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얼마나 위험한 소리를 한 건지 알아?2022.01.18.
요한의 시선이 내게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요한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괜찮아요. 공작님이 하고 싶은 해도 돼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붉은 눈동자가 나를 떠보는 것처럼 요요하게 빛났다. 평소와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괜히 불안하네.’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건, 요한이 더 미쳐버린 것 같다는 거였다.
“네. 공작님을 멋대로 음해하려고 해서 제가 직접 혼내준 거거든요!”
이상한 플래그가 설까 고민했지만 오락가락할 수는 없었기에 유지하기로 했다.
“단지 그것뿐이니까 이젠 어떻게 해도 돼요. 죽이든 말든 공작님 뜻대로 하세요.”
나는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소를 유지했다.
“에스텔. 넌 내가 무섭지 않아?”
우리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왜 제가 공작님을 무서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요한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요한이 너무 무섭다. 그가 짓밟게 될 내 미래가, 배신당해서 죽게 될까 봐 두렵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요한이 무서운 건 다른 문제였다.
“전 공작님이 무섭지 않아요.”
“다 봤잖아.”
요한이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난 누구보다 사람을 쉽게 짓밟고 죽여버릴 수 있는 인간이야. 수도에서 벌어졌던 살인 사건 얘기까지 다 들었나?”
“…….”
“그걸 알았으면 이야기가 더 쉽겠네.”
그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부인은 내가 감당되겠어?”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랬나요?”
“부인은 참 순진해.”
요한의 입가에 스민 미소가 짙어졌다.
“그런 행동에는 이유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결과지. 추악한 악행의 이유를 찾으면 안 돼. 그러면 본질이 흐려지니까.”
요한은 스스로를 악인으로 묘사하며 매도했다.
“적절한 이유가 있었다면 다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가? 그 이유가 진실인지는 믿을 수 있겠어?”
요한이 일부러 힘을 주어 안톤의 머리를 툭툭 발로 찼다.
“내가 이렇게 사람을 다루는 걸 눈앞에서 봤는데도?”
신사처럼 우아하고 고고한 분위기가 더 잔혹스럽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공작님이 무섭지 않으면요?”
“왜 이게 무섭지 않을까.”
언뜻 듣기에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부인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멍청한 것도 아닐 텐데.”
요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심연처럼 깊은 붉은빛이 진득하게 나를 담았다.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나는 요한이 생각하는 것만큼 이타적이거나 좋은, 경계심 많고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가 왜 안 중요하지?’
리베르탄에서 이유 없는 변덕에 휘둘려 학대당했던 나로서는 요한의 말이 공감 가지 않았다. 세상이 오로지 결과로만 구성되어 있는 건 아니잖아. 무엇보다 나는 그리 동정심이 많지 않았다.
‘동정심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나 부리는 거야.’
지금 내 인생에는 일말의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타인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특히나 저런 쓰레기를 위한 자리는 더더욱.
“후회하기 전에 잘 생각해. 네가 그렇게 나서서 옹호해 줄 만큼, 네 남편이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거든. 오히려 끔찍한 사람에 가깝지.”
미안한데, 알고 있어.
“그러면요?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일로 공작님을 미워하기라도 해야 하나요?”
요한이 턱을 꽉 깨물었다. 남성적인 목울대가 꿈틀거리는 걸 보며, 나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공작님께서 그렇게나 끔찍한 사람이라면 이런 경고 같은 걸 해주는 이유가 뭔가요?”
“그런 식으로 널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걸요.”
요한의 얼굴에서 형식적으로나마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또 잘못한 건 아니겠지?’
원작에서 내가 본격적으로 몰락하게 된 시점이 바로 요한에게 사랑 고백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전에도 에스텔은 꾸준히 요한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말을 많이 하곤 했다. 정확히, 사랑 고백을 하지 않았을 뿐. 그러니 이 정도 애정 표현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에 들지 않을까.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묘한 압박감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말도 바꾸지도 않았다.
“공작님 입장에서 제가 이해가 가지 않고, 어리석어 보인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
“그게 제 진심이니까요.”
괜히 두려워서 속으로 떨고 있던 나를 보며, 요한이 큰 손으로 제 눈가를 덮으며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웃는 거야?’
