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다른 새끼 냄새가 나거든2022.01.04.
창백한 에리히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지금 제가 그 말 몇 마디 했다고 이러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에리히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는지 마지 못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잘못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빨리 내려오십시오.”
아무리 봐도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니면 설마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나?’
하지만 그건 좀 이상했다. 이 창문은 손 좀 미끄러졌다고 떨어질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혹시나 내가 창틀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나 싶어서 다시 한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가 좀 아득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에리히가 다시 ‘지금!’ 하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놀라서 더 떨어지겠다.
‘그런데 에리히가 왜 내 안위를 걱정해 주지?’
에리히 입장에서는, 내가 여기서 떨어져 죽기를 바라야 하는 거 아닌가. 손쉽게 원수를 처리할 수 있을 테니.
‘설마 나를 더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서?’
그 이유는 확실히 가능성 있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거, 나는 눈물을 마저 닦으며 그에게 물어보았다.
“……왜요?”
“왜, 냐니.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바랐던 일 아니었어요?”
그러자 에리히의 청회색 눈동자가 답지 않게 공허해졌다.
“……그건.”
잠시 침묵하던 에리히가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쉽게 죽도록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창틀에 계속 서 있는 나를 바라보는 에리히의 청회색 눈동자가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쥐었던 주먹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나 같은 애를 살리기 위해 이러는 게 무척 화가 나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도망치려 하지 말란 말입니다.”
신경질적인 마지막 말. 목적을 다 확인한 이상 굳이 더 창가에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창가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에리히는 내가 내려온 것을 다 보고선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에리히가 정신이 팔린 사이 슬쩍 꺼내 둔 마법 책을 들고 밖으로 움직였다. 그때 에리히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를 불렀다.
“당신.”
이젠 이 자식이 마님이라고도 부르지 않네. 괜히 들고 있는 마법 책을 빼앗길까 봐 몸이 긴장했다.
“제가 말리지 않았으면, 정말 그대로 떨어졌을 겁니까?”
“아니요.”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역시 사람 사이에는 신뢰가 이렇게나 중요하다. 내가 솔직하게 말한다고 한들 조금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 믿지 않을 이유라도 있나요?”
무시하고 나가려던 내 눈에 에리히의 손이 힐끔 보였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는지 피가 나올 것 같았다.
‘에휴.’
놀라서 충격받은 사람을 그대로 두고 나가는 것도 인간이 할 짓이 아닌 것 같긴 하다. 나는 에리히에게 차분히 말해주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해 봐야 뭐 하겠어요.”
“…….”
“현실은 그대로인데.”
당신 착각이랑 다르게 난 멀쩡히 살아 있다고 얘기해 준 뒤 책을 껴안고 쪼르르 도망쳤다. 다행히 에리히한테 마법 책을 빼돌린 것은 안 걸렸다.
*** 에리히는 첫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에스텔 리베르탄.’
갓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달콤한 색채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스텔은 온몸에서 귀하게 자란 아가씨 같은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블로뉴 남작.”
증오스러운 리베르탄. 에리히는 충성했던 가문조차 토사구팽한 리베르탄에게, 결국 그의 부모를 죽이고, 지울 수 없는 화상을 남긴 리베르탄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어차피 블로뉴 남작가는 리베르탄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한 가신이었으니, 가신을 잃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에리히는 그 대가가, 아끼던 입양 딸의 죽음이면 적당하다 여겼다.
“아, 잠깐 시간을 보낼 책을 찾으러 왔어요.”
보좌관인 에리히는 주인인 요한의 명령을 완벽히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에스텔의 말간 얼굴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 치미는 분노를 통제할 수 없었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저런 걸 편히 지내도록 둔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다들 너무 친절하고 좋네요.”
그래서 그는 적의 가득한 시선으로 여자를 보며, 비웃었다.
“이곳은 리베르탄이 아닙니다. 마님께서 웃으면서 함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알아두셨으면 싶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얼굴. 왠지 찝찝해졌다.
“……이해했어요.”
에스텔은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도 용케 울지 않았다.
