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내 거라는 표시도 했는데2022.02.22.
펑! 퍼엉! 황궁의 하늘 위로 화려한 폭죽이 터졌다. 검은 밤하늘 위로 화려한 색의 불꽃들이 수놓기 시작했다. 따끔한 아픔과 기이한 열감이 쇄골을 시작으로 퍼져 나갔다. 예민해진 감각이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열기, 묵직한 요한의 향과 연회의 소란이 뒤섞였다. 소중하면서도 거칠게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 아픔을 달래려는 듯 달콤한 숨결. 묘한 분위기에 들뜬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요한이 자신이 낸 흔적에 입술을 맞췄다.
“이제 여기 더 남아 있지 못하겠네.”
요한이 얼굴을 치우자, 쇄골 위로 붉은 자국이 선명히 도드라졌다. 내 드레스는 어깨와 쇄골이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이대로 사람들 앞에 나서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아차릴 것이다.
“이렇게 내 거라는 표시도 했는데.”
요한이 엄지로 마음에 든다는 듯 자신이 남긴 흔적을 매만졌다.
“다시 다른 새끼가 꼬이지 않을 거야.”
나도 모르게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 멍하니 요한을 바라보았다.
“……젠장.”
그러자 그는 어쩐지 못 참겠다는 듯 내 콧등에 입을 맞췄다.
“마음만 같아서는, 너를 이 자리에서 먹어치우고 싶어.”
가라앉은 목소리가 미약한 흥분을 담고 으르렁거렸다.
“기분 나쁘게 널 담았던 새끼들의 눈을 죄다 뽑아버리고.”
“…….”
“감히 손대려 한 새끼들의 사지를 죄다 잘라 버리는 거지.”
요한이라면 정말 할 것 같았다.
‘안톤 사건을 생각해 보면…….’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정도도 어쩌면 한참 봐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치만 안톤과 황태자는 한참이나 차이 나는 존재인데.’
블란쳇 공작인 요한이 언젠가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와 척을 지면 손해밖에 볼 게 없었다. 황태자와 있었던 일이 나를 기만하기 위한 거짓말일 리도 없었다. 황태자는 누군가에게 휘둘려 줄 인간이 아니니까.
‘나를 가지고 놀다가 버릴 거면서…….’
고작 가짜 부인인 나를, 진짜 부인처럼 보호해 주고 질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요한이 거친 숨을 고르며 물었다.
“황태자 그 망나니 새끼가 부인한테 뭐라고 했는지 자세히 말해. 방금처럼 별일 아니란 소리는 하지 말고.”
요한은 처음부터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없앴다. 아마 에리히 때 숨겼던 걸 염두에 둔 모양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나에게 자신의 하룻밤 상대가 되라고 했어요.”
요한이 이를 아득 깨물었다. 미소 짓고 있는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또?”
“그러다 마음에 들게 잘하면 첩으로 삼아준다고 했어요.”
요한의 얼굴이 정지된 것처럼 무표정하게 변했다.
“하.”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던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망나니 새끼를 그냥 놔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요한은…… 정말 많이 화가 난 것 같았다. 그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저는 남편이 있다고 거절하려고 했는데…….”
“부인은 믿지. 잘했어.”
요한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눈웃음쳤다.
“하지만 그 새끼의 사지라도 분지르지 못한 게 아쉽네.
어느새 하늘에서 터지던 폭죽이 멎었다. 이윽고 황궁의 연회장에선 황금빛의 요란한 빛들이 더 터져 나왔다. 빛을 등진 요한은 위험할 정도로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은, 광기가 선명히 느껴지는 입꼬리에서는 날 것의 감정이 엿보였다. 나는 잠시 황궁의 화려한 빛 속에서 요한이 얼마나 눈부셨을지, 근사하고 아름다웠을지 생각해 보았다.
“아쉽네요.”
분명 요한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근사했겠지.
“무도회장에서 춤을 춰보고 싶었거든요.”
“……지금이라도 들어갈까?”
“괜찮아요.”
오늘 요한은 평소보다 더 폭주할 것처럼 분노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니어서인지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공작님과 함께 저 밤하늘을 본 걸로 충분해요.”
특히 폭죽이 터지는 밤하늘은 처음 봐서인가. 너무 근사했다.
“아마 제가 당장 죽더라도 오늘 일은 못 잊을 거예요. 아, 그렇다고 파티에 계속 참석하고 싶단 소리는 아니에요. 이제 파티, 그것도 가면무도회는 더 이상 안 와도 돼요.”
