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너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는데!2022.02.11.
로자리아가 에스텔을 보며 일부러 더 슬픈 얼굴을 꾸며냈다.
“나 좀 꺼내줄 수 있겠니? 이 감방은 너무 추운 것 같아.”
데미안도 가세했다.
“그래. 나는 몰라도 네 엄마는 몸이 약한 사람이다. 최소한 몸이라도 따듯하게 할 수 있게 해 다오.”
에스텔과 시녀 하나. 여기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들어온 데다, 간수들도 에스텔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게 보였다. 에스텔이 블란쳇 공작을 단단히 사로잡은 게 틀림없었다. 모종의 거래를 해서 권력을 얻을 정도로 머리를 쓸 수 있는 애는 아니었으니까.
“아가?”
로자리아가 에스텔을 불렀다.
“엄마 좀 봐, 아가야.”
예전이었다면 당장 달려와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을 에스텔이다. 하지만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모습에 괜히 초조해졌다.
“베티.”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에스텔의 입술이 열렸다. 에스텔은 그들의 몰골을 구경하다가, 옆의 시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사람들이 뭐라는 거야?”
그들의 간절한 연기 따위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마치 타인 같았다.
*** 리베르탄 공작가는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감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모습에 찾기도 쉬웠다.
“베티. 저 사람들이 뭐라는 거야?”
“글쎄요.”
“뭐라는 건지 하나도 안 들리는데.”
내 생각보다 더 아무 감흥도 안 들어서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바라보는 베티의 눈에 경멸이 스며들었다.
“같이 대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네요.”
우리의 대화를 들었음에도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로자리아가 나를 향해 한껏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가야. 내 아가 에스텔.”
“아가요?”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누구신데 제게 아가라고 하세요?”
“엄마에게 화라도 난 거니?”
로자리아는 이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에스텔. 살려다오. 사람들이 우리를 잡아서 이런 곳에 가뒀어. 우리한테는 너밖에 없다. 지금 네 도움이 필요해. 네가 해줄 게 있는데…… 그 전에.”
데미안이 내게 애절하게 명령하려는 순간, 내가 말을 끊었다.
“왜요? 왜 제게 부탁하세요?”
“그, 그거야…… 우리를 구해주러 온 것 아니니?”
“전혀요.”
내 말에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파르르 떨었다.
“너, 어떻게 네가…….”
하긴. 항상 말을 잘 듣던 순종적인 딸이었기에 더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충격을 받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다.
‘저주에 대해서 떠봐야 하는데.’
로자리아는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입을 벌리고 있었고 데미안은 말도 안 되는 걸 보게 되었다는 듯 떠듬떠듬 질문했다.
“에스텔. 정신 차려라. 우리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미안하지만 제가 온 이유는 볼일이 있어서일 뿐이에요. 그쪽에게 질문이 하나 있어요.”
공작 부부 모두 무척 충격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우리를 지금 그쪽이라고 불렀니?”
“어째서……?”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게 왜요?”
그들은 마치 내게서 어떤 감정의 편린이라도 묻어 있나 찾는 것처럼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게 저주까지 거신 분들이잖아요.”
“무, 무슨 저주?”
로자리아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대답했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요한이 아니었어.’
나무들이 말했던 저주는, 리베르탄 공작가가 벌인 짓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으니 걸기도 쉬웠겠지.’
요한이 저주를 건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저주가 그대로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저주를 걸었을까?’
애초에 저주에 대해 잘 모르는 만큼, 그 이유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이 바라는 게 있다면…… 예스텔라?’
하지만 예스텔라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나는 예스텔라가 죽은 뒤에 입양된 아이였다.
“당치도 않은 소리다.”
데미안이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저주라니. 아무리 네가 내 친딸이 아니라지만, 그런 짓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래. 아가. 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강하게 부정하던 리베르탄 공작 부부도 나의 침묵에 눈치를 보며 서서히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네요. 요즘 저한테 이상한 기억이 자꾸 떠오르거든요.”
나는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슬그머니 그들을 떠보기 시작했다. 마법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려 보면, 어떤 저주든 그걸 위한 의식이 필요했다. 의식을 아무 장소에서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저주 거는 일을 리베르탄 공작저에서 실행하진 못했을 것이란 의미였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이상한 곳에 끌려간 기억도 나고요.”
