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고작, 너 따위가2022.01.28.
쪽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단번에 누군지 알아보았다. 나한테 이런 쪽지를 보낼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으니까. [부인, 오늘 자지 않고 기다려. 같이 자야 하니까.] 나도 모르게 얼마 되지도 않는 문장을 계속 읽으며 얼굴을 붉혔다.
‘왜, 왜, 왜, 대체 뭘 하려고.’
요한이 내 방을 찾아오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바짝 긴장이 되었다.
‘이건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야.’
아직 우리는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 요한도, 나도 초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짜 부인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
서류상 진짜 부부가 아닌 이상 굳이 초야를 치를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난 이상하게도 그 초야가 치러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더 생각하지 말자.’
나는 발그레하게 물든 두 뺨을 감싸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차피. 요한은 여태 그랬던 것처럼 장난친 것일 테니까. 쪽지를 옆에 두고 바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생각해 보니 방이 완전 달라졌네.’
워낙 정신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져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이전의 칙칙한 방과는 다르게 완전 고풍스럽다.’
어쩐지 방 자체에서 격조가 묻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베티를 내보낼 때, 이 방이 어떤 방인지 한 번 물어볼 걸 그랬다.
‘내일 물어보면 되겠지.’
나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관심을 끄고 책에 집중했다. <마법의 기초.> 마법책은 모두 고대어로 적혀 있었다. 고대어는 사어가 된 문자답게 제국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로 통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요한도 내가 이 책을 읽게 두었겠지.
‘사실 고대어를 읽을 줄 안다고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름 고대어 실력 하나는 나쁘지 않았던 나는 마법 책을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그때 내 시선이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흑마법.’
[마법은 마력을 통해 세상의 법칙을 바꾸는 힘이다.] [흑마법은 제물과 저주를 통해 세상의 원리를 어길 수 있다.] [저주는 흑마법사마다 치르는 대가가 다르다. 흑마법사가 이룩하고자 하는 소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가를 치르게 한다고?’
그 문장을 읽은 순간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원작에서 요한은 흑마법사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고 했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흑마법의 제물이란 게 그리 단순한 게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는 게 어떤 건지도 안 나왔지.’
[다만 흑마법은 본인이 예상하지 못한 미래를 대가로 가져가기도 한다. 흑마법사 본인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흑마법에 대한 의미심장한 구절을 되새겨보던 중,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큰 손이 내 책을 우아하게 집어 들어 쏙 빼냈다.
“마법의 기초.”
내 바로 앞에 가운을 걸친 요한이 보였다.
“내가 예전에 많이 봤던 책이네.”
남색의 가운 사이로 요한의 미려한 근육이 우아하게 드러났다. 저번에 한 번 봤는데도 날렵하게 쪼개진 남자의 몸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정장이랑은 느낌이 완전히 달라.’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을 절제하여 보여주던 정장과 달리 가운은 몸을 그대로 드러내는 옷이다. 그래서 감탄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그의 육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두꺼운 흉곽과 딱 떨어지는 넓은 어깨, 묘한 분위기를 자극하는 날렵한 허리선까지.
‘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보면 안 되는데…….’
하지만 내 시선은 아주 정직하게 요한의 몸을 훑었다. 요한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느슨하게 묶인 가운이 움직일 때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요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자상하게 물었다.
“고대어가 어렵지는 않았어? 고대어 중에서도 어려운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중간중간 모르는 부분은 건너뛰고 읽어서 괜찮았어요. 어차피 제대로 공부하려고 읽은 것도 아니고…….”
“흐음.”
빠르게 책을 훑은 요한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부인. 혹시 제대로 공부하고 싶지는 않아?”
“공부요?”
“보통은 빌리기 힘든 책이니까. 시간이 빌 때마다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고, 공작님께서요?”
“당연히 나지.”
그가 넓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 말고 함께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반 농담처럼 가벼운 웃음소리가 묻어나는 말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을 선뜩하게 하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이런 걸 부탁할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요.”
“그래야지.”
고개를 여유롭게 까딱인 요한이 피식 웃었다.
