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무의식적 질투2022.01.11.
요한은 에리히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스피어 자작의 자수정 목걸이를 부인이 알고 있었던 만큼 리베르탄 공작가와 연결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더 실망시키는 일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리베르탄 가신 출신 에리히는 블란쳇 소속 중 가장 리베르탄의 비리를 잘 찾았다. 하지만 중요한 임무를 듣는 와중에도 에리히에게는 곰돌이 쿠키만 보였다.
‘그 가짜와 관련되어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깔끔한 요한의 집무실에 저런 귀여운 모양의 쿠키가 있을 이유가 없으니. 불현듯 그 위로 여자 장신구를 보던 요한이 떠올랐다.
‘주인님께선 완벽히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지만…….’
갑자기 에리히는 그 모든 게 가짜를 걱정하고 보호하기 위해서처럼 느껴졌다.
“실망시켜 드리는 일 없을 겁니다.”
그리고 요한이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 가짜 백합 프로젝트의 A안을 폐기한다.”
“예?”
백합은 리베르탄 공작가의 상징이다. 그중 가짜 백합은 에스텔을 상징했다. 에리히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A안은 가짜를 미끼로 첩자까지 흔들어볼 수 있는 좋은 계획입니다. 그걸 위해서 일부러 리베르탄의 쥐새끼를 살려둔 거 아니었습니까?”
그중 A안은 리베르탄의 첩자를 이용해 에스텔을 시험하는 방법이었다. 에스텔에게 신체적인 위협을 주면서 불안감과 의존성을 높이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
“그러면 이제껏 살려둔 첩자를 쓸 다른 방법까지 해야 할 텐데요. 이유가 있으십니까?”
“벌써 첩자를 움직이게 하기엔 위험하다.”
“설마…… 가짜가 위험에 처하는 게 문제라는 겁니까?”
에리히의 목소리가 감정에 반응하여 커졌다. 에리히 자신이 흔들렸던 것처럼 그의 주군도 그 여자의 술수에 넘어갔다면.
“그렇게까지 귀하게 대할 필요 없는 여자입니다. 그 여자의 가치라고 해봐야…….”
문득 에리히의 머릿속에 창가에 서서 울고 있던 에스텔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부터 네가 내 말에 반문했지?”
그 순간 에리히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한낱 여자에게 홀려 주군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에리히가 무릎을 꿇고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요한의 냉혹한 반응은 바뀌지 않았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A안은 취소한다. 페트리샤에게도 얘기해.”
그제야 에리히는 주인의 말에 더 말하지 않고 복종했다.
“따르겠습니다.”
충실한 가신은 주인에게 조언할 뿐, 그 결정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 에리히는 요한의 집무실을 떠났다. 자세히 임무를 파악하자, 기간이 보였다.
‘연결점을 다 찾을 때까지 저택에 돌아오지 못하겠군.’
그러고 보면 마치 그를 이 저택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잘못 생각하면 주군께서 나를 질투해서 내보내려는 것 같기도.’
하지만 요한의 얼굴에선 그런 감정의 편린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에리히가 본 것은 그가 줄곧 모셔왔던 복수귀 블란쳇 공작의 모습이다. 에리히는 방금까지 봤던 의문을 애써 부정했다.
‘나는 몰라도, 주군께서 흔들릴 리 없다.’
블란쳇 공작가의 모두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요한을 신처럼 모시며 숭배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요한은 완벽했다. 빼어난 외모, 타고난 전투 실력, 뛰어난 두뇌. 모든 이의 위에서 지배할 것 같은 냉혹한 카리스마, 진흙탕에서도 홀로 고고한 그 자세까지. 그는 타고난 지배자였다. 그래서 모두가 블란쳇 공작가가 몰락했다는 걸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몰려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요한이라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주리라 확신했으니까. 그리고 요한은 그들의 헌신에 부응하듯 추악한 리베르탄을 완전히 몰락시켰다. 한편 요한은 에리히의 기척이 사라진 걸 느끼자마자 고개를 돌려 작은 모형을 바라보았다. 리베르탄 공작저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한 작은 모형. 정중앙에 있는 리베르탄을 상징하는 백합 문장까지 새겨져 있었다. 여태까지 이 모형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요한의 권태로운 시선이 리베르탄 공작저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드는 방을 향했다. 공작가에서 사랑받는 공주님을 위한 방. 바로 에스텔이 쓰고 있었다던 그 방이다. 그는 나른하고도 무감정하게 그 방을 바라보다가, 희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그 방을 톡, 톡 두드렸다. 느릿한 박자로 방을 건드리는 소리가 적막한 방에 울렸다.
