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자지 않고 기다려2022.01.25.
공기가 무거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나는 몸을 바짝 굳힌 채 요한을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요한의 붉은 눈은, 마치 세상에 나만 있다는 것처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내게 걸어왔다. 베티는 자연스럽게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자리를 요한이 차지했다. 요한이 내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부인, 몸은 괜찮아?”
“네. 푹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아졌어요.”
“괜찮다고?”
요한의 눈매에 서늘한 그림자가 졌다. 그림자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나를 걱정하느라 자주 밤을 새웠는지 요한의 얼굴에는 전과 달리 피로가 느껴졌다. 완벽하게 관리된 모습에서, 미세하게 흐트러진 부분들이 퇴폐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내려 부어 있는 내 손목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얘기를 하려 했지만, 요한이 더 빨랐다.
“아직 부어 있는데.”
“이건…….”
“미열도 있고. 부인은 어느 정도까지 아파야 괜찮지 않다 생각하려나.”
내 이마를 짚어서 살핀 요한이 힐난이 담긴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정말 괜찮아서 그런 것뿐이에요. 아프지 않은데 아프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멀쩡하면 나한테 숨기지 않고 얘기하지 그랬어?”
목소리의 어조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이상하게 요한의 기분이 상한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복수해야 할 상대가 아프다는 걸 알게 돼서?’
생각해 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짜증 날 만했다. 공들여서 복수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뒀는데 복수할 상대가 병으로 죽게 생겼다. 그렇다면 확실히 허망할 것 같았다.
“그건 제가 잘못했어요. 큰 병이 아닌 걸로 걱정시키기 싫었을 뿐이에요.”
“큰 병이 아닌데 일주일씩이나 기절할 수도 있나 보군. 제국 의학이 원래 그리 관대해졌는지.”
막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평소보다 좀 느슨해진 내가 헨리를 보며 물었다.
“일주일 동안 다 나았을 수도 있죠. 그렇죠, 헨리 씨?”
요한이 은근한 미소로 헨리를 바라보았다. 졸지에 두 사람 중에서 편을 골라야 하는 헨리는 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럴 수는 있지만…… 부인. 사실 그럴 가능성은 적습니다. 일반인이라면 가볍게 낫고 일어났을 증상인데, 일주일이 되도록 혼절하고 계셨으니까요.”
혼절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말 내 상태가 심각해 보인다. 하지만 나로선 아무리 그래도 먼 세상 얘기처럼 느껴졌다.
‘원래도 자주 기절하곤 해서…….’
당장 아픈 것도 아니어서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요한이 헨리의 어깨를 가볍게 쥐며 물었다. 낮은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상대를 압박했다.
“그래서 내 부인이 쓰러진 원인은 무엇이었나?”
“지…… 지금으로선 타고난 체질이 약하시다는 얘기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일주일씩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할 얘기가 고작 그것뿐이라니.”
요한의 태도는 크게 바뀐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헨리 씨한테 괜한 불똥이 튈까 봐 나섰다.
“의사 선생님 말이 맞아요. 전 원래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어요. 이런 일도 자주 있었고요.”
요한의 입꼬리가 조금 더 삐딱해졌다.
“그걸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지?”
“굳이 말할 이유가 없어서요. 공작님께서 제게 물어보지도 않으셨고, 지병까진 아닌걸요.”
“……리베르탄 공작가에서는?”
“정확히는 아무것도 못 한 거죠.”
리베르탄 공작가는 나를 학대하는 쓰레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팠던 모든 원인을 리베르탄 공작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주 아팠던 건 고아원에서부터니까.’
리베르탄에 가서 더 심해지긴 했어도, 그건 아마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병은 노력만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무리 의사가 진료해도 치료할 수 없는 걸 어떻게 해요.”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친딸 예스텔라 아닌가.
‘예스텔라는 불치병으로 죽었지.’
나와 달리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리베르탄 공작가의 진짜 공주님. 애초에 예스텔라가 죽지 않았다면, 내가 리베르탄 공작가에 입양되거나 이런 고난을 겪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거 외엔 불치병으로 딸을 잃은 리베르탄 공작가가 고아 소녀를 입양할 이유가 없으니까.
‘병명이 잠자는 공주였던가.’
동화 속 공주처럼 영원히 잠들어버린다고 해서 지어진 병명이다. 물론 이름과 달리 꽤 지독한 병이었다. 환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온몸이 서서히 망가지다가 결국 잠자듯이 죽음을 맞게 하니까.
‘그냥 오래 자는 거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환자는 잠을 자는 순간, 온몸의 기능이 멈추면서 그대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내가 그런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뭐.’
원래 잠자는 공주는 흔치 않은 병이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도 예스텔라가 하필 이런 희귀병에 걸렸다면서 얼마나 슬퍼했던가.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침묵하던 요한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신경 쓰지 말라는 건가?”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어요.”
나는 최대한 요한이 넘어갈 법한 대답을 떠올렸다.
“그저,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모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죠.”