“그런 놈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어쩐지 이 마법을 계속 화제로 삼으면 곤란해질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옆자리에 두었던 쪽지를 요한의 눈앞에 보여주며 물었다.
“그런데 이 쪽지요, 자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뭐였어요?”
“아아. 그거.”
요한이 내 손에서 쪽지를 가져가며 바닥에 떨구었다.
“그거야 우리가 처음으로 부부의 침실을 같이 쓰는 날이니까.”
“……네?”
“그동안은 부인의 방에서 잤지만, 이제는 부부 침실로 왔잖아. 그러니 원칙대로 부부는 한 방을 같이 써야지.”
그러면 이 넓고 호화로운 방이 공작저의 부부 침실이었던 거였어?! 어쩐지 방 전체에서 흐르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모두 납득가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 쓰러져 있는 동안 거의 정식 공작 부인으로 취급받은 셈이네.’
원래 이 부부 침실은 정식 공작 부인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원작의 나는 이 침실에 들어오고 싶었어도 들어오지 못했다.
‘이제까지 내가 잘해온 걸까?’
문득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요한의 단단한 몸이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가 내 어깨에 근육으로 성난 팔을 감으며 낮게 속삭였다.
“지금 무슨 생각해?”
그의 붉은 눈동자가 선명히 빛났다.
“나 말고 다른 생각할 여유가 있나 봐.”
왠지 불길한 느낌에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 그러면 앞으로 공작님과 제가 계속 잠을 함께 자게 되는 건가 싶었어요.”
“당연히 함께 계속 자야지.”
“계, 계속 이런 식으로……?”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시 그의 가운을 향했다. 그러자 그가 픽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난 원래 잘 때 편하게 자서.”
너무 편한 차림을 하는 거 아닐까요! 차마 요한에게 따지지 못한 나는 남색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자 요한이 피식 웃으며 내 볼을 꼬집었다.
“불편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한은 내 피부 결을 가볍게 쓸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아니면 내 차림이?”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요한이 천천히 내 허리에 손을 휘감아 침대 위에 눕혔다. 포근한 이불의 감촉에도 내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 꼭 불편한 건 아닌데요.”
“내 눈엔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순간적으로 요한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갑작스레 줄어든 거리감에 나도 모르게 놀라서 흠칫 뒤로 물러섰다.
“이런.”
요한은 물러선 나를 아예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자꾸 도망치면 아무 생각 없다가도 쫓고 싶어지는데.”
흥미 가득한 그의 시선이 나를 훑어내렸다. 그는 천천히 나를 제 품에 가두고, 내 손목을 쥐었다. 얇은 손목을 꽉 틀어질 것처럼 쥐었던 그가 굶주린 짐승처럼 나를 웃었다.
“이러다 내가 자극받으면 어쩌려고.”
꿀꺽. 거친 움직임에 느슨한 가운이 밀려나 단단한 육체가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자극할 생각 없었는데!’
새삼 그와 내가 이토록 체격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오싹함이 일었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요한은 누구보다 쉽게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거창한 준비 없이도. 내 경계심 가득한 눈동자에 그가 능글맞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
“걱정 마.”
요한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잘생긴 얼굴 위로 빛 그림자가 너울거리며 퇴폐적인 분위기를 더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인을 바로 잡아먹을 순 없지.”
요한은 제 콧대를 내 코에 살짝 문지르며 나직이 웃었다. 그가 내 손목을 쥔 손을 바로 해서 내 손까지 쥐었다. 뼈대 자체가 곧아 우아한 요한의 손, 고생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고귀한 손에서는 거칠고 단단한 느낌이 났다.
“오늘은 손만 잡고 잘게.”
요한이 나를 자신의 품으로 확 당겼다. 가운 너머로 야성적인 근육들이 내 몸을 꽉 붙들었다. 내 체온과 그의 체온이 비슷한 온도로 데워지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수록 정신 차려야 해.’
어쩐지 밤이 너무 길어질 거 같다. *** 요한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문 너머로 화창한 아침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요한이 눈썹을 비뚤게 올렸다.
‘……정말 여기서 잠들었나?’
