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잡아먹고 싶게2021.12.31.
“고, 공작님?”
“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내 눈이 나도 모르게 가운 사이로 파인 그의 단단한 몸을 바라보았다. 남자답게 튀어나와 있는 목울대를 시작으로, 패어 있는 근육의 선은 거칠면서도 유려했다. 단순히 근육이 많기만 한 몸이 아니라, 탄탄하게 균형 잡혀 있으면서도 미려한 선을 가지고 있는 몸이었다. 특히 가운으로 가려져 있는 부분마저 묘한 상상력을 자극해 얼굴을 붉히게 했다.
“그러면 왜 갑자기 그런 차림새로 오신 거예요?”
“최대한 빨리 부인과 대화했으면 하는 마음에.”
요한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꼬리를 접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들어?”
사소한 움직임마다 가운 자락이 사그락 움직인다. 잘못했다가는 묶어놓은 끈이 풀려 나머지 몸이 다 드러날 것 같았다. 요한을 보고 있으니 나 자신도 몰랐던 은밀한 충동이 부채질 당하는 듯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라…….”
“서운하게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요한은 속삭이는 듯 유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까이 와.”
여기서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넘어가면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다는 불안함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부인, 긴장하고 있네.”
그가 나를 확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요한과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완전히 밀착했다. 단단한 몸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가운 아래는 맨몸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의 정장 차림으로 안을 때와는 명백하게 달랐다. 그의 맹수처럼 단련된 몸이 더욱 선명하게 살갗을 문질렀다. 체취가 강렬하게 느껴지며 온몸에 열감이 올랐다. 요한이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했다. 서늘한 눈매가 달콤하게 녹아내릴 듯 휘었다.
“그런데 내 앞에서 그러면 위험하지 않을까?”
“왜, 왜요?”
당황해서 어떤 말을 할지 모르겠다.
“그러고 있으면 내가 더 자극되거든.”
요한이 내 귓불을 단단한 손끝으로 지분거렸다.
“잡아먹고 싶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잡아먹는다고?’
잡아먹는다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요한의 말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가며 안 그래도 열이 올랐던 얼굴이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 그러자 요한이 다시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달짝지근하게 울려 퍼지는 나직한 웃음소리. 그 소리는 마치 맹수의 그르렁거림 같기도 했다. 오싹하면서도, 묘하게 설레기도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요한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근육들의 더 생생하게 와 닿았다. 긴 손가락이 흐트러진 내 연분홍색 백금발을 쓸어넘겼다. 귓가가 달아올라서 그런지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아직 우리 사이에 첫날밤은 없을 거야.”
분명 요한의 말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거 원작에서 봤던 대사인데.’
한참 기다렸던 에스텔을 거절하는 요한. 에스텔은 울면서 요한에게 고백했다. 그러자 요한은 싸늘한 얼굴로 에스텔의 손을 떼어내며 웃었다.
‘우리 사이에 첫날밤은 없을 거야. 그 이유는 너도 알겠지.’
‘대체 이유가 무엇인데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날부터 에스텔의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억을 떠올린 내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은 원작과 상황도 대화도 다르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몹시 불안해졌다. 그러자 요한이 의문스럽다는 얼굴로 내 어깨에 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물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내 이마에 손등을 대어주는 요한. 그의 얼굴은 정말 빛이 났다.
‘너무 잘생긴 거 아니야.’
원작에서 왜 그렇게 헤어나오지 못했는지 알 거 같다. 심지어 요한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몸도 좋고 스킨십이 능숙하기까지 했다. 특히 차갑게 생긴 미남이 달콤하게 속삭이는 걸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홀려버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프지 않아요. 그저…….”
“그저?”
“갑자기 이러고 있으니까 긴장돼서요.”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으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몸이 긴장하는 건 결코 나쁜 게 아니야.”
“그러면요?”
“오히려 좋은 거지.”
분명 그는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거절하기엔 설레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경계를 오가고 있었다. 아니면 그의 얼굴이 마냥 설레게 만들어주거나.
“사람이 긴장을 하게 되면, 예민해지거든.”
요한이 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았다. 눈가에 한 겹 더 짙은 그림자가 졌다. 투명한 피부 위의 그림자는 묘하게 고혹적이고 오싹한 분위기가 흘렀다.