“무, 무슨!”
로자리아는 그 말에 기겁했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그녀는 천천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결백함을 필사적으로 주장할 줄 알았다. 그런데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그보다 다른 곳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갑자기 왜 이렇게 태도가 바뀐 거니? 왜 웃지도 않고, 부모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는 거야.”
“네가 가장 사랑하는 건 우리잖니?”
물어보는 기색이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저주에 대해 해명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덕분에 피곤한 일은 한결 덜었다.
“미안하지만 전 이제 정말 그쪽에겐 관심 없어요. 나가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면,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네요.”
나는 쇠창살을 쥔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이제 제 가족은 따로 있거든요. 당신들이 아니라.”
“가족이 생겼다고?”
데미안의 눈에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스쳤다.
“설마 그 블란쳇 공작을 말하는 거냐? 그놈은 네 가족이 아니다.”
바닥에서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살갗이 곤두서는 감각.
‘마법이다.’
정갈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감방 안에 울려 퍼지는 낮은 남자의 목소리.
“부인. 괜찮아?”
요한이 감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저 쓰레기들이 너에게 이상한 소리 안 했지?”
나를 긁으려는 것인지, 묘하게 싸늘한 말투. 나는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해맑게 웃었다.
“어떤 소리가 이상한 소린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는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 요한,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한자리에 다시 모이기도 어려울 거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노리는 게 좋아 보였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건 다 확인했어요. 이제 제 가족은 공작님밖에 없네요.”
“……나밖에 없다고?”
“혹시 싫으신가요?”
내 입장에선 리베르탄 공작 부부와 확실히 선을 그은 거다. 어차피 더 이상 저주에 대해서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요한 입장에선 다르려나.’
요한은 잠시 침묵했다. 쾅! 쾅! 데미안이 목을 마구 울려가며 악을 썼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쇠창살이 덜컹거리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로자리아는 옆에서 그런 데미안의 몰골을 보고 놀랐는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래도 내 부인을 건드렸는데 그냥 둘 수는 없지.”
요한의 매끄러운 낯이 우아하게 두 사람을 향했다. 순식간에 그림자가 올라오더니 데미안과 로자리아의 머리를 쥐고 강하게 흔들었다.
“부인은 내가 어떻게 처리하길 바라?”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어쩌면 이건 시험일지도 모른다. 내가 진정으로 그를 배신할지 아닐지에 대한 시험.
‘오히려 좋아.’
지금보다 더 내가 복수할 대상이 아님을 증명할 사건은 없을 테니까.
“저는 됐어요. ……남편이 바라는 대로 해요.”
이번에는 공작님이 아니라 일부러 남편이라는 호칭도 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요한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러자 요한은 그런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부인이 바라는 대로.”
요한이 자연스레 나를 바깥으로 에스코트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요한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저 사람들과는 더 이상 작별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니니까.
“어째서! 너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입이 막히지 않은 로자리아가 뒤에서 소리쳤다.
“왜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스텔라의 자리를 채우겠다고 했잖아!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웃기시네.
“-에스텔!”
그들에게서 들은 말은 그게 끝이었다. 아, 확실히 감옥 안은 공기가 별로 좋지는 않다. 두 번 올 곳은 못 되는 것 같다. *** 로자리아와 데미안을 붙잡은 그림자는 그들의 머리를 철장에 강하게 내려친 뒤 사라졌다. 분명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그들은 조금 전 겪은 일로 고통을 느낄 정신도 없었다.
‘에스텔이 변했어.’
방금 그들이 본 사람은 분명 입양딸 에스텔이 맞았다. 그렇게 무시하고 학대해도 애정을 갈구하던 멍청한 딸. 그런데 겉모습만 같을 뿐, 그들이 알던 에스텔이 전혀 아니었다. 그들의 애원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무심하기만 한 태도. 애처로운 표정과 몸짓으로 다정하게 대해 주었건만. 이제 에스텔은 그들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과거,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는 언제나 순수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오로지 그들만을 향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더 노력할게요.’