요한에 대해서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참 동안 큭큭거리며 웃던 요한이 나를 보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부인이 얼마나 위험한 소리를 한 건지 알아?”
“제가요?”
난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정도의 말만 한 것 같은데.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역시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
요한은 아무 설명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숨이 끊어질 듯 말 듯한 안톤을 바라보았다. 정말 엑스트라의 죽음이란 참 무가치하구나.
“저건 숨 붙여 보내도록 할게.”
그 말에 마음이 좀 놓였다. 아무리 그래도 내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진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요한의 마음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야.’
어떤 부분에서 마음이 풀린 건지는 조금도 모르겠지만.
‘참 이상해.’
왜 저렇게 요한이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모르겠다. 안톤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상황을 포착한 요한이 안톤의 목울대를 짓밟았다. 덕분에 숨이 끊어지는 소리만이 남았다.
“대신 이딴 벌레를 끝까지 살려둘 순 없어. 치료하는 건 당연히 안 되고.”
그건 결국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감히 내 부인을 해치려 했으니까.”
하지만 그걸로도 나는 상관없었다.
“그건 공작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해 주세요.”
“아니. 부인의 의견에 따를게.”
뭐라고?
“부인에게 해를 가하려 한 놈이니,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마땅하지.”
요한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의 그에게서는 절제된 광기와 폭력이 느껴졌다.
“어떻게 죽여줄까?”
하지만 말 자체는 나를 존중하려는 듯해 보이기도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직 살아 있으니 고문하고 싶다면 명령해도 좋아.”
“저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해야 요한이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다.
“저는 더 이상 안톤을 보고 싶지 않아요. 이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요.”
“원래 이런 요구가 가장 어려운 법인데.”
요한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부인은 깔끔한 죽음을 원할 거 같네.”
다행히 요한은 내 말을 잘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내 부인이 원하는 대로.”
나를 향해 기울어지는 달콤한 목소리. 그 순간, 꿈틀거리던 안톤의 몸이 돌연 퍼드득거리다 사라졌다. 짙은 피가 근처의 요한을 비롯해 근처로 튀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볼 새도 없었다. 너무 놀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람이, 이렇게 금방 사라질 수가 있구나. 비릿한 피 냄새가 닿자 몸이 인식도 못 한 충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요한은 제 몸을 적신 피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볼 위에 튄 피를 느릿하게 닦았다.
“아마도 고통 없이 갔을 거야. 한 번도 저렇게 죽어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지만.”
남은 피로 뒤덮인, 요한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내게 원하는 대로 말해. 나머지는 내가 다 할 테니까.”
미안한데, 난 저런 걸 원한 적은 없어. *** 요한은 나를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바깥으로 나가자 지독한 피 냄새에서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건, 안톤의 시체가 사라지는 정도였는데.’
잔학무도하다고 듣기는 했어도 이런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할 줄 몰랐다. 선선한 바깥바람을 맞으면서도 안톤의 죽음이 생생히 생각났다.
‘밤에 악몽을 꾸지는 않겠지?’
다행인 점은 난 원래 꿈을 잘 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한번 잠들기 시작하면 누가 깨워도 못 일어날 만큼 깊게 잠들기까지 했다.
‘난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이 한결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요한?”
한창 나를 데려가던 요한은 어느새 멈춰 계단 앞에 서 있기만 했다.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
잠시 멈칫해 있던 그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아니야.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상한 생각?”
“바로 이거.”
마주 보고 있던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를 다 감쌀 정도로 큰 체구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들어오자마자 부인을 안아줬어야 했는데.”
“…….”
“저딴 쓰레기 청소한다고 부인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네.”
무서운 와중에도 이상하게 안정감이 생겼다.
“많이 무서웠지?”
내 등을 토닥이는 요한의 손.
“괜찮아요. 공작님께서 바로 와줬으니까요. 그리고 이거.”
나는 요한에게 내 손목을 보여주었다. 안톤이 나를 강제로 끌고 가려 했을 때, 이 붉은 흔적이 살짝 뜨거워지며 나를 보호했다.
“그동안은 공작님의 흔적이 절 지켜줬거든요.”
잠시 묘한 시선으로 내 손목을 보던 요한이 씩 웃었다.
“그 보호 마법, 부인이 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어야 작동하는 건데.”