황태자 카를로스는 황태자인 주제에 의무는 하지 않고 파티와 주색잡기에만 빠져 있는 놈이었다. 어떤 파티든 그놈이 나타날 위험이 있었다.
‘그럴 바엔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안 가는 게 낫지.’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왜?”
“그거야, 시간 아깝게 한 번 경험한 걸 또 할 이유는 없잖아요.”
게다가 단점까지 알았는데 또 하면 그건 바보다.
“……시간 아까울 이유가 뭐가 있어. 부인과 함께하는 건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나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적당한 말을 찾아냈다.
“그래도 공작님은 바쁘잖아요. 다양한 걸 같이하는 게 공작님한테도 덜 지겨울 거고요.”
“내 생각은 하지 말고, 부인이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해. 부인은 내 생각을 지나치게 해. 남편으로서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요한이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너무 그러면, 부인이 가끔 까먹는 것 같아서 서운해지기도 해.”
“어떤 부분을요?”
괜히 흑막의 심기를 거스른 부분이 있을까 봐 흠칫했다. 그러자 요한은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 남편이 충분히 잘났단 사실.”
*** 황태자 궁. 황태자 카를로스는 정오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젯밤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라 그를 분노케 했다. 그토록 기대해 왔던 에스텔.
‘감히 그런 식으로 나를 무시해?’
황태자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남편을 찾고 있다니.
‘어리석게 얼마나 귀중한 기회였는지도 모르는 모양이고.’
사교계에는 요한이 에스텔을 가지고 놀다가 버리기 위해서 혼인 신고서도 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잔뜩 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황궁에서 확인도 해보았다. 예상대로, 둘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에스텔은 아직 리베르탄 소속이었으니까. 그래서 황태자는 황제를 만나, 공작의 무례를 고발하기로 했다.
“아버지. 제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간밤에-”
“카를로스.”
황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황태자의 말을 끊었다.
“어젯밤 무도회에서 블란쳇 공작을 건드렸느냐?”
카를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블란쳇 공작이 와서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까? 아버지. 실제로는…….”
“공작을 탓할 것 없다. 네가 잘못한 거니까.”
황제는 카를로스의 말을 다 듣지도 않았다.
“몇 달간 근신해라. 자숙하다 보면 블란쳇 공작도 노여움을 풀겠지.”
“아버지!”
잔뜩 성이 난 카르얀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왜 제 얘기는 들어주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애초에 블란쳇 공작이 제게 먼저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는 진짜 블란쳇 공작과 결혼한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블란쳇 공작이 정식으로 신전의 직인과 황실의 허락을 받은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고 갔다. 그 여자는 이제 정식 블란쳇 공작 부인이다.”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식에 카를로스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자가 정식으로 에스텔과 결혼했다는 겁니까?”
“그래! 이제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겠느냐?”
“하, 하지만…….”
에스텔이 정식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되었다면 확실히 카를로스 그의 과실이 맞았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블란쳇 공작가는 그래 봐야 이번에 황실에 은혜를 빌어 겨우 복권된 공작가 아닙니까.”
과거 블란쳇 공작가가 무척 대단한 가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지금은 몰락했다가 되살아난 공작가에 불과했다.
‘블란쳇 공작 개인이 대단한 남자라 해도.’
그래도 황태자인 그와는 비교가 안 됐다. 황태자는 말도 안 되는 처분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령 블란쳇 공작가가 대단하다 하더라도 전 황태자입니다. 황실의 위엄을 생각해서라도-”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그러고도 네가 제국의 황태자라 할 수 있더냐!”
황제가 얼굴을 찌푸리며 황태자의 뺨을 때렸다.
“이제 블란쳇 공작가는…… 우리가 그렇게 무시할 상대가 아니란 뜻이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자신을 때렸다. 충격받은 황태자는 멍한 눈으로 부은 뺨을 감싸며 물었다.
“그래서 황가가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겁니까?”
“네 말은 더 듣고 싶지도 않다. 나가라.”
카를로스는 억지로 알현실을 떠났다. 황제는 그런 황태자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에게 카를로스는 황태자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기는커녕 주색만 밝히는, 마음에 차지 않는 아들이었다.
‘아비 마음도 모르고.’
거기다 블란쳇 공작이 쥐고 있는 황가의 약점이 너무 강력했다. 심지어 블란쳇 공작은 황제인 그를 대신해 황권을 드높여 주기까지 했다.
“왔느냐.”
단정하고 짧은 은색 머리카락, 청명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 금욕적인 이목구비를 지닌 기사가 갑주를 입고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폐하의 충신, 리안드로 펠시스가 폐하를 뵙습니다.”