‘이건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눈물이 난 거예요.’
‘원래 제가 눈물이 많은 편이라 별거 아닌 일로 눈물이 잘 나요.’
에리히에게 심한 말을 듣고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둘러대던 에스텔.
‘여기서 저를 그렇게까지 미워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해도 그렇게 억울하지 않아요.’
공작 부인의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녀장에게 정식 인사도 받지 못한 주제에 에스텔은 화조차 내지 않았다.
‘그거야 여기서 저를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요한은 그 얼굴이 더 슬퍼 보였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좋게 보이겠어요. 저라도 저 같은 게 공작 부인으로 들어오면 마음에 들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요한은 계획을 변경했다. 어차피 에스텔은 복수의 마지막 단계다. 직접 악행을 저지른 리베르탄 공작 부부도 처리하지 않았는데 벌써 급히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에스텔은 이미 날 신뢰하고 있다.’
물론 정원에 가지고 왔던 그 흑마법 책은 아주 기이했지만. 순간 요한은 에스텔 생각만 하는 스스로를 자각했다.
“재밌네.”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검지가 멈췄다.
“아주 재밌어.”
그 순간 손가락이 모형의 방을 완전히 뭉갰다.
***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침대에 픽 쓰러졌다.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했으니 당연하지.’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지만, 요한에게 휘둘려 기껏 도서관에서 가져왔던 흑마법 책을 정원에 그대로 두고 왔다. 그래서 정원에 한 번 더 갔다 와야 했다.
‘요한도 내가 빌린 책을 봤겠지?’
괜한 의심을 산 건 아닐지 걱정된다.
‘차라리 빌리지 말 걸 그랬나.’
이불을 박차며 발만 동동 굴리다가 다시 베개를 꼭 끌어안고 누웠다. 요한이 내 손목에 남긴 붉은 흔적이 보였다. 내가 그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집착이 느껴지는 흔적. 순간 요한의 이가 닿았던 아찔한 순간까지 스쳐 지나갔다. 얼굴이 확 붉어져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난리 쳤다.
‘진짜 미친 거 같아!’
아무리 나를 유혹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래도 아무런 마음도 없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나?
‘……그러니까 흑막인 거겠지.’
복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남자, 그게 요한 블란쳇이다.
‘오늘 밤에도 오려나?’
어젯밤에 가운만 입고 누워 있던 그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그렇게 밝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그 미려한 선의 몸은 정말…….
-조심해.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잘못을 들킨 어린애처럼 놀라 베개에서 얼굴을 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위험한 게 가고 있다.
하지만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였다.
‘남자 목소리?’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명이서 하는 것처럼 겹쳐진 목소리다. 이 목소리를, 나는 서재에서도 들은 것 같았다.
‘창밖에서 나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문을 바라보았다. 똑똑똑똑. 베티와는 전혀 다르게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선득해진 가슴에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벌컥- 바깥에 있던 누군가가 멋대로 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였다. 굉장히 평범하고 순박하게 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손에 시퍼런 단검을 쥐고 있었다. 남자가 내게 고개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저는 안톤이라고 합니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받아본 적 없는 대접에 우스워졌다.
“아,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우리 리베르탄 공작가의 에스텔 아가씨 아닙니까.”
“……맞기는 하죠. 이곳에는 대체 무슨 일인가요?”
“리베르탄 공작님의 지령을 받고 아가씨를 구하러 왔습니다.”
이제 원작 내용이 기억났다.
‘리베르탄의 첩자 에피소드가 있었지.’
그때 에스텔은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자기를 데리러 왔다는 얘기에 크게 흔들린다. 특히 자신을 학대하던 양부모님이 애타게 에스텔을 그리워한다는 소식에 흑막을 배신하고 도망치려 한다. 원작에 나온 첫 번째 도망이었다.
‘하지만 흑막의 함정이었고.’
그 후 역시 리베르탄의 딸답게 배신자였다며 경멸과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에스텔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요한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으면 돼.’
다행히 나는 리베르탄 공작 부부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아가씨. 그동안 이곳에 갇혀 계시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안톤은 나를 동정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쁜 갈색 눈동자가 희번뜩 나를 훑어내렸다.
“리베르탄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 저를 보내셨습니다.”
“부모님께서 저를요?”
“예. 아가씨를 매우 애타게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그게 아니면 제가 왜 이곳에 왔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진하게 반문했다.
“부모님께서 저를 그리워하실 리가 없는데…….”
“믿기지 않으시면 저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도주로는 확보되어 있습니다. 어서 가실까요?”
