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 것2022.01.07.
“다른 사람 냄새요?”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했다.
‘왜 목소리에서 적의가 느껴지지?’
그리고 그 적의를 품은 상대는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왠지 붉은 자국이 남은 손목이 화끈거려서 쓱 빼내며 어색하게 물었다.
“저한테 그렇게 이상한 냄새가 나요?”
“원래 내가 체취에 민감하거든.”
설핏 내 손목에 시선을 두던 요한이 나와 눈을 맞췄다.
“그래서, 누구야?”
답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 묘하게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요한은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
“……서재에서 블로뉴 남작님을 뵙고 오긴 했어요. 그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요한의 눈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가 조금 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에리히를 만난 소감은?”
이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원작에서 에스텔은 요한한테 부하들에 대해 일러바치지.’
아무래도 원작의 에스텔은 결혼 첫날부터 잘 대해줬던 남편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당연히 이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아는 내용이 나오니까 마음이 한결 편하네.’
“블로뉴 남작님께서는 아주 좋은 분이셨어요. 처음에는 제가 서재에 왔다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같이 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정도로 친해지기도 했어요.”
요한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한 듯 미세하게 올라갔다.
“무슨 책 얘기를 했길래?”
“전반적인 책 얘기? 큰 얘기를 한 것 같진 않았어요.”
“아무튼 꽤 재밌었나 보네.”
요한이 입가에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쩐지 평소와 달리 입술 끝부분이 조금 비틀려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아! 부하와 내가 친해지는 게 불만이구나.’
복수 대상과 부하가 너무 가까워져도 문제일 것 같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벌일 수도 있으니까. 리베르탄에서 자주 듣던 소리라 파악하기 쉬워서 다행이다. 나는 두 손을 저으며 말갛게 웃었다.
“그러고는 별일 없었어요. 일이 있었는지 책을 추천하고 나서 바로 나갔거든요.”
“거짓말.”
요한의 큰 손이 우아하게 내 눈가에 살며시 다가왔다. 그의 엄지가 느긋하게 내 눈가를 훑었다.
“이 눈물 자국은 뭐지?”
“아, 이거요.”
방금 전의 접촉 때문인지 사소한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상기된 볼을 감싸며 재빨리 오해를 풀어주었다.
“이건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눈물이 난 거예요.”
에리히와 다툰 건 맞지만, 울게 된 이유는 먼지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 말에 거짓은 없다.
“원래 제가 눈물이 많은 편이라 별거 아닌 일로 눈물이 잘 나요.”
손을 올려 눈가를 만지자, 그가 내 손을 덮듯이 잡아 깍지를 꼈다. 남성적인 손마디가 느껴졌다. 잠시 침묵하던 요한이 꺼낸 말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널 미워하는 게 억울하지 않아?”
절로 눈이 커졌다. 하지만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누가 그렇게 저를 미워하는데요?”
“내 질문 이해하고 있잖아.”
“음. 하지만 정말 잘 모르겠어요.”
나는 요한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저를 그렇게까지 미워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해도 억울하지 않아요.”
“왜?”
“그거야 여기서 저를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요한이 깍지를 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리베르탄의 딸답지 않은 대답인가?’
하지만 솔직히 블란쳇 공작가에 와서 억울하고 힘들었던 일이 너무 없어서 거기까지 지어낼 수는 없었다.
“저는 리베르탄 가문의 친딸도 아니고, 지참금을 가지고 오지도 못했잖아요. 리베르탄 공자가가 블란쳇 공작가에 도움이 되는 친정이지도 않고…….”
새삼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 처지가 실감 났다.
‘난 진짜 쓸모가 없구나.’
아마 복수 대상으로서가 아니었다면 감히 요한과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다.
“그렇다고 제가 개인적으로 사교계에 도움이 되는 인맥이 있다거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더 자세하게 들어가면 아주 처참하다.
‘두 번이나 파혼당한 경력이 흔하지는 않지.’
입양되자마자 예스텔라의 약혼자에게 파혼당하고, 그다음으로 좋은 얘기가 되고 있던 황태자와도 파토 났다.
‘설령 내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 있던 내가 유난히 나빠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좋게 보이겠어요. 저라도 저 같은 게 공작 부인으로 들어오면 마음에 들지 않을 거예요.”