“……너도 황태자의 추태를 보았느냐?”
“저는 그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아 보지 못했습니다.”
무뚝뚝한 기사 리안드로의 대답에 황제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 리베르탄의 고아가 뭐길래, 이 난리를 치냔 말이다.”
아무리 예쁘다고 한들 에스텔은 평범한 여자애였다. 황제로서는 황태자가 그런 여자 하나에 휘둘려 블란쳇 공작과 척을 졌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언제까지 여자 문제로 자신을 힘들게 할 것인지. 한참 말이 없던 황제가 이내 깨달았다는 듯 리안드로에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 너도 그 고아와 연관이 있구나.”
“……그렇습니다. 한때 약혼했다가 파혼한 사이입니다.”
“어떠한 이유로 파혼하게 되었느냐?”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리안드로의 얼굴이 살짝 무너졌다.
“본래 약혼했던 것은 리베르탄 공작의 친딸이던 예스텔라 리베르탄이었습니다. 집안끼리의 약속이라고는 하나, 상대가 바뀌었기에 파혼하게 된 것뿐이지요. 그 외의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황제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튼 황실의 기사단장인 너를 부른 이유는 조만간 열릴 여름 연회 때문이다. 황태자가 근신하게 되었으니, 기사단의 일정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황제는 리안드로에게 기사단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리안드로의 귀에 황제의 목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에스텔.’
예스텔라가 아니었기에 그가 버렸던 약혼녀. 그때는 리베르탄의 같잖은 수작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단칼에 끊어냈다.
‘솔직히 어리석고 악독한 여자였다.’
죽은 자의 자리를 이용해서 영화를 누리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에스텔이 소문대로의 악녀라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고결한 기사인 그는, 에스텔이 죽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당신이 설령 악녀라 해도…….’
블란쳇 공작의 복수에 휘말려 잔인하게 죽는 건 정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내 책임도 있을 수 있다.’
과거 리안드로가 파혼하지 않았더라면, 에스텔은 이미 리베르탄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테니까.
‘기사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구해야 한다.’
창밖을 바라보는 리안드로의 표정이 수심에 젖었다. *** 가면무도회를 다녀온 다음 날. 요한이 알 수 없는 선물 하나를 가지고 왔다. 팔찌를 줬을 때처럼 고급스러운 상자였다.
“……이게 뭐예요?”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발찌였다. 요한의 눈동자를 닮은 순도 높은 붉은빛의 루비가 장식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선물은 아닌데.’
나는 여전히 내 팔에 걸려 있는 팔찌를 보여주며 말했다.
“팔찌를 받은 지도 얼마 안 됐는데요.”
“너한테 주는 게 좋아서 그래. 정확히는.”
루비보다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나를 보며 야릇하게 휘어졌다.
“너를 나로 다 채우고 싶어서.”
어쩐지 가면무도회에서 요한이 물었던 쇄골 부근이 다시 따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마워요’ 하고 대답했다. 발찌는 내 발목 사이즈에 딱 맞았다. 심지어 무게가 느껴지거나 부담스러운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발찌를 찬 채 요한을 다시 바라보았다. 발목에 꽂힌 그의 시선이 왜 이렇게 의식되는지 모르겠다.
‘고작 발목인데.’
빠르게 드레스 치마를 내려 발목을 가리려는 찰나, 요한이 내 발목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우아한 검지가 루비에 닿은 순간, 가벼운 스파크가 튀었다.
“공작님?”
감전이 된 것인지 요한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요한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가 충격에 빠진 눈으로 나를 망연히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걱정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부인은.”
요한은 ‘이런 고통을’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섬세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아무래도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그사이 빠르게 발목을 숨겼다.
“잘 하고 다닐게요.”
“그런데 부인, 발찌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
어느새 표정이 돌아온 요한이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
“발찌에도 의미가 있나요?”
보석 색과 관련된 의미만 알고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잘 모르는구나.”
그러자 요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
“어쩐지 아쉬운걸.”
“그래도 공작님께서 이상한 의미가 담긴 선물을 주시진 않았을 거잖아요.”
“자신할 수 있어?”
요한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내가 부인을 가지고 제법 이상한 생각을 하고 살거든.”
“……네?”
“못 알아들었으면 어쩔 수 없지.”
내 입술 근처에 그의 엄지가 닿았다. 그가 뭉근하게 입술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곧 있을 초야에서 다 가르쳐 줄 수밖에.”
초야. 그동안 우리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나오지 않던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