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부탁하지 말고, 요구해2022.02.04.
발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내 심장 소리도 커졌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꾹 막은 채 고민에 잠겼다.
‘이제라도 나가야 하나?’
어쩐지 바로 행동하려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미 늦은 거 같은데.’
숨지 말았어야 했는데! 집무실에 있는 시계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내 후회도 더 커져갔다. 발소리가 멈췄다. 바로 집무실 책상 앞이다. 기사단장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블로뉴 남작이 발견한 고아원이 하필 마님께서 나온 곳이라는 게 무척 신기합니다.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글쎄.”
바로 앞에서 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 나랑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아주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나저나 내가 나온 고아원을 찾았다고?’
라비안느 고아원은 별거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고아원장이 예상외로 능력이 좋아서 우르르 아이들을 입양시킨 것 빼고.
‘하지만 한꺼번에 고아들을 일꾼으로 데려가는 건 흔한 일이라.’
아마 요한이 내 고아원을 조사했다고 해도 특별한 걸 발견하진 못했을 것이다. 요한은 책상에 가볍게 걸터앉은 채 말했다.
“어느 쪽으로든 캐내면 뭐가 나오겠지. 요즘은 블란쳇 공작가에 오는 습격은 없나?”
“예. 리베르탄의 몰락 이후 모두가 몸을 사리는 듯합니다.”
“잘 됐군.”
나는 괜히 심장을 졸이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들킬걸.’
기사단장과 요한은 말을 이어갔다.
“참, 주군. 그러면 리베르탄의 편지는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셨습니까? 제가 아직 주군의 입장을 전달받지 못해서요.”
“아주 몸이 단 모양이지?”
“예. 황궁 감옥에서 난리 치고 있다 합니다.”
요한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에 불안해져서 계속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리며 요한이 집무실 책상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숨어 있는 쪽으로 말이다.
‘들켰다!’
나는 사선으로 시선을 내린 요한을 보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괜히 인사하는 척 손도 흔들어주었다.
‘뭐라고 변명하지?’
하지만 미세하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요한은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걸 말하지 않으려는 건가?’
요한은 집무실 책상 아래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집무실 책상이 크다고 해도 안쪽 공간이 넓은 건 아니었다. 요한의 단단한 종아리와 내 웅크린 몸이 닿았다. 나는 쭈뼛쭈뼛 내 무릎을 꼭 끌어안으며 최대한 안쪽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책상 벽에 붙었어도, 요한의 다리와 내 몸은 밀착되어 있었다.
‘요한은 무슨 생각이지?’
요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난 리베르탄의 제안을 들어줄 생각이다.”
“예? 정말입니까?”
“그래. 부인과 약속한 게 있거든.”
“그러시군요. 그러면…… 마님께 설명 드려야 할 게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최근 몸이 아파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기사단장의 목소리에서 염려가 느껴졌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보다, 레이몬드. 너에게 조언을 구할 게 있다.”
요한은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기사단장 이름이 레이몬드인가 보네.’
그보다 왜 요한이 나를 아래에 둔 채 계속 기사단장과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 주군께서 저에게 질문을 말입니까?”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엄청난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무척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일입니까? 이번에 새로 기사단과 함께 처리해야 할 마물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니.”
요한은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리며 대답했다.
“내 부인에 관한 얘기다.”
“새로 오신 마님 말씀이시군요. 그분과 대체 무슨…….”
기사단장 레이몬드가 몰입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나도 갑자기 들려온 내 얘기에 귀를 쫑긋 세우며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요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인이 나를 계속 공작님이라고 부른다.”
“예에?”
“결혼한 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호칭이 공작님이다. 이건 아무래도 큰 문제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나도 놀라고, 기사단장 레이몬드도 놀란 듯했다. 레이몬드는 잠시 헛기침을 하다가 다시 물었다.
“아, 아예 다른 호칭을 생각하지 못하시는 건 아닐까요?”
“그럴 리는 없어. 저번에 위기 상황에서 나를 ‘내 남편’이라고 부르기도 했거든.”
“그, 그러시군요.”
“심지어 반말도 아주 자연스럽게 했어.”
