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 여자는 내 여자야2022.02.18.
황궁의 가면무도회는 밤에 열리는 만큼 무척 화려했다. 가면무도회의 중심에는 황태자가 있었다. 가면을 쓴 수많은 이가 황태자와 친분을 맺기 위해 몰려들었다.
“전하. 오늘 밤은 저와 어떠신가요?”
“예전부터 전하와의 밤만을 기다렸어요.”
화려한 가면으로 치장한 여자들이 교태를 떨었다. 하지만 그런 여자들의 모습을 볼수록 황태자는 짜증이 날 뿐이었다.
‘왜 자꾸 그 여자 생각이 사라지지 않지?’
황태자 카를로스는 주변에 몰려드는 이들을 무시한 채 와인을 들이켰다. 즐겨 마시던 술인데도 묘하게 입에 맞지 않았다.
‘그 여자가 뭔데…….’
주변에 있던 귀족 하나가 그를 말렸다.
“전하. 평소보다 더 과음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슬슬…… 아닙니다.”
카를로스의 인상이 험악해지자, 주변에서도 더 이상 그를 말리지 않았다. 취기가 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에스텔 리베르탄. 그 비천한 여자를 처음 본 건, 그의 생일 연회에서였다. 그때는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고귀한 공녀 대신 들인 천한 평민이라기에, 가벼운 관심만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에스텔 리베르탄이라고 합니다.’
연분홍색이 도는 백금발이 천사의 빛처럼 환했다. 오밀조밀하고 귀여운 이목구비는 인형처럼 사랑스럽다는 느낌을 주었다. 황태자 카를로스는 분명 여자가 비천한 신분을 고쳐먹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달려들 것이라 생각했다. 여태 그가 봐왔던 여자들은 전부 그랬으므로. 하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남색 눈동자는 인사 후 다시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심기를 거슬렸다. 감히 저딴 천한 여자가 황태자인 그를 하찮게 본다고도 여겼다.
‘이 황실 연회가, 천한 피도 끼어들 수 있는 곳이었나?’
신분을 문제 삼아 비아냥거렸던 것도 그래서였다.
‘리베르탄 공작가도 아주 대단해. 저런 걸 자랑스럽게 데려오다니.’
충격과 공포가 서린 남색 눈동자가 오로지 그만을 담자, 황태자는 조금 짜릿했다. 파랗게 질린 여자는 고개를 조아리며 황태자인 그에게 사죄했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어떻게든 오늘의 무례를 사죄하기 위해 또 찾아오겠지.’
본래 여자들이란 그를 무서워하다가도 접점을 만들기 위해 안달을 냈으니까. 하지만 그 뒤로 에스텔 리베르탄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무례를 사죄하러 찾아온다면 은혜를 베풀 생각이었는데.
‘감히 나를 무시해?’
코웃음을 치며 황태자는 평소처럼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고, 수많은 연회를 보냈다. 문제는 제 손에 들어오지 않은 에스텔이 괜히 아쉬워졌다는 것이다. 충격을 받아 떨리는 눈가 끝에 맺히던 눈물이 자꾸 떠올랐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황태자는 특별히 리베르탄 공작가에 연락해 에스텔을 강제로 불러냈다. 그리고 약혼할 것처럼 굴며 에스텔을 모욕하는 데 성공했다.
“그 여자를 그렇게 놓치는 게 아니었어.”
카를로스가 독한 술을 들이켜며 쓰라린 속을 달랬다. 술에 취할수록 그 여자를 강제로 불러내 보냈던 시간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빌어먹을.”
앳된 티가 묻어나던 그 얼굴도 완연한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그 여잔 블란쳇 공작가로 팔려갔는데.’
카를로스는 다른 남자의 여자에 집착하는 취미는 없었다. 심지어 한 번 버린 여자를 두 번 돌아보는 취미는 더더욱 없었다.
“내가 빼낼 걸 그랬나.”
하지만 막상 블란쳇 공작가에 들어가 죽었을 에스텔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명목상으로는 살려두고 있다지만.’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반역죄로 감옥에 넣기까지 한 블란쳇 공작이 에스텔을 살려뒀을 리 없다. 결혼은 핑계고, 가지고 놀거나 이미 죽였을 수도 있다. 어차피 반역 가문의 입양아 따위 죽이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카를로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말도 안 되지만.