여름철의 바람이 우리 사이를 휩쓸었다. 요한은 내 손을 꼭 쥔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데려올 가치가 있었다곤 생각 안 해?”
“저한테, 그 정도의 가치가요?”
“그래.”
요한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살랑이는 바람 사이로 흐트러지는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부인은 내가 멍청해 보여?”
“아……니요?”
“난 절대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아. 그런 내가 부인을 선택했지.”
햇빛 아래의 남자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가득해 보였다. 그 모습이 순간적으로 넋을 잃고 볼 정도로 근사했다.
“제가 공작님께서 처음으로 한 실패면 어떻게 해요?”
이미 당신은 실패했다. 나한테 당신이 복수할 만한 가치는 없으니까. 나 같은 걸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버린다고 해도, 리베르탄 공작가는 절대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친딸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걸 말할 순 없어.’
이상하게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솔직히 공작님이라고 계속 성공하기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럴 리 없어.”
요한은 남은 한 손으로 내 턱을 잡고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난 실패 같은 거 안 하니까.”
“…….”
“부인이 스스로를 믿지 않는다면, 나를 믿어.”
내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 근처까지 크게 쿵쿵 울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은 오만하지만, 다정하고, 위로가 되었다.
‘왜 원작에서 짝사랑에 빠졌는지 알겠어.’
따듯한 햇살, 피부를 적당히 감싸는 온기, 보는 것만으로 내가 특별해지는 것만 같은 눈빛. 이 모든 게 너무 완벽한 거짓말이다. 가짜라는 걸 아는 나조차도 알면서 넘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전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게요.”
나는 더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든 부인이 힘든 거 있으면 뭐든 얘기해.”
“정말 아무거나요?”
“그래,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요한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테면 부모님을 뵈러 가봐도 좋고.”
“벌써요?”
대다수 귀족 여성은 결혼 이후 한동안은 친정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부인이 가고 싶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지금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감옥에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공작가니까 당장 처형당하진 않았어도.’
최소한 딸인 내가 보러 갈 만한 처지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무엇보다 요한 입장에서 내가 가는 게 좋을 리 없다. 내가 진실을 알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그런데도 말을 했다는 건.’
등골이 오싹해졌다. 흑막은 아무런 목적 없이 일을 벌이지 않는다. 왠지 내가 모르는 사이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 나는 최대한 무해해 보여야 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괜찮아요. 무엇보다 아직 블란쳇 공작가에 잘 적응하지도 못했잖아요.”
“그래도 많이 그리울 텐데?”
붉은 눈동자가 내 속을 꿰뚫어 볼 듯 날카로운 눈빛을 띠었다.
“에이.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
요한이 일어선 내 한쪽 손을 잡아 들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참는 데 익숙해지지 마.”
그가 내 손에 쥐여준 것은 쿠키 봉지였다. 쿠키 봉지를 확인하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요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건 그때 보답.”
아무래도 전에 내가 줬던 쿠키가 많이 인상적이었던가 보다.
“이런 거 챙겨주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요한이 쿠키 봉지를 쥔 내 손가락을 덮어 꼭 쥐게 했다.
“그리고 이건 꼭 혼자 먹어.”
“원래도 남이랑 음식을 같이 먹진 않는데요.”
“그래도 이건 다 부인 혼자서 먹는 걸로 해. 부인 거니까.”
요한의 날카로운 눈꼬리가 사르르 휘며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다시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공작님한테도 주면 안 되나요?”
그러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한테도.”
발끝부터 이상한 기분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쿠키 봉지를 두 손을 쥐었다.
“그, 그러면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그렇게 일어난 나는 정원 나무에서 벗어났다. 너무 도망치는 느낌이 들지 않게 걸었지만 달려서 도망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요한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그래 봐야 입에 발린 말에, 쿠키 하나 받은 거다. 아마 요한이 했던 말은 진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봐야 나한테 복수하려는 계획은 여전할 테니까.
‘내 쿠키, 내 것.’
나는 쿠키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부서질 듯 쥐었다. 우습지만 처음으로 내 것이라는 게 생긴 것만 같았다. 그게 너무 이상해서, 혼자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 리베르탄 공작 부인 로자리아는 손으로 철창을 꽉 쥐었다. 고생 한 번 해본 적 없는 공작 부인에게 감옥 생활은 아주 끔찍했다.
