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내가 많이 늦었지?2022.01.14.
안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쳤다.
“무슨 그런-!”
“어리석어 보일 수 있지만, 그가 악한 인간이라고 해도 나는 내가 본 공작님의 모습을 한 번 더 믿고 싶어요.”
나는 정색하며 주변에 방어할 만한 무언가를 찾았다. 놀랍게도 침대에 있는 베개밖에 없었다.
“공작님께서 무조건 선한 사람은 아니겠죠. 하지만 내가 아는 공작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리베르탄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아가씨를 애타게 찾으신다고 해도 말입니까?”
차분한 내 대응에 안톤이 얼굴을 징그러울 정도로 일그러뜨렸다.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결혼이니, 저를 이해해 주실 거예요.”
결국 안톤이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그 남자가 네 부모를 어떻게 했는지 알기나 해? 바로-”
“듣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남편의 이야기는 내가 직접 들을 거예요. 그전까지 내 남편을 깎아내리는 사람의 말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솔직히 너무 초조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 멍청한 계집애가.”
그러자 안톤이 섬뜩하게 이를 갈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가씨 대접 좀 해줬더니 상황 파악이 안 돼?”
결국 그가 단검으로 위협하며, 내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윽, 이건.”
그때 안톤은 마치 불에 댄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실제로 안톤은 손에 화상을 입었다.
‘정말로……?’
안톤이 마치 배신을 당한 듯 윽박질렀다.
“길거리 고아 데려다 먹여주고 딸 대접해 줬더니, 감히 리베르탄 공작가를 배신해!”
번들거리는 갈색 눈동자가 확 가까워졌다. 무섭기는 한 지 다시 내 몸에 손을 대지는 못했다.
“잔말 말고 따라와!”
“싫-”
“죽여버린다!”
안톤이 나를 향해 단검을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으드득, 까득. 단검을 휘두르려던 손이 기형적으로 꺾였다.
“끄아아악-!”
핏줄이 다 터진 벌건 눈동자에 고통이 서렸다. 안톤은 게거품을 물며 바닥을 굴렀다. 던져진 검이 날아가 바닥에 퍽 꽂혔다. 이윽고 들어온 남자의 검은 구두가 칼날을 짓밟아 눌렀다. 단단한 강철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 직! 세상이 일순 고요해졌다. 요한이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악마처럼 근사하고 아름다운 남자. 나는 겨우 입을 떼어 그를 불렀다.
“……공작님?”
요한은 검은 정장에,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어두운 방의 분위기에 묻힐 법한데도 그가 등장한 순간 세상에는 오로지 요한밖에 없는 것 같았다. 요한이 나를 보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부인.”
익숙한 머스크우드 향에 진한 혈향이 훅 끼쳐왔다. 그는 밟고 있는 부러진 날 같은 건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오연한 시선은 오로지 나만을 향했다. 벅찰 정도로 깊은 광기가 느껴지는 눈빛, 요한이 나를 다독이듯 다정하게 물었다.
“내가 많이 늦었지?”
시선이 비켜 가 바닥을 구르는 안톤을 향했다. 요한은 벌레를 보듯 경멸을 담아 우아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같잖은 쥐새끼도 하나 놓치고.”
바닥에 깔려 있던 단검의 잔해들이 검은 연기가 되어 스러졌다. 서서히 걸어오는 요한에게선 강렬한 광기가 느껴졌다. 안톤의 광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요한의 광기는 끝을 모를 듯 깊어서, 사람을 홀릴 듯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이딴 쥐새끼가 내 아내를 해치려 들었다니.”
그가 발을 살짝 틀어 피가 흐르는 안톤의 손목을 가볍게 짓눌렀다. 하지만 방금 전 단검도 망가뜨렸던 힘이었다. 안톤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발버둥 쳤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
“주제도 모르고.”
꾸욱. 구둣발이 손목을 느긋하게 눌렀다. 이런 장면은 원작에서 나온 적 없었다. 애초에 안톤은 에스텔을 납치했으나 처벌받지 않고 깔끔하게 죽었다. 그게 요한이 내린 최상의 상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목적에 따라 움직여주었으니 상을 준 것이었는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든 건지 그의 눈빛은 아주 분노와 살기로 가득해 보였다.
“알아서 닥칠 줄도 모르고.”
안톤의 손목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안톤은 이를 악다물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요한이 나른한 어조로 읊조렸다.
“풀어둔 쥐새끼 주제에 여전히 제 위치를 모르는 게 아주 재밌어.”