첫 계획은 에스텔과 함께 있다 중간쯤 돌아가는 것이었다. 애초에 요한은 타인이 같이 있으면 잠들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함께 잠들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이는 그의 계획에는 전혀 없던 변수였다.
‘어떻게 내가.’
천천히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품에 안겨 있던 에스텔은 얌전히 잠에 들지 않았다. 뒤척거리면서 괜히 그를 자극하던 여자가 빨개진 고개를 홱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이렇게 안고 있으면 긴장돼서 잠이 안 온단 말이에요!’
‘나 때문에 긴장돼?’
‘지금 다 알고 이러는 거잖아요.’
에스텔의 분홍색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긴장되니까 더 이러고 있어야겠다.’
‘왜, 왜요……!’
‘난 부인이 나 때문에 긴장되는 게 좋으니까.’
요한이 바랐던 대로 에스텔은 그와 몸이 밀착되자마자 당황하면서 아주 솔직해졌다. 하지만 여자의 비밀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제법 재밌었다고 느낀 순간, 여자가 쌔근쌔근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그대로 여자를 두고 가려던 요한은 품 안에 감겨든 말랑말랑하고 따듯한 감촉에 중독되었다. 아기처럼 얕고 고른 숨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포근한 향기와 함께 잠들었던 것 같다.
‘어떻게 내가.’
요한의 단단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 여자의 곁에서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지.’
요한은 푹 휴식을 취해 몸이 개운하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런 스스로를 견딜 수 없었다. 복수 대상인 여자를 끌어안고 잠든 주제에, 악몽도 꾸지 않았다는 것이.
‘드디어 미쳤군.’
본래 그는 매일 밤 그날 밤의 악몽을 꾸었다. 그 꿈에서 블란쳇 공작저는 매번 불에 타 짓밟히고, 공작령의 주민들은 리베르탄 공작가에 의해 착취당한다. 가족들 역시 그날의 처참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고문당하고,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족들의 말도 달라졌다.
‘요한. 아파. 나 너무 아파. 그런데 왜 너만 멀쩡해? 왜 너만 안 아픈 거야?’
‘이 어미는 저승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어. 그놈들이 처절하게 죽기 전까지는, 그 죽음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절대 쉴 수 없을 것 같다.’
‘아들아, 블란쳇 공작가를 바로 세우고 그 더러운 적들을 모조리 단죄해라. 그것만이 우리의 죽음을 보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들에게 가장 비참한 죽음을! 가장 끔찍하고 추악하고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꿈속의 요한은 한결같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상처 하나 나지 않은 상태로 그들을 지켜만 보았다. 잔인할 정도로 슬픈 꿈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그 꿈을 꾸는 것이 기꺼웠다. 그 꿈에서야말로,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가장 끔찍한 순간을 되새길수록 결코 복수를 포기하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왜.’
눈앞에 에스텔이 있었다.
‘리베르탄의 입양아.’
고운 숨소리를 내며 잠든 얼굴은 무척 사랑스러웠다. 설탕을 바른 듯 희게 보드라운 얼굴, 인형처럼 오밀조밀하고 예쁜 이목구비. 여자의 아름다움은 리베르탄이 소중히 빚어낸 보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름다운 것만 존재할 리가 없었다.
‘이것은 변수다.’
요한은 손을 뻗어 길쭉한 검지로 여자의 가녀린 목을 쓸어보았다. 보드라운 살결을 따라 미세하게 느껴지는 숨소리.
“고작 너 따위.”
여자의 목은 너무 가냘파 한 손으로도 충분히 다 감쌀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것도 아닌 게.”
이 얇은 목을 부러뜨리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금만 힘을 줘도, 이 연약한 여자는 죽어버리겠지. 요한이 한 손으로 여자의 목을 천천히 감싸고 미세하게 힘을 주었다. 고른 숨소리와 함께 맥박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이 여자에게는 어쩌면 이게 더 나은 길일지도.’
요한의 계획대로 된다면, 여자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어쩌면 리베르탄 공작 부부보다 더. 하지만 지금 죽게 되면, 에스텔은 끔찍한 것 따위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예견했는지 에스텔의 섬세한 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부인.”
요한은 천천히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