‘그 여자의 빈자리가 느껴져.’
괜히 짜증이 확 솟구친 카를로스가 테이블을 엎었다. 측근들의 비명이 들렸다. 카를로스는 그 사실을 무시한 채 가면무도회 뒤편으로 걸어갔다. 선선한 바람 사이로, 애타게 기다려 왔던 얼굴이 보였다.
‘환상인가?’
분홍색이 도는 백금발을 가발로 가린 채,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시선을 빼앗겼던 심해를 닮은 남색 눈동자만은 여전했다. 아무리 여자가 고프다지만, 환상에까지 시달리다니. 이딴 환상 따위.
“너…….”
그러나 카를로스는 그 환상을 무시하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여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아 빠르게 다가갔다.
“리베르탄 공작가의 천한 피?”
에스텔은 마지막 기억 속 모습보다 더 자란 상태였다. 토끼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때 느꼈던 꽃봉오리 같은 사랑스러움만은 여전했다.
“이제 성인이 된 뒤인가.”
카를로스가 다가설 때마다 에스텔이 조금씩 물러섰다.
“너도 이미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지 않나. 왜 대답을 안 하지?”
“전하.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생생한 대답이 들려오는 걸 봐선, 환상이 아닌 착각인 모양이다. 하나 카를로스는 설사 이게 다른 여자라 해도 상관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에스텔로 느껴진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진짜 에스텔은 다른 남자의 것이 되었으니…….’
블란쳇 공작이 그녀가 이런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도록 놔뒀을 리 없었다. 하지만 기왕 멋대로 상상하는 거, 더 좋은 쪽으로 상상하는 게 도리인 법이다.
‘아직 내 것이 될 수 있다면…….’
찌릿한 쾌감이 머리를 찔렀다. 카를로스는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어 던지고 여자의 턱을 쥐어 자세히 남색 눈동자를 확인했다. 그 여자랑 똑같다.
“특별히 오늘 밤 나와 함께할 수 있게 해주겠다.”
파문처럼 일렁이는 눈동자에 자신이 담기는 게 즐거웠다.
“마음에 차면, 첩으로라도 삼아주지.”
에스텔이 그의 말에 겁을 먹고 잔뜩 굳었다. 익숙한 여자들과 다른 풋풋한 싱그러움이 풍겨왔다.
“설령 첩이 되지 못하더라도 만족할 거다. 약속하지.”
하지만 여자는 그의 손을 때리며 뿌리쳤다. 멀어진 에스텔이 파들거리는 손으로 팔찌를 쥐며 이름 하나를 중얼거렸다.
“……요한.”
그리고 그 중얼거림은 정확히 카를로스의 귀에 꽂혀 들었다. 감히 다른 남자의 이름을? 그것도 황태자인 자신을 앞에 두고? 속에서 열불이 난 황태자가 에스텔에게 비아냥거렸다.
“감히 황태자인 나를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다시 손을 뻗어 에스텔의 팔을 잡은 카를로스가 이번에는 그녀를 끌고 가려 했다.
“네가 누구든 황태자의 하룻밤 상대도 과분한 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장소로 말이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어느샌가 여자의 뒤에 나타난 흑발의 남자가 카를로스의 손을 튕겨냈다. 요한 블란쳇.
“부인, 괜찮아?”
그는 아내가 괜찮은지 살핀 뒤 황태자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상한 것이 멋대로 꼬여 들지?”
블란쳇 공작은 에스텔이 마치 당연히 제 여자인 것처럼 폭 끌어안으며 카를로스를 노려보았다.
“그것도 내 부인한테.”
*** 갑자기 등장한 황태자는 도저히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요한의 이름을 불렀다.
“……요한.”
요한이 자기 이름을 불러야 팔찌에 걸린 마법이 발동된다고 했으므로. 괜히 황태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속으론 애처롭게 그의 이름을 하염없이 외쳤다.
‘요한! 요한! 위험하면 온다고 했잖아!’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확 끌어안았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짙은 머스크 우드 향, 나를 휘감은 단단하고 든든한 팔, 다소 거친 느낌임에도 아프지 않은 몸짓이었다. 요한이다. 내 몸을 붙든 그의 손에는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한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앞에 있는 상대 때문인지 더욱 어둡게 가라앉아 있어 맞닿은 살결이 저릿저릿하게 떨렸다.