“어쩌면 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의 목소리가 그윽하게 낮아졌다.
“더 알고 싶어?”
요한이 내 하얀 목덜미에 가볍게 몇 번 쪽 소리를 내어 입술을 맞추었다. 요한의 촉촉한 입술이 닿을 때마다 내 몸이 무의식적으로 움찔 떨렸다.
“저, 아직은 몰라도 될 것 같아요!”
“나중엔 알아도 될 것 같단 소리네.”
왜 내 말이 그렇게 되는 거야!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서 아마 보지 않아도 벌겋게 물들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요한은 검지 끝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게 했다.
“그 나중이 언제쯤이 되려나.”
깊고 붉은, 어쩐지 차갑고도 뜨거운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원초적인 집착과 광기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는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걸까?’
어차피 당신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을 텐데. 리베르탄의 복수 대상이기만 하다면 내가 아닌 그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텐데. 나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한 뒤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나를 더 세게 가두었다. 흠칫 요한을 올려다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속삭였다.
“부인. 언제든 준비가 되면 말해.”
큰 손이 내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깃털이 온몸을 감싸는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번졌다. 거짓말처럼 나는 바로 잠들었다.
*** 따사롭게 비치는 햇살에 눈을 떴다.
‘요한은 침실에 없어.’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다 환상이었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내 착각은 아니었어.’
나를 유혹하듯 속삭이던 요한. 가운 사이로 보이는 남자답고 단단한 몸, 그리고 그 촉감까지. 설마 내가 그 모든 것을 상상으로 떠올려냈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상상이라면, 그거대로…….’
정신 차리게 소리가 나도록 뺨을 찰싹 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베티에게서 저녁에 열쇠를 받아서 챙겼다.
‘일찍 가면 방해할 에리히도 없겠지.’
물론 요한의 서재이니만큼 에리히뿐만 아니라 요한을 만날 위험도 있었다. 솔직히 어젯밤의 일 이후 요한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로써 웬만하면 남들이 다니지 않을 때 가야 할 이유가 더 생겼다. 준비되어 있는 세안물로 가볍게 씻고 난 뒤 요한의 서재로 갔다. 불행히도 오늘은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피하고 싶었던 에리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보니 에리히의 예민한 얼굴이 더 도드라지는 것 같았다. 성질머리만 아니면 반가웠을 텐데.
“분명 얘기를 해두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단정하게 긴 청발을 묶은 에리히가 눈썹을 모았다. 어쩐지 나를 보는 청회색 시선이 저번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이 서재에는 무슨 일입니까?”
“책을 잠깐 읽을까 해서요.”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내가 먼저 저번에 들은 말을 꺼냈다.
“참고로 허락은 받았어요. 여기 열쇠 보이시죠?”
그러자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쩔 수 없군요. 알아서 하십시오.”
어제에 비하면 훨씬 유해진 반응이다.
‘내가 사과해서일까?’
그토록 증오하던 사람인데도, 사과 하나에 마음이 좀 느슨해지는 걸 보면 본성은 착한 사람인 것 같았다.
‘거기다 난 어제 이상한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에리히의 통과를 받은 나는 그제야 서재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사실 별관의 서재는 서재라기보다는 마치 도서관 같았다. 척 보기에도 무척 고풍스러운 도서관은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정중앙에 있는 큰 창문 덕분인 것 같았다.
‘아. 햇빛 좋다.’
에리히는 이제 내가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얇은 안경을 낀 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으니 왠지 지적인 느낌이 더 해진 것 같았다.
‘책을 찾아보자.’
책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마법’이라는 항목이 적혀 있는 서가를 찾는 것도 꽤 걸렸다.
‘흑마법, 흑마법, 흑마법…….’
특히 마법에 대한 책들은 다 고대어로 되어 있어서 조금 어려웠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고대어를 배워서 다행이야.’
리베르탄 공작가는 다른 건 몰라도 교육 하나는 잘 시켜줬다. 밖에 나가서 리베르탄 공작가가 나를 학대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래서 예법부터 고위 귀족들도 잘 모르는 이상한 고대어까지 익혀야 했다. 그래도 이렇게 쓸 일이 있어서 다행이다. 안타깝게도 흑마법에 대한 책은 없었다. 그래서 대신 마법에 대한 책을 꺼내 한번 펼쳐보았다.
