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나무들이 잠시간 침묵했다. 원체 수다스러운 자들이라 이 애매한 침묵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뭔데요? 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그게 말이다…….
말끝을 흐리던 한 나무가 단호하게 말했다.
-집착이다.
“네?”
-흑마법사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무언가에 집착해야 한단다. 제 목숨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집착이 필요하거든.
생각해 보면 요한도 복수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가야. 너도 조심해야 한다. 지금도 그놈은 심상치가 않아.
-그래. 네 남편은 말이다.
나무들이 입을 모아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봐온 흑마법사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무서운 자다.
“그렇겠죠.”
흑막의 대단함에 대해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새삼 특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가.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보통 실력만큼 집착이 지독하거든. 어쩌면, 네가 그 모든 집착을 다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거다.
-원래 그런 놈들이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너무 커서 한 번 찍어놓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죽어라 달려들어. 너한테 지독하게 집착할 거다.
괜히 오랜 시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나무들의 말은 반 정도 정확했다.
‘결국 원작에서도 복수를 완성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맞아요.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내 선선한 대답에 나무들이 동요했다.
-흠? 그러면 도망치려는 이유는 무엇이니? 괜히 그자를 더 자극할 거 같다만.
-그래.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으려나?
“저도 그러고 싶지만…….”
요한이 내게 집착하는 이유는 내가 그의 복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마 곧 저를 없애거나 버릴 거예요. 그걸 피하기 위해서 도망가려고 하는 거고요.”
-오. 저런…….
-불쌍한 우리 아가…….
-마지막 요정이 어쩌다 그런 미친놈한테 걸려서는…….
나무들이 나뭇가지를 내려 나를 쓰다듬었다. 요한도 그렇고 다른 이들은 나만 보면 자꾸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 머리카락이 만지고 싶게 생겨서 그런가?’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분홍기가 도는 백금발은, 예스텔라와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받고는 했다. 하지만 여기서 만난 베티도 그렇고, 요한도, 나무들도 모두 이런 내 모습을 좋아해 주었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리베르탄에서 들었던 비난을 의식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런 말을 들을수록 기분이 좀 좋아졌다.
-혹시 기분 전환이 필요하니?
나무 하나가 굵은 나뭇가지를 내려주었다.
-나무 위에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르단다. 한번 올라와 보지 않으련?
“좋아요.”
-안전하게 올려줄 테니 앉아보렴.
나무 위에 걸터앉자마자 나무는 쭉 가지를 펴 위로 올려주었다.
‘확실히 경치가 다르네.’
아래보다 더 상쾌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고마워요.”
나는 두 다리를 달랑거리며 나무에 기댔다. 장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묘하게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 제가 요정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겠죠?”
-아! 안 그래도 내가 그걸 다른 나무들에게 물어봤단다. 혹시 더 잘 아는 나무가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정말요?”
-그래. 음. 일단 요정과 관련된 유물이 요정의 힘을 키워줄 수 있다고 했던 거 같다. 너도 요정에 대해서 알아보렴.
‘유물이라.’
요정에 대해 대놓고 조사했다가는 덜미를 잡힐 우려가 있다.
‘하지만 유물 같은 걸 구하려면 공작 부인의 권력을 이용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밖에 몰래 나가 정보 길드 같은 곳에 의뢰를 해야 했다.
‘공작 부인의 일을 하면서 몰래 알아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려나.’
여러 가지 방법을 떠올리며 스치듯 흐르는 바람을 즐겼다. 그러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아가야. 아가!
-사람이 오고 있다. 아무래도 일어나야 할 거 같은데…….
어지러운 소리에 눈을 비비면서 떴다.
“-당신!”
벌써 나무 아래에 사람이 도착해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에리히였다. 에리히는 청회색 눈을 크게 뜬 채 경악하며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높은 곳은 위험하게 어떻게 올라간 겁니까?”
지금 내가 올라온 나무는 숲의 나무 중에서 가장 높았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올라오기는 다소 어려운 높이긴 했다.
‘그런데 에리히를 만날 때마다 이런 오해에 시달리는 것 같네.’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에리히를 바라보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블로뉴 남작님.”
“지금이 인사할 때입니까?”
에리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떻게 올라갔는진 모르겠지만, 위험합니다. 빨리 내려오십시오.”
“아…… 조금 이따가 내려가면 안 될까요?”
“지금 제가 장난하는 것 같습니까?”
아득한 높이를 보는 에리히의 회청색 눈에 초조함이 가득 담겼다.
‘내가 사고라도 나면 상황이 복잡해져서 그렇겠지.’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에리히가 있을 때는 나무들에게 부탁해서 내려가기 어렵다.
‘나무들이 가지를 움직여서 알아서 내려준다?’
누가 봐도 너무 이상한 모습이다. 유난히 나에게 적대적인 에리히라면, 무조건 요한에게 보고할 거고. 시원한 바람이 내 백금발을 풍성하게 흔들었다. 나는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에게 차분히 대꾸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말라고요?”
“어차피 절 싫어하시잖아요. 알아서 내려갈 테니,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그 말에 에리히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떨어져서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밑에서 받아줄 사람이 있을 때 내려오는 것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차피 떨어지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는 연약한 나라면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무책임한 소리를 하는 겁니까?”
“블로뉴 남작은 리베르탄 공작가에게 큰 피해를 입으셨죠?”
그 말에 에리히가 움찔 주먹을 떨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누가 말해줬습니까?”
“저한테 말씀하신 것만 봐도 알겠던데요.”
누가 봐도 에리히의 행동은 노골적이었다. 원작에서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진작 눈치챘을 거다. 긴 한숨을 쉰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누구보다 리베르탄 공작가가 싫은 사람입니다.”
“그럼 제가 죽으면 좋은 일 아닌가요?”
에리히는 나를 리베르탄에서 사랑받는 딸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왜 그렇게 저를 걱정하세요?”
원작에서 에리히는 나를 압박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에스텔을 위로한다거나, 구해주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에스텔의 몰락에 기뻐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제가 실수로 죽게 되면, 즐거워하실 거잖아요.”
“저는…….”
그때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망했다.’
어쩌면 저번처럼 다시 피를 토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필, 에리히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