안톤이 습격했을 때를 기억하고 말하는 모양이다.
“모쪼록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다. 이 부부 생활은 여러 가지 의미로 중요하니까.”
요한의 목소리가 더 심각하게 느껴져서, 더 낯부끄러웠다. 이미 내 얼굴은 열이 올라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때는 위기 상황이어서 나도 모르게 나왔지만, 내 말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으니 상황이 완전 다르게 느껴졌다.
‘지금 날 놀리는 거 같은데?’
요한은 아래에 숨어 있는 내가 자리에 없는 것처럼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참 귀여웠는데, 한 번 더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저, 저로서도 잘…… 주군이 마님과 함께 대화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또 내가 부탁해서 하면 그 귀여운 느낌이 안 날 수도 있단 말이지.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남편이란 말이 귀여웠던 거거든.”
“그, 그렇군요…….”
기사단장 레이몬드는 난처한 기색으로 요한의 말에 수긍했다. 그때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아래에 있는 나를 슬쩍 훑고 돌아갔다.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날 놀리는 게 확실해.’
속에서 삐죽 불만이 솟아올랐다.
‘참자. 기사단장이 나갈 때까지만.’
최소한 요한은 기사단장이 있을 때까지 내 존재를 알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요한과 단둘이 있을 때 변명하는 게 나한테도 훨씬 편했다. 하지만 요한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또 남편이란 말 대신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군. 원래 신혼부부는-”
꾹. 결국 참다못한 나는 요한의 종아리를 검지로 꾹꾹 찔렀다. 그리고 요한을 올려다봤지만, 요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애정을 과시한다지 않는가.”
꾹꾹.
“어느 쪽으로 불러줘도 다 귀여울 것 같아서 레이몬드 네 조언이 필요하다.”
요한은 그렇게 말을 마친 뒤 구두를 살짝 움직여 짓궂게 맞닿아 있는 내 발을 툭 쳤다. 전혀 안 들어준다는 뜻인가.
‘언제까지 이 낯부끄러운 얘기를 들어야 해.’
특히 레이몬드의 난감해하는 듯한 기색이 바로 느껴져서 더 부끄러웠다.
“그, 그러실 수도 있죠. 저는 아무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문제라면 블리뉴 남작이나 다른 자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블리뉴 남작보단 망나니인 네가 더 잘 알지 않겠나?”
“이, 이런 심도 깊은 고민은 한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결국 레이몬드는 대답하는 것을 포기하고 ‘저는 급하게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이만!’ 하고 도망쳤다. 집무실 문이 닫혔다. 그제야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어 책상 아래에 있는 나와 시선을 맞춘 요한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부인, 숨바꼭질이 하고 싶었어?”
아니거든! 하지만 여기 숨은 것 자체가 내 잘못이라 따질 수가 없다.
“……숨바꼭질하려고 여기 들어온 건 아닌데요.”
“그러면 왜 여기에 있는데?”
요한이 턱을 까딱이며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도 그러려고 했다.
‘발 저려.’
너무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더니 발에 쥐가 난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못 한 채 가만히 있자, 나는 더 부끄럽고 속상했다.
“내 부인은 참 손이 참 많이 간다니까.”
“……많이 귀찮죠?”
“그래서 좋단 의미야.”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굽힌 요한이 상체를 숙여 나를 끌어안아 꺼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많으니까.”
갑갑했던 공간에서 벗어나자 한결 숨쉬기가 편했다. 요한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그래서, 내 부인이 책상 아래에서 발견된 이유가 뭘까. 내가 알아서 맞춰봐야 하나?”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별거 아닌 말에도 나한테 장난을 치려는 듯한 느낌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때 공작님을 안심시킬 방법을 생각해 오라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그래서 말인데, 공작님과 함께 가면 어떨까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요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공작님께서 절 지켜주시면 되잖아요. 제게 무슨 일이 생겨도 바로 구해주실 수 있고요. 아니면 의사를 대동해도 돼요.”
당장 요한의 집무실에선 아무리 생각해도 저주의 매개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뭔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반역죄로 잡혀가 있는 상황이다. 요한의 허락 없이, 그것도 아직 리베르탄의 성을 쓰고 있을 게 분명한 내가 보러 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까지 끼고 있을 땐, 저주 얘기를 꺼내기 어렵겠지.’