“멋대로 서재에 와서 미안해요. 어쩌면, 너무 들뜨는 바람에 제 처지를 잊었던 것 같아요.”
아무리 모욕하고, 깎아내려도 에스텔은 에리히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욕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제가 남작의 기대에 맞지 않는 안주인이어서 이런 거잖아요. 그렇다면 제 잘못이겠죠.”
에리히는 가련하게 서 있는 에스텔과 대화할수록 자신이 가해자가 된 것 같았다. 도대체 왜일까. 유일하게 색이 진한 남색 눈동자가 묘한 슬픔을 안고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사죄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걸요.”
결국 에리히는 참지 못하고 도망쳤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친 후로도 에리히는 쉽게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사과한다고 해서 휘둘리지 않고, 더 매도하고, 모질게 대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멍청하게 에스텔에 대한 생각만 되새기고 있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이상한 불안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순수한 미소를 짓던 저 여자가, 리베르탄을 향해 세운 장대한 복수를 기어코 무너뜨리고 말 것 같다는. 그래서 에리히는 더 매서운 눈을 뜨고, 에스텔의 모든 행보를 주시했다. 분명 리베르탄과 내통하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런데 이변이 또 발생했다.
“아, 제가 착각했나 봐요.”
그건 누가 봐도 착각해서 할 수 있는 실수가 아니었다. 가스피어 남작은 렉시어스 폴만과는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다, 친인척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수정 브로치가 아주 예쁘네요. 차림과 브로치가 아주 잘 어울려요.”
에스텔은 가스피어 자작이 차고 있지도 않던 자수정 브로치를 칭찬했다. 그리고 블란쳇 공작가에서 자수정 브로치 하면 유명한 사건은 하나뿐이었다. 에스텔이 직접 말하기도 했던 ‘렉시어스 폴만’과 엮인 사건. 처음 에리히는 에스텔이 한 말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 사건이 블란쳇 내에서 유명한 사건이라고는 하나, 에스텔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가스피어 자작의 침실에서 자수정 브로치가 나왔습니다.”
심지어 가스피어 자작이 진범으로 밝혀지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블란쳇 공작가의 신뢰를 쌓으려 했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범인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 나았으리라. 그런데 에스텔의 행동은 범인을 밝히려 했다기엔 너무 모호했다.
‘도대체…….’
심지어 에스텔은 태연하게 모든 말을 하고 난 뒤돌아서서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큰 결심을 하고 움직였단 뜻이다.
‘그 여자의 목적이 뭐지?’
에스텔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서재에 들어간 에리히는 또다시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에스텔이 들고 있던 책 제목을 봐버린 것이다. <고통 없는 죽음을…….>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앞부분은 선명히 보였다. 에리히는 금지 서고에 어슬렁거리다 기어코 그런 책을 꺼내는 에스텔에게 다가갔다.
“[죽고 싶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길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
설마 독설 좀 했다고 시위하는 건가. 복잡했던 생각은 사라지고 분노가 차올랐다. 저런 여자의 속내를 꿰뚫겠다고 고민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뻔뻔스러운 여자.’
역시 리베르탄의 천박한 본성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에리히는 이제 에스텔의 사죄에 흔들리지 않았다.
‘저 끔찍한 본성을 깨달아서 다행이군.’
그러던 그는 불길한 예감에 나갔던 서재로 다시 돌아왔다.
‘저게 무슨…….’
어느새 에스텔은 창가에 서 있었다. 반짝이는 백금발이 창가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창가의 바람은 에스텔을 금방이라도 밀어버릴 것처럼 강하게 불어닥쳤다.
“내 잘못인가…….”
거기서, 에스텔은 울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네.”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에리히는 순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 버렸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는 겁니까? 속죄는 본인이 알아서 생각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설마 저렇게 죽는 것만이 속죄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가스피어 자작을 밀고한 게 여자 나름의 행동이었던가?’
그렇게 한 번 생각하자 여자의 행동이 이상하지만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해가 갈수록 두려움 역시 커졌다.
‘저대로, 죽겠다는 건가?’