안톤이 위협적인 단검을 들고 내게 걸어왔다.
‘이거, 따라가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일 것 같은데?’
거절했을 때 당장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에 비해 안톤은 무기까지 들고 있었다.
‘요한이 의도한 상황이라면…….’
여기서 내가 거절해서 다치는 것까지도 그의 계획일 것이다. 사람은 약해질수록 의존적으로 변하니까.
“죄송하지만, 제가 아직 상황을 잘 모르겠어서요.”
나는 상황을 끌 겸 이성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당신이 정말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분인지 믿을 수가 없어요.”
“아! 그럴 수 있겠군요.”
안톤이 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바로 거기에 리베르탄의 문장인 백합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되셨지요? 어서 가셔야 합니다.”
“너무 멀어서 그게 진짜인지 잘 모르겠어요.”
안톤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화내지 않고 수첩을 바닥에 밀어 던졌다.
“리베르탄 공작님께서 제게 주신 물건입니다. 이 험난한 곳에서 간직하느라 무척 힘들었습니다.”
나는 최대한 느리게 수첩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확인하는 척했다. 어차피 진짜인데, 뭐.
“이제 다 확인하셨지요? 지금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당신이 진짜 아버지가 보낸 상대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나는 동요하는 척하며 그에게 질문했다.
“왜 부모님께서 저를 몰래 탈출시키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건 이 저택을 벗어나면 차분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도망이 먼저입니다.”
“이 결혼은 아버지께서 꼭 지켜야 한다고 명령하신 일이에요. 설명도 듣지 않고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어요.”
안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하…… 진짜.”
“답답한 건 이해하지만 여기서 제가 도망치면 귀족들 사이에서 리베르탄 공작가가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걸요.”
나는 유순하게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러자 안톤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반응을 보니, 인내심이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시간을 얼마나 벌 수 있을까?’
버티고 있다 보면 그사이에 나를 구해주러 올 사람이 오기는 할까?
‘요한.’
나를 위험에 몰아넣은 남자인데도, 나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지켜주고, 책임질 것처럼 말했던 남자.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데려올 가치가 있었다곤 생각 안 해?’
이게 바로 요한이 말했던 내 가치겠지. 그러니까 이 상황을, 요한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 만든 거다. 공포심과 함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결국, 원작의 내용대로였다. 요한의 암묵적 묵인이 아니었다면, 첩자가 여기까지 올 수도 없을 거다. 순간 그가 내 손목에 남긴 붉은 흔적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붉은 흔적이 날 지켜줄 거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귀족들 사이에서 오해를 사는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면요?”
“그건…….”
안톤이 ‘반역죄’ 얘기를 꺼내려 고민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도망치는 데 협조하지 않을까 갈등하는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어느 쪽이어도 안 도망칠 거다.
“이미 아가씨의 결혼은 무의미해졌습니다. 바로 블란쳇 공작이 리베르탄 공작가에 빚을 씌운 범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가씨라고 안전한 상황은 아닙니다. 블란쳇 공작이 그동안 벌어지던 살해 사건들의 범인이었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아가씨도 죽습니다.”
다행히 내가 아는 얘기다. 흑막인 요한은 어린 누이와 부모님을 무참히 죽인 원수들을 모조리 잔인하게 죽였다. 그것도 모자라 경고하기 위해서 시체를 전시해 놓기까지 했다.
‘이건 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쓰레기라고 해야 하나.’
그가 복수한 자 중 죄를 짓지 않은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게 제일 안타까웠다.
‘언젠가 나는 요한에게 살해당하겠지.’
요한은 내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리베르탄 공작가를 향한 원한을 멈추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당장 나한테 위험한 건 단검을 들고 흥분한 저 남자였다. 내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했다간, 해를 끼치고도 남을 놈이었다.
“이제 아가씨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해했어요.”
그때 내가 디디고 있던 바닥에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블란쳇 공작님께서 저희 가문에 빚을 씌운 사람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수도 인근에서 벌어지던 살인 사건들의 범인이기도 하고요.”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다. 주변에 요한이 가까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좋아.’
요한이 가까이에 있다면, 해볼 만한 도박이 있었다.
‘검은 무섭지만…….’
안톤의 손에 들린 칼날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그래도 요한이 때맞춰 들어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무사할 수 있을 거다. 다치더라도 약간의 아픔만 감수하면 흑막에게 아주 잘 보일 기회를 얻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따라가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게 사실인지는 제 남편인 공작님과 만나서 대화하고 확인할 거니까요.”
안톤의 눈빛이 돌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