“에스텔, 괜찮아?”
나는 울먹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요한의 적의 가득한 눈빛 역시 자연스럽게 황태자를 향했다.
“왜 이상한 것이 멋대로 꼬여 들지?”
낮은 저음이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그것도 내 부인한테.”
상대는 황태자다. 아무리 황실의 망나니로 악명이 높다 해도, 결코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요한이 나를 끌어안은 순간부터 불안함이 다 가시면서 안심이 되었다. 왠지 요한이 다 알아서 해줄 것 같았다. 요한의 시선이 내 손목을 향했다. 황태자를 쳐낸 건 나인데 내 손만 살짝 부어 있었다. 그 손목을 본 요한의 눈동자에 살기가 차올랐다.
“저놈이 네게 무슨 짓이라도 했어?”
차갑게 떨어진 목소리는 크지 않아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말해봐, 부인.”
당장에라도 황태자든 뭐든 사지를 분해해 버릴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원하는 대로 다 복수해 줄게.”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복수.’
그 단어가 나는 몹시 기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집에 가고 싶어요.”
“알았어. 돌아가자.”
요한은 형형하던 기세를 감추고 나를 달래주었다.
“갑자기 꼬인 저딴 것들은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왜 나를 거부하지?”
황태자는 막 술에서 깬 것처럼 비틀거리다 이를 악물며 물었다.
“저자가 뭔지나 알고 매달리는 건가? 진실을 알면 네가 매달려야 할 진짜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이 가능할 텐데.”
“가요, 공작님.”
난 상황이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요한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차피 저자는 너와 결혼한 진짜 부부도 아닌-”
“멋대로 버리고 나니 아쉬워졌나?”
요한의 시선이 황태자를 향했다.
“미안하지만, 이 여자는 내 여자야.”
요한이 큰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리고 정돈된 이마 위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진득하게.
“아무리 후회한다 해도 달라지지 않아.”
어쩌면 황태자에게 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하는 과시적인 행동. 그런 행동조차도 불쾌하기보다는 요한의 강한 질투가 느껴져서 나는 묘하게 들떴다. 내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자, 요한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내 여자는 참 예쁘기도 하지.”
황태자의 목소리가 시작되려던 순간.
“부인이 더 이상 저딴 걸 상대할 필요 없어.”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눈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심지어 방금까지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것과 달리 바로 눈앞에 요한이 있었다.
‘블란쳇 공작저로 온 건가?’
하지만 근처에서 연회장의 현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황궁 안의 다른 장소인 것 같았다. 요한의 얼굴에 묘한 그늘이 졌다. 그는 아직도 분이 차오르는 듯한 얼굴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어?”
“당신이 바로 와줘서 아무 일도 없었어요.”
“거짓말하지 말고.”
“음…… 저를 끌고 가려고 한 것만 빼면요? 괜히 음료를 가져다 달라고 했나 봐요.”
요한이 나른한 눈가를 조금 더 일그러뜨렸다.
“아니. 잘못은 다 그 새끼가 한 거지.”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처럼 입가가 미세하게 비틀렸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그는 그림처럼 근사했다.
“내 부인의 잘못이 뭐가 있겠어.”
그의 긴 손가락이 내 귓불을 어루만진다. 허리를 감싼 다른 손이 천천히 둘 사이를 밀착시켰다. 감정이 휘몰아치는 붉은 눈동자가 바로 눈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숨을 쉬는 것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씨익 웃었다.
“키스는 아껴둘게.”
볼에 입을 맞춘 그의 입술이 하얀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조금씩 더 아래로 내려갔다. 섬세한 쇄골을 따라 가볍게 내려앉은 보드랍고 뜨거운 그의 입술.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화상을 입히듯 열기가 퍼져 나갔다. 마침내 쇄골 한쪽에 입을 맞춘 그가 다시 눈을 마주했다.
“이것까진 못 참아.”
요한이 이를 드러내어 내 쇄골을 깨물었다. 배고픈 맹수처럼,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나를 바로 잡아먹으려는 듯이. 아주 난폭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