“끄- 끄윽! 제발-!”
“걱정 마. 넌 쉽게 안 죽일 테니.”
요한은 그 모습을 보며 희게 웃었다.
“내 부인을 건드린 몫은 다 감당해야 하니까.”
여유로운 그 모습은 기묘하게도 그 이면의 거친 야만성을 느끼게 했다. 무엇이든 손쉽게 부수고, 파괴할 것 같은 잔혹한 폭력성. 안톤은 그런 요한에게 기가 죽지 않고 독기 서린 눈으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그 여자를- 건드린- 몫-? 끄윽.”
나였으면 진작 항복했다. 그 잔인한 광경에 기가 질렸다. 그리고 아마 안톤이 말하려던 건, 원수의 딸인 에스텔을 위하는 요한이 이상하다는 소리였겠지. 첩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정보였으니까.
‘진짜 이상하긴 해.’
솔직히 순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톤이 죽는 건 확실했다. 요한이 쉽게 안 죽인다니 과다출혈로 죽진 않아도, 정말 고통스럽게 죽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 사람이 죽는 걸 목격할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내 눈으로는 말이야.’
물론 뒤에서는 어떻게 죽는지 상관없었다.
“잠시만요, 공작님.”
어느새 나도 모르게 방패 삼아 휘두르려 했던 베개를 옆에 치우고, 요한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나는 두 손으로 요한의 한 손을 잡아당겼다.
“바로 죽이면 안 돼요.”
“내버려 두라고?”
요한의 적안이 알 수 없는 빛으로 물들었다.
‘대신 위험해지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요한은 내 손을 꽉 붙잡으며 갑작스럽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설마 저딴 것에게 동정심이 생겼어?”
응?
“아니면, 드디어 내가 무서워졌거나.”
*** 계획이 틀어졌다.
“그래서, 지금 그놈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죄송합니다.”
“한동안 내가 집안 관리를 느슨하게 한 모양이군.”
급하게 보고를 전달한 하인이 요한의 분노를 눈치채고 고개를 숙였다.
“이딴 사태가 벌어지게 해놓고도, 멀쩡히 고개를 들 생각이나 하다니.”
분명 취소를 명령했던 계획이 시행되었다.
‘페트리샤 짓이로군.’
요한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아랫사람을 두다 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그러니 요한에게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다. 익숙해야 했다.
‘에스텔이 위험하다.’
그 당연한 명제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비참한 기분을 선사했다.
‘하필 위치가…….’
공작저 안에 있었다면, 바로 에스텔을 구하러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는 에리히를 임무로 보낸 뒤 밤늦게 황궁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황궁에서 흑마법을 쓰면 부작용이 온다.’
흑마법은 반드시 대가와 반작용을 가지고 온다. 특히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실행하면 폭주할 수도 있었다. 요한의 머리는 치밀하게 흑마법의 부작용과 폭주가 어느 정도로 심각할지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마법으로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에스텔. 참 알기 어려운 여자였다. 단순하고, 파악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순진하게 매달려서 가지고 놀기 좋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한순간의 착각에 불과했다.
‘은근히 내 손길을 피하지.’
언제는 그가 좋다고 하더니 이럴 때는 피했다. 물론 그 모습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포식자의 눈치를 보는 토끼 같아서 귀엽기는 했다. 하지만 알다가도 모를 부인인 건 여전했다. 의심스럽고, 그래서 시선을 빼앗기면 너무 사랑스럽고.
‘내가 왜 이러지.’
이 상황에 대한 전조는 분명히 있었다. 어느 정도 자각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모든 게 복수를 위해서 아니었나?’
그래서 그 여자를 완전히 망가뜨려 버리기로 했는데.
‘가짜 백합 프로젝트.’
안톤을 골랐던 것은 에스텔이 이 저택에 오기 전이었다. 사람은 신변에 큰 위협을 당하게 되면 근처의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는 법이다. 반대로 계책대로 도망치다가 잡히어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일단 안톤을 찾아보고 있지만 여차하면 공작 부인의 처소에…….”
에스텔이 계획대로 위험해졌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요한은 몹시 불안해졌다. 이 마음의 근원이 복수가 아닌 것 같았다. 안톤이 에스텔을 노리거나,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탈출하게 해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려고도 했지만.
‘전 괜찮아요.’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슬프게 물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저택에 도착한 그가 하인들을 불렀다.
“그 새끼는?”
하인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열심히 찾기는 했으나,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아 지금 공작 부인의 처소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요한의 입가가 경직되었다.