‘언제까지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 거지?’
리베르탄 공작가의 갑작스러운 몰락. 아무리 악한이었어도 그들은 공작가였다. 아무리 반역죄라는 큰 죄명이 붙었더라도, 가문에 돈이 없더라도 최소한 항변할 수 있는 기회는 있어야 했다.
“리베르탄 공작과 공작 부인을 면회 신청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문이 거대한 빚을 지는 동안 믿었던 우방 가문들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유일한 구명줄이던 황제도 그들을 외면했다.
“황제 폐하께서 죄인과의 면담을 거절하셨습니다.”
처형 직전의 재판만 앞둘 때까지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모든 게 지나치게 빨랐다.
‘그래. 이건 마치…….’
그토록 미워하던 블란쳇 공작가가 몰락했을 때와 비슷했다. 누군가 그들의 몰락을 예비해 둔 것처럼 말이다. 입술을 꽉 깨문 로자리아가 리베르탄 공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보, 블란쳇 공작가의 첩자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요? 그 애를 빼내서 온다고 했잖아요.”
블란쳇 공작가에 보낸 첩자가 다 사라졌어도, 딱 하나. 운 좋게 남은 자가 있었다.
“기다려보시오. 일이 그렇게 빨리 해결되겠소.”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돼요? 정말 이러다, 사형당할지도 모르는데.”
로자리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남편을 닦달했다. 에스텔과 만나게만 해 준다면, 죄를 모두 시인하겠다고까지 했건만. 블란쳇 공작은 그들을 비웃듯 아무 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 애를 모르오? 우리 소식만 알면 바로 달려올 걸세.”
“그건 그렇죠. 그래요, 그 애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
로자리아의 머릿속에 멍청한 에스텔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얼마나 사랑해 주든, 괴롭히든 변함없이 그녀의 눈치만 보던 멍청한 입양아.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어.’
요즘 들어 로자리아는 자각하지도 못했던 기억이 불쑥 떠올라 더 답답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감옥에 갇혀서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야.’
에스텔, 그 애만 보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생기게 된다. *** 에리히는 집무실에 도착했다. 요한은 평소처럼 완벽한 차림새로 앉아 일하고 있었다. 요한은 서류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에리히에게 물었다.
“내 부인을 만났나?”
“예. 서재에서 마주쳤습니다.”
“만나본 소감은?”
“예상대로였습니다. 리베르탄에서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철이 없더군요.”
에리히는 자신도 모르게 에스텔을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얼마든지 미워해도 된다고 생각하던 여자에게서 순진무구한 미소를 발견했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있는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어졌다.
‘잠시 흔들린 것뿐이다.’
그래서 에리히는 속에서 움트는 불안을 부정하기 위해 더 세게 말했다. 자신이, 감히 에스텔을 동정했을 리가 없으므로.
“존재만으로 불쾌하더군요. 상대하는 내내 기분 나빠서 참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주인님의 예상대로 계획에 이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듯해 보였습니다.”
요한이 책상 위에 손을 올려 깍지를 꼈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순간순간의 움직임이 묘한 박자를 줘서 보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나?”
“예?”
“자격 없는 부인이라는 소리를 했던데.”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함부로 그런 소리를 지껄인 이유가 뭐지?”
“그건…… 죄송합니다.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에리히는 요한의 질책이 계획을 망칠 뻔했다는 데서 왔다고 여겼다. 그러다 실수로 에스텔이 리베르탄 공작의 몰락을 눈치채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요한은 느릿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새로 줄 임무가 있다. 한동안 블란쳇 공작가를 비우게 될 테니, 굳이 주의할 필요도 없겠지.”
“무슨 임무입니까?”
“렉시어스 폴만과 가스피어 자작이 엮인 고아원을 조사하는 일이다.”
다소 갑작스러운 임무에 에리히가 눈을 크게 떴다.
‘단순 조사라면 내가 갈 필요 없을 텐데?’
중요한 일에는 직접 나서기는 했지만 이번 일은 최측근인 에리히가 갈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니었다. 상당히 급조한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요한의 행동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임무 또한 이유가 있으시겠…….’
그때 에리히는 요한의 집무실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보았다. 곰돌이 모양의 쿠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