언제나 손쉽게 얻을 수 있던, 불가해한 애정이었다. 어떻게든 둘을 위해 노력하려고 애썼던 말간 시선. 정말 언제가 되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었는데. 방금 본 것은 공작 부부가 알던 에스텔이 아니었다. 당연하리라 생각했던 것이 사라졌다. 그 사실에 에스텔을 이용해 밖으로 나갈 계획, 에스텔에게 거짓 증언을 시킬 계획, 살아남기 위해 짜두었던 모든 것이 휘발되어 버렸다. 이제 그 눈동자에는 더 이상 아무런 애정도 없었으니까. *** 돌아오는 길 내내 요한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굴이 안 좋네. 안에서 무슨 얘기를 들었던 거야?”
“진짜 별일 없었어요. 나중에 베티에게 물어보세요.”
“그런 거라면 됐어. 부인을 믿으니까.”
그는 나를 너무 헷갈리게 했다.
“부인의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을 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요한은 베티에게 조금 전 상황에 대해 전해 들어야 했다.
‘의심스러울 텐데?’
물론 나중에 몰래 베티를 불러다가 들을 수도 있다.
‘그래. 지금 내 앞에서는 이렇게 얘기하는 거겠지.’
이런 식으로 얘기해서 내 마음을 사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하지만 같이 따라간 베티는 정확하게 증언해 줄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저주라는 말에 좀 충격을 받은 것 같던데.’
확실히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저주에 걸렸다고 하면 놀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부정했으니까.’
베티가 요한에게 다 전달한다고 해도 큰 변수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요한에게 해둘 변명은 준비해 두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몸이 약했고, 자주 앓는 게 이상해서 저주를 의심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누군가와 접촉한 적이 없어서 공작 부부에게 한번 물어본다는 게 말이 좀 이상하게 나왔다는 변명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의심을 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실수로 말을 잘못했다는데 더 따질 순 없겠지. 오래도록 기다려 온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나를 학대하던 이들의 몰락을 봤는데도, 화가 나거나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무관심했다.
‘왜 그렇게 매달렸나 모르겠어.’
그래도 그들이 내게 나름대로 의미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
‘변한 것처럼 보였던 건…… 그것도 내 착각이겠지.’
어쩐지 초라한 와중에도 눈빛에 생기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몰락이라는 큰 위기를 겪어서 그런 게 분명했다.
‘돌아가서 쉬어야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여름 축제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시작된 모양이었다. 지나가는 길마다 여름 축제를 위해 장식된 꽃들이 보였다.
“부인.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이렇게 부모님을 뵈러 온 걸로도 무리했다는 거 알아요.”
“그런 얘기 말고.”
요한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내가 바라보던 창문을 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가면무도회 초대장 받지 않았어?”
저번에 베티를 통해서 전달받은 초대장이 문득 떠올랐다.
‘가보고 싶긴 했는데…….’
리베르탄 공작저에 갇혀 있던 나는 그런 파티와 완전히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가면무도회는 이름 자체로도 뭔가 신날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우리 같이 가면무도회에 갈까? 결혼하고 나서 데이트도 한 번 안 했잖아.”
잠시 고민하는 찰나, 요한이 살짝 일어났다. 충분히 넓은 마차였지만 그의 긴 다리를 감당하기에는 좀 좁아 보였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하지만 리베르탄 공작가가 반역죄로 멸문했는데 제가 어떻게…….”
“어차피 가면무도회잖아. 아무도 모를 거야.”
말도 되지 않는 위로였다. 혹시나 정체가 알려지면 온갖 피곤한 일이 뒤따르게 될 거다.
‘가벼운 즐거움 때문에 곤란하게 할 순 없지.’
애초에 요한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초대장을 받은 일조차 잊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요한이 자연스럽게 내 반대쪽 어깨에 손을 얹어 끌어안았다. 밀폐된 공간, 둘만 있는 상황.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그게 부인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검은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은 차가웠지만, 신기하게도 온기가 느껴졌다.
“부인은 블란쳇이잖아. 에스텔 블란쳇.”
정식으로 결혼한 게 아니라는 증거를 모른 척해야 하니, 더 반론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면 가고 싶어. 둘이서 같이.”
“그래. 같이.”
생각해 보니, 가면무도회 하면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황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