‘고통 없는 죽음을 내릴 수 있는 마법?’
내용을 보니 마법사들은 모두 자연의 법칙을 바꾸기 때문에 폭주하는 경우가 많고 그럴 경우 편하게 죽을 방법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대체 이 서가에서 뭐 하는 겁니까? 꼭 골라도 이런 금지된 곳을…….”
다시 책을 꽂아 넣으려니 어느새 나타난 에리히가 내가 들고 있던 책을 빼앗았다. 책을 바라보는 에리히의 청회색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고대어를 읽을 줄은 알고 들고 있는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읽지도 못하는데 읽겠어요?”
그의 눈이 더 큰 의문에 잠겼다.
“읽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요. 지금 읽어볼까요?”
나는 책을 빼앗아 든 뒤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죽고 싶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길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
“그만.”
내가 들고 있던 책을 빼앗은 에리히의 시선이 더 형형해졌다.
“고대어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그보다 왜 이런 책을…….”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을 뿐이에요. 읽으면 안 되는 책인 줄 알았으면 읽지 않았을 텐데.”
나중에 에리히가 자리를 비울 때 읽으러 와야겠다. 에리히 빼고는 감시 인력이 없는 것 같으니 시기만 잘 노리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마법서가 꽂힌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들었다.
“당신은…….”
아직도 그 책을 꽉 쥐고 있던 에리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베르탄 공작가가 어떤 가문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의 눈동자에는 적의와 혼란이 가득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인가?’
나중에 내가 도망치더라도, 조금은 나를 덜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니까. 물론 내 말 몇 마디로 복수귀들의 감정이 다 해소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사과를 듣는 것과 사과를 듣지 않은 것은 정말 큰 차이가 있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에리히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목소리는 짜증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아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해봐야 화만 더 돋울 뿐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안해요.”
“또, 미안하다. 그 말이면 다 됩니까?”
그러자 에리히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양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그건 위선입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사과는 공허할 뿐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잖아요.”
어쩐지 에리히는 더 적대적으로 변했다. 이번에는 사과하지 말았어야 했던 건가.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시켜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남작은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나요?”
그러자 이를 아득 간 에리히가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는 겁니까? 속죄는 본인이 알아서 생각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에리히는 도서관을 떠났다. 적당히 흘려듣고 있던 나는 기뻐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앗. 기회가 왔다.’
에리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마법 서가에서 책을 꺼냈다.
‘바로 돌아오진 않겠지?’
아침부터 적의 가득한 시선을 상대했더니 속이 답답해졌다. 책을 읽기 전 바람을 쐴 겸 도서관에 있는 큰 창문을 활짝 열었다. 휘이익- 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마구 휘날렸다. 오랜만에 쐬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뜨고, 몸을 좀 더 당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는 오싹하고 기괴해 보이는 미로 정원이 보였다. 보통 귀족가나 공작가엔 보기 어려운 공간이다.
-에스텔.
전보다 더 선명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이 아니었어.’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서 창문 난간 위에 올라섰다. 다행히 난간이 돌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 크기가 커서 위험하지도 않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위치를 보면.’
정확히 저 숲에서 온 것이다. 저번에도 숲이었지.
‘숲에 뭔가가 있는 건가?’
다시 내려가려는데 바람에 섞인 먼지가 눈에 들어간 모양이다. 눈이 따끔거려서 깜빡였다. 이럴 때 비비면 더 아파진다. 하지만 뭐가 큰 게 들어갔는지 쉽게 상황이 진정되지 않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애꿎은 바람을 탓할 수도 없고. 그러면 내 잘못이라고 해야 하나. 결국 나는 눈가를 비비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되네.”
저번에 눈을 비볐다가 심하게 충혈돼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문을 닫고 나갔던 에리히가 소리 없이 들어와 있었다. 에리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딴 걸 방법이라고 생각한 겁니까?”
무슨 방법?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창틀을 잡고 있던 손이 살짝 미끄러졌다.
“잠깐!”
에리히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