‘괜히 이 저택에서 오래 일했던 것은 아니라는 건가.’
저택 전체를 수색하고 있는데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잘 숨어서 도망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직 신호는 없군.’
이 저택은 요한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디 있든 금방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이번 일도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그때였다. [침입자.] 에스텔의 방 부근에서 느껴지는 마법 결계였다. 이성적인 사고도 없이 안톤이 침입했다는 사실에 당장 그곳으로 이동했다.
‘에스텔이 벌써 진실을 알아선 안 돼.’
그건 곤란하니까.
‘왜? 넌 원래 그 여자가 무너지길 바랐잖아.’
하지만 속으로는 자꾸 에스텔이 진실 같은 건 모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공작님.’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바로 문 건너편에서, 에스텔이 자신을 변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에스텔의 목소리가 맞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그게 사실인지는 제 남편인 공작님과 만나서 대화하고 확인할 거니까요.”
멍청한 소리.
“어리석어 보일 수 있지만, 그가 악한 인간이라고 해도 나는 내가 본 공작님의 모습을 한 번 더 믿고 싶어요.”
본인의 처지도 모르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공작님께서 무조건 선한 사람은 아니겠죠. 하지만 내가 아는 공작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에스텔에게는 요한을 변호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요한이 형식적인 에스텔의 남편이기 때문일 뿐이다. 멍청한 여자. 제 목에 당장 칼이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도 아둔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공작님의 이야기는 내가 직접 들을 거예요. 난 내 남편을 깎아내리는 사람의 말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요한은 당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들어간 방에서 안톤이 에스텔에게 단검을 겨눈 그 장면을 본 순간.
‘저딴 게.’
거슬렸든 어떻든, 그는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광경을 원한 건 아니었다. 저딴 더러운 손이 에스텔에게 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 순간은 정말, 에스텔이 그의 가짜 아내라는 생각 같은 건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 에스텔이 요한 자신의 잔인한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지 모른다는 계산 같은 건 추호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뒤늦게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에스텔의 반응은 그가 예상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 요한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이건 심각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징조였다. 동정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안톤은 나를 해치려고까지 했던 놈이다. 그런 놈에게 주기엔 내 동정은 비싸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아니라고?”
요한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내 부정이 어느 쪽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다. 그러면 허튼 생각을 안 하겠지. 겨우 용기를 내서, 핏속에 잠긴 듯한 안톤을 다시 바라보았다.
‘원작에서 나는 안톤과 함께 도망쳤어.’
심지어 요한의 잔인한 행적을 보며, 사람을 꼭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필요는 없지 않았냐는 소리까지도 했다. 요한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경멸하기 시작했다. 제 부모가 저지른 짓조차 모르고 고결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역겨워서. 저 고결한 면모가 제 원수가 이룩하고 싶었던 성과였을 테니까. 요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저거, 들어보겠다는 뜻이겠지? 그때 갑자기 뒹굴던 안톤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지금 리베르탄은 반-!”
하는 순간 나서서 내가 그의 뺨을 때렸다. 짝-! 그리고 구두로 그의 정강이를 내려쳤다. 퍽!
“내 남편을 모욕한 벌은 내 몫이야.”
한 대 때리고 두 대 때렸다.
‘이 정도면 되겠지?’
가만히 있는 상대를 때렸을 뿐인데, 내 손이 너무 여렸던 탓에 오히려 붉게 부어오르며 아프기만 했다.
‘앞으론 손으로 안 때려야지.’
최소한 도구를 쓰던가 해야겠다. 인간은 도구를 쓰는 존재니까. 나는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안톤을 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를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공작님을 네 마음대로 모욕하거나 깎아내리지 마.”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안톤도 자신을 잘근잘근 밟는 날 멍하니 보았다. 왠지 내 옆얼굴에 집착 어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요한의 계산 밖의 움직임인 것 같기는 했다. 그래서 더욱 기운을 내서 한참 애써 안톤을 때리고 밟았다. 이 한 번의 발걸음이 내 인생을 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심히 할수록 손은 더욱 붉게 터져가고, 발목도 점점 아파 왔다.
‘내 몸, 왜 이렇게 유리 몸이야.’
어떻게 원작의 그 험난한 고생을 다 견뎌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좀 이상하긴 하다.’
한참 낑낑거리던 나는 요한을 살며시 돌아보았다.
“공작님?”
어쩐지 요한의 표정이 평소에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기이할 정도로 차갑고도 무서운, 집착이 어린 시선.
‘내가 뭔가 잘못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