“네?”
“역시 날 믿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런 간단한 마법에 그런 비밀이 있었는지 몰랐다.
‘요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들켰잖아.’
여태 내가 하던 소리를 증명할 수 있어서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속마음이 그대로 까발려졌다는 느낌이 들어서 부끄러웠다. 쑥스러워서인지 볼이 뜨거워졌다.
‘아닌가?’
뜨겁다고 생각하고 나니 머리도 좀 어지러워졌다.
‘안톤 일이 생각보다 더 힘들었나 보네.’
원래 나는 눈물을 많이 흘리거나 힘든 일을 겪으면, 갑자기 열이 날 때가 있었다. 특히 단검으로 위협받기까지 해서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내 방.”
“네?”
“부인이 걱정돼서 안 되겠어. 앞으로는 내 방에서 부인을 재우려고.”
요한을 보고 있던 눈이 커졌다.
‘이제는 잘 때도 마음 편히 못 자게 생겼잖아!’
요한이 잘 때 나를 계속 방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의 문제가 있었다. 요한을 곁에 두고 있으면 의식돼서 편하지가 않았다.
“걱정 마. 부인의 방은 따로 있어. 잘 때만 같이 있는 거야.”
잘 때만 같이 있는 게 문제인데!
“매일 밤 같이 자는 거예요?”
“왜, 부인은 나랑 같이 자는 게 싫어?”
“꼭 그런 건 아닌데요…….”
“꼭 그럴 것 같은 반응인데?”
하여튼, 예리하긴.
“아니면 그 새끼한테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요한이 무릎을 굽혀, 나와 어느 정도 시선을 맞춰줬다. 갑작스럽게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져서 나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별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는데요.”
“부인의 가문에 대해서도?”
“리베르탄 공작가에 대해 듣기는 했죠.”
어차피 밖에서 다 들어놓고서. 속으로 투덜거린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하는 얘기는 하나도 안 믿거든요.”
“부인은 맨날 걱정하지 말래.”
“하지만 정말 걱정하실 필요가 없는걸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귀로 들었다고 충격받을 일은 없으니까. 그런 충격은 이미 원작을 떠올릴 때 충분히 받았다.
“제가 들은 건 리베르탄 공작가에 빚을 씌운 범인이 남편이라는 이야기였어요.”
그 순간, 요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래서 저는 왜 그 빚을 탕감하는 조건으로 절 데려왔는지 생각해 봤어요. 그때 전에 저한테 해 주셨던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어차피 요한은 복수를 위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도 괜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배시시 웃었다.
“저한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얘기해 주셨잖아요.”
“…….”
“그래서 그걸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어요.”
내 손을 쥔 그의 큰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다소 혼란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안톤이 죽은 흔적을 치우기 위해서인지 블란쳇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주변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내가 아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페트리샤 길리테 남작 부인.’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게 올려서 단정하게 묶은 흑갈색 머리카락, 차가운 청록색 눈동자에 석고상처럼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얼굴. 가만히 서 있는 자세에서도 그 깐깐하고 엄격한 태도가 느껴졌다.
‘이 블란쳇 공작가의 하녀장.’
원작에서는 집 안에서 나를 왕따시켜 괴롭히던 시모 역할을 하던 여자. 언제 한 번 만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피곤한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에리히보다 더 피곤한 상대야.’
에리히는 요한의 보좌관이라 자주 보지 않지만, 페트리샤는 이 집의 하녀장이라 안주인인 나와는 시도 때도 없이 부딪치는 상대였다. 심지어 사정이 꽤 나왔던 에리히와 달리 페트리샤는 과거사가 그리 밝혀지지 않아 상대하기도 어려웠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블란쳇 공작가의 하녀장 페트리샤 길리테라 합니다. 그간은 정신이 없어 미처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천천히 걸어온 페트리샤가 내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 불찰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
방금 전보다 시야가 더 흐릿하게 뭉개졌다.
‘첫 만남부터 이렇게 안 좋은 모습 보여주면 안 되는데.’
나는 머리에서 오른 열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나를 붙잡고 있던 요한이 급히 끌어안았다.
“부인. 왜 아까부터 몸에 열이-”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시야 속에서 당황해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충격받은 듯한 요한의 눈동자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