그래서 보러 가도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아예 안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요한이 나를 보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고민하는 게 있을 때 요한이 하는 행동이다.
“그건 기본이지.”
“네?”
“부인이 가는데, 남편인 내가 따라가는 건 기본이라고. 그래서 별로 안심이 안 되는데.”
요한은 느릿한 몸짓으로 책상을 붙잡고 있던 내 한쪽 손을 잡았다.
“한번 자세히 생각해 봐. 어쩌면, 내가 해 주고 싶어질 방법이 있을 수도.”
그러니까 그게 뭔데! 억울한 마음이 울컥 솟아올랐지만, 나는 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남편님?”
“…….”
“이렇게 불러드리는 건요?”
남편이라는 칭호를 담는 내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요한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건 기분 좋은 소리지만, 정답은 아니었어.”
“그러면 정답이 뭔데요?”
그러자 요한이 선뜻 대답해 주었다.
“없어.”
“네?”
“그냥 가고 싶다고 해.”
나는 얼굴에 오르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요한은 의자에서 일어서서 차분히 말해주었다.
“부탁하지 말고, 요구해. 그러면 다 들어줄게.”
어쩐지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서 묘한 죄책감이 비치고 있었다. 특히 그의 시선은 내 목 언저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손으로 목 근처를 매만졌다. 그러자 요한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일어나고 나서 아픈 곳은 없어?”
“없는데요.”
“……그러면 부인.”
일어선 요한이 한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아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부인은 리베르탄에서 나가고 싶었던 적 있어? 입양된 걸 후회했다든가.”
이 상황에서 나오리라 예상한 적 없는 질문이었다. 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리베르탄에 대한 대답은 너무 중요한데.’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할지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목소리에서 이상하게 적의가 안 느껴져.’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지, 사랑받는 딸인 척 말하는 게 나을지 사이에서 온갖 계산이 스쳤다. 나는 그 극단적인 선택지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았다.
“그렇죠, 있어요. 후회한 적.”
“그래도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부인의 양부모님을 사랑해?”
희미한 미소를 지은 나는 내 얼굴을 잡은 요한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사랑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뵙고 싶을 정도로는요. 참 대답이 어렵네요.”
요한은 이전과 조금 결이 달라진 대답을 눈치챘을까?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내 진심과 너무 다른 대답은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게 티 날 것이다. 그리고 난 저주를 확인하기 위해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만나야 했다.
‘반역죄로 죽기 전에 꼭!’
요한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반대로 그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그게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까 레이몬드와 한 이야기로 짐작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부인이 충격받을까 봐 말하지 않았던 것이 있어.”
“…….”
“부인과 내가 결혼한 그날, 리베르탄 공작가는 반역죄로 멸문했어.”
“…….”
“그것도 내 손에.”
마지막 목소리에는 선명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 의사인 헨리는 진료용 마도구의 결과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마님의 병이 진단되지 않는 게 너무 기이하여 일부러 가장 정밀한 마도구를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환자의 의식이 깨어 있지 않으면 측정할 수 없어 지금에서야 사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손을 넣으면 되는 거죠? 해봐도 소용없는데.’
어쩐지 헨리는 검사를 받던 마님의 태도가 무척 의아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주 아프고, 큰 병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람의 반응치고는 무척 태연했던 탓이다.
‘검진하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고마워요.’
심지어 검진하던 그에게 웃어주는 친절까지 빼놓지 않았다. 위이이잉- 마도구에서 결과가 나왔다. 헨리는 두 눈으로 보고도 그 결과가 믿기지 않아 두 눈을 크게 떴다.
‘마도구에 오류가 생긴 걸 거야.’
[에스텔 블란쳇: 측정 불가.] 이 진료용 마도구로 측정이 불가한 경우는 단언컨대 거의 없었다. 새로 오신 주인마님이 인간이 아니어서 제대로 측정이 안 되는 게 아니라면.
‘마님께서는…….’
희대의 불치병, 잠자는 공주에 걸리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