요한의 웃음이 미세하게 깨진 것 같았다.
“왜?”
요한이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잘생기고 나른한 얼굴이 입을 맞출 듯이 가까워졌다. 남자다운 콧날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이불을 꽉 쥐었다.
“왜, 그게 불필요한데.”
어쩐지 그는 일주일간 깨어나지 못한 나보다 더 아파 보였다. 당황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
“제가 원하면 공작님이 치료해 줄 수 있나요?”
“그래. 치료해 줄게.”
어쩐지 요한은 조금 애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다고. 그러니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편하게 얘기해.”
불현듯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들어주지 않을 거면서.’
그래서 나는 조금 돌려서 요한에게 물어보았다. 실제로 그가 했던 약속을 떠올리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러 가도 될까요?”
요한의 입가에 달린 미소가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너무 나갔나.’
반쯤 충동적으로 물어본 질문이었기에 수습하려던 순간, 그가 내 한쪽 손을 쥐며 말했다.
“그래. 갔다 와.”
*** 요한은 내 입에 죽까지 손수 넣어주면서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 뒤 떠났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그가 떠나기 직전, 남겼던 말이 계속 남아 있었다.
‘대신 나도 부인의 건강이 걱정되니까 부인도 날 안심시킬 방법을 생각해 봐.’
역시 쉽게 가게 해 주지 않을 줄 알았어! 그때 밖에 나갔던 베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님. 하녀장이 마님께 사죄를 드리기 위해서 찾아오셨어요.”
“하녀장이?”
불현듯 페트리샤를 처음 봤던 순간이 떠올랐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쓰러졌지.’
원래도 나를 싫어했겠지만, 첫 만남 이후 더 미워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된 거, 페트리샤에게만큼은 세게 나갈 필요가 있어 보였다. 페트리샤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안에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꼼꼼하게 올린 머리 때문인지 처음 본 날과 같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괜찮아졌어요.”
고개를 끄덕인 페트리샤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모든 사태는 제가 저택의 사용인 관리를 소홀히 한 탓에 벌어졌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님께서 어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는 고개 숙인 페트리샤를 보며 깜짝 놀랐다.
‘원래 이런 인물이 아니었는데?’
원작에서도 사과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저자세는 아니었다. 페트리샤는 태생부터 귀족이었으니까.
‘요한이 시킨 일인가?’
이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감이 안 잡혔다.
‘하지만 이건 좋은 기회야.’
물끄러미 페트리샤를 바라보다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내게 사죄하러 왔다고 했죠?”
“맞습니다.”
페트리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무덤덤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난 길리테 부인의 사죄를 받아주지 않겠어요.”
“……예?”
아무래도 그녀는 내 대답에 무척 놀란 모양이다. 나는 그래서 싱긋 웃어주었다.
“왜냐하면 길리테 부인은 아직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페트리샤의 청록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부인이 소홀히 한 것이 비단 이번 일만 있다고 생각하나요?”
솔직히 원작에는 페트리샤의 사정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괴롭히거나, 공격하면서 썼던 말은 있었다.
‘마님께서 이렇게 행동하시는 게 정말 옳은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이 집안의 사용인 중 누구의 마음도 얻지 못한 마님이, 의무를 다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잘 모르신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그게 주인님께 폐를 덜 끼칠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쩌면 그것을 마님의 의무로 삼아도 되고요.’
특히 나를 매번 괴롭히면서 했던 말이 그놈의 의무였다.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거나,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요. 사람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부인은 블란쳇 공작가의 하녀장이잖아요.”
“……그렇습니다.”
“부인의 죄는 나를 존중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녀장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거예요.”
“…….”
“그러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니겠어요?”
페트리샤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내 말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 보네.’
그래도 내가 알아줄 이유는 없다. 설령 요한의 명령으로 한 행동이어도, 실행한 건 페트리샤니까.
‘솔직히 요한의 심복이었던 사람을 아예 파직시켜 버릴 수도 없고.’
그건 너무 위험이 크다. 그동안 요한에게 무해한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게 완전히 깨지게 되니까.
‘그럴 바엔 아예 처벌하고 공작 부인의 일을 가지게 되는 게 낫지.’
“앞으로 블란쳇 공작가의 안주인 일은 내가 가져갈 거예요. 이견이 있나요?”
“이견은 없습니다만.”
잠시 고민하던 페트리샤가 입을 열었다.
“이미 주인님께서 마님께 안주인 일을 모두 넘기라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마님께서 쓰러지신 동안 모두 마무리가 된 상태입니다.”
‘요한이 그랬다고?’
깨끗했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도대체 요한은 무슨 생각인 거지?’
흑막의 감정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페트리샤가 물러날 걸 예상하고 미리 움직여서 내 신뢰를 쌓으려 했던 건가.
“……그런가요.”
뒤늦게 반응한 나는 혼란을 추스르며 페트리샤에게 말했다.