저항할 줄 모르는 어린 동물을 괴롭힌 것 같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에스텔은 그를 보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얼굴은 신기루처럼 흐릿해 보였다.
“잠깐!”
결국 에리히는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에스텔을 붙잡았다.
“……왜요?”
“왜……냐니.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바랐던 일 아니었어요?”
누구보다 에리히가 바랐던 일이기는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굳이 그렇게 공들여 그런 여자를 살려둬야 할 이유가 없다고 얘기하기까지 했었다. 아마 주인인 요한이 아니었다면, 이미 에스텔을 처형대에 올려 그 부모들을 절망케 했을 것이다. 아끼던 자식을 잃게 하는 고통이 더 확실하다 생각했으므로.
“정말 제가 말리지 않았으면, 정말 그대로 떨어졌을 겁니까?”
쓸쓸한 표정으로 밖을 나가던 에스텔을 붙잡고 물었다. 차마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다.
“아니요.”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해 봐야 뭐하겠어요.”
에리히는 보지도 않은 여자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소리 없이 흐르고 있을 여자의 눈물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현실은 그대로인데.”
에스텔이 서재에서 사라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에리히는 쉽사리 그 빈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내가 도망가기로 결정한 곳은 정원이었다. 이미 요한에게 정원을 가겠다고 허락도 받았던 데다가. 창문으로 보니까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도 않았다. 몰래 숨어서 책을 읽기에는 딱인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정원에는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공작님?”
내가 책을 읽기 위해 점찍어두었던 거대한 나무 아래. 요한이 이미 편한 복장으로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거대한 나무의 그늘 아래에 잠긴 요한은 사냥을 마치고 누운 배부른 맹수를 연상시켰다. 워낙 잘생겼다 보니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된다.
“기다리고 있었어.”
요한이 손을 흔들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빨리 와. 지금 날씨가 딱 좋지 않아?”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책표지를 뒤집어서 놓으며 요한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요한은 오른손으로 내가 그의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키 차이가 나서인지 그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 거 같다. 하지만 나무보다는 요한의 어깨에 기댄 게 더 편했다. 옆으로 곁눈질해서 보자, 요한의 이마에서부터 강인한 턱까지 이어지는 황홀한 옆얼굴이 도드라졌다. 그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참 잘생겼다.
“제가 여기에 올 줄 미리 알고 있었어요?”
나는 오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런 방법이 있다고요?”
“이 저택은 전부 내 영향권에 있거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알 수 있지.”
그 방법이란 게 흑마법인 모양이었다.
‘진짜 치사하다.’
아무리 흑막이라지만 너무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거 아냐?
“그러면 여태 계속 절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당연히 그렇지는 않았어. 부인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그가 짓궂게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나야, 부인에 대한 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싶긴 해도.”
그 말끝이 꼭 내가 허락한다면 그러겠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이상해.’
가지고 노는 가짜가 도망치지 않게 감시한다는 의미일 텐데도 나는 왠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요한의 시선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지?’
우습지만 요한이 이제는 나 자체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애써 볼을 부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좀 불공평해요.”
“어떤 부분이?”
“잘 모르겠지만, 공작님만 저에 대해서 계속 알 수 있는 거잖아요.”
“확실히 불공평할 수 있겠다.”
선뜻 고개를 끄덕인 요한이 씩 웃었다.
“그러니 부인도 억울하면 알아서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해.”
“그런 게 어딨어요.”
“원래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위해 노력해야 하는 법이잖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요한을 보고 있으니, 억울한 마음이 더 커졌다. 힘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때 갑자기 요한의 큰 손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부인.”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 향해 있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다른 남자 만나고 왔어?”
가라앉은 목소리에서는 묘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
‘짜증?’
그거야말로 흑막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감정 아닌가? 당황한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반문해 버렸다.
“다른 남자라뇨?”
“그래. 내 부인한테서…….”
내 손목을 입가에 가져간 요한이 손목을 살짝 깨물었다.
“다른 새끼 냄새가 나거든.”
피부가 약한 내 손목에 요한의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는 그 흔적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