“이제 부인에게 내릴 벌을 말하겠어요. 부인은 안주인의 일까지 도맡은 하녀장의 소임을 다 하지 못하고, 블란쳇 공작가의 질서를 본인 스스로 어지럽혔어요. 그렇게 해서 공작님께 폐를 끼쳤죠.”
“…….”
“그러니 부인의 죄에 걸맞은 벌을 스스로 알아서 내리세요.”
이제 이렇게 하면 내 손을 쓰지 않고도 페트리샤에게 적당한 수준의 벌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내가 너무 가혹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도.
‘본인 스스로 너무 약한 벌을 줬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다. 이제 내가 안주인의 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 그 일을 빌미로 잘라버리면 그만이다. 이제 어느 쪽이든 원작대로 페트리샤가 나를 괴롭힐 방법은 차단시킬 수 있다.
“감사합니다, 마님.”
고개를 페트리샤의 눈빛이 조금 멍해 보였다.
“저는 이 집안의 기강을 흐트러뜨린 죄로 근신과 10년간 감봉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나를 보던 그녀가 제 손을 들어 스스로의 뺨을 아주 세게 때렸다. 짜악! 한 번 때렸을 뿐인데 입가에 피가 한 줄기 흐를 정도였다.
‘……독하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과 별개로 페트리샤의 눈빛은 묘하게 초롱초롱해서 생기가 돌았다.
‘왜 날 안 미워하는 거 같지?’
하지만 그건 아마 내 착각일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싸우기까지 했는데 날 안 미워할 리가 없다. 서로 사이가 좋은 사이에서도 미워질 판국에. *** 페트리샤는 마님의 방에서 천천히 나왔다.
‘저런 완벽한 분이 계셨다니.’
원래 페트리샤는 에스텔을 무시했다. 리베르탄의 딸이라서 미워해도 되는 존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리베르탄의 딸이 무엇을 해도 자기보다 못할 것이란 마음도 컸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안주인 일을 앗아간 요한의 결정이 더 납득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리석은 것은 너였다, 페트리샤.’
페트리샤는 눈을 꼭 감으며 차분하고 담담했던 에스텔의 말을 되새겼다.
‘부인의 죄는 나를 존중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녀장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거예요.’
분명 에스텔 역시 하녀장인 그녀를 싫어했을 거다. 안주인에게 제대로 인사하지도 않은, 무례한 하녀장이니까.
‘그런데도…….’
에스텔의 태도에서 그런 사사로운 감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초연한 태도로, 정확히 페트리샤가 무심코 넘어갔던 죄목을 짚어주었다.
‘그러니 부인의 죄에 걸맞은 벌을 스스로 알아서 내리세요.’
그때 페트리샤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동요했다.
‘나를 내쫓을 수도 있을 텐데.’
보통 이렇게 알력 싸움에 패한 하녀장은 집안에서 내쫓긴다. 그래야 안주인이 자신이 집안을 다스리기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텔은 자신의 편의함이나 미움을 뒤로한 채 페트리샤에게 새로 처신할 기회를 주었다.
‘이건 나를 위한 배려다.’
페트리샤는 메마른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당신은 어째서 저에게 이런 관용을…….’
에스텔은 얼굴 한 번 보지도 않은 사람, 그것도 그녀를 미워하던 페트리샤에게도 선의를 베풀었다.
‘앞으로 블란쳇 공작가의 안주인 일은 내가 가져갈 거예요. 이견이 있나요?’
아마 요한 주인님에게 들었을 일을, 그녀에게 한 번 더 물은 것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안주인 일을 해오던 나를 존중해 준 거겠지.’
공식적으로 그간 페트리샤가 해왔음을 말로서 인정해 주고, 의견까지 물어봐 주었으니 말이다. 요한 주인님의 결정이 있었기에, 그녀에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벌만 내려도 상관없었을 텐데.
‘그분은…… 그야말로 내가 꿈꿔오던 안주인이시다.’
품위와 의무를 지키면서도, 아랫사람에게 적절한 관용과 가르침을 주는 사람. 순간 페트리샤는 에스텔이 리베르탄의 딸이라는 것도 잊고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제 뺨을 세게 내려치고 반성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근신 처분을 위해 움직이는 페트리샤의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에스텔은 블란쳇 공작가의 복수 대상이기도 했지만, 페트리샤가 꿈에도 그리던 안주인 그 자체기도 했다.
‘난 더 이상…… 그분을 미워할 수 없을 거 같다.’
우아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순간, 이미 페트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에스텔을 블란쳇 공작 부인으로 인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 페트리샤가 떠난 뒤, 나는 바깥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잤는데 벌써 밤이라니.’
졸리지 않았지만 자지 않기에는 의사의 권고가 떠올랐다.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졸리지 않더라도 밤에 꼭 자야 한다고 했다.
‘잠들기 전까지 책이라도 읽고 있자.’
그런데 책 사이에 쪽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누가 봐도 귀족이 쓴 것처럼 우아한 글씨체. [부인, 오늘 자지 않고